살아 있는 도서관
김이경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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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 좋은 불쏘시개는 없느니!"

정신을 좀 슬게 하는 책들을 불살라 왕국의 난방까지 해결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있으랴. 광장에는 거대한 용광로가 놓이고, 사람들은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책들을 던져 넣었다. 골수에까지 좀이슨 자들은 불길을 피하기 위해 몰래 책을 감췄다. 그자들에겐 철퇴가 필요하다. 철퇴는... 활자판을 녹이면 되었다. 왕은 기꺼이 재활용을 허락했다. 문자의 시절은 끝났다. 이제 칼의 시대였다.  

-'분서' 중에서

만약 저승이 커다란 도서관이라면 어떨까.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저승에서 할 일이란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고, 그걸 잘 써서 통과가 되면 니르바나의 세계에 들지만 안 되면 될 때까지 계속 써야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과연 내 삶은 책으로 쓸 만큼 특별하고, 감동적인 뭔가가 있었던 걸까.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극중 누군가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니르바나에 가지 못하고 저승에서 자서전 쓰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 역시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쉽게 글을 쓰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었다. 모든 은유를 무색케 하는.' 이라고 말이다.

이 책 <살아 있는 도서관>은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던 <순례자의 책>이 무려 9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 것이다. 초판에는 책에 관한 단편 10편이 실려 있었고, 이번 개정판에는 처음과 끝에 2편의 이야기가 덧붙었다. 추가된 처음 프롤로그는 애초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던 동화 같은 짧은 상상, 이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으며, 마지막 에필로그는 오랫동안 작가가 마음속에서 궁글려온 이야기로 지난해 발표한 최신작이다. ‘책에 관한 소설집이라는 전무후무한 형식도 놀랍지만, 이 소설집 속에 실린 단편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도 다양하고, 흥미진진하고, 기발하고, 매력적이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마치 어린 시절 막 세계 명작 동화에 입문했을 때의 그런 기분이랄까. 책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페이지들에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힘이란, 그야말로 굉장했다.

"길을 잃었소?"

"아니오. 책을 구하러 가는 길이오."

흰 수염을 늘어뜨린 대상이 물었다.

"책이라고? 그게 무어요?"

"거짓은 죽이고 진실은 영원히 살아남게 적어두는 거라오. 내 혀가 죽은 다음에도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책이 있기 때문이오."                           

                 -'순례자의 책' 중에서

세상에 없는 책을 상상하고, 그런 책들이 꽂힌 도서관을 꿈꾸는 마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저승의 도서관'이라는 그림을 완성시켰고, 고대 서구사회에서 책의 주재료였던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넘어 13세기부터 시작되어 16세기 이후 유행했던 인피로 제본한 책도 등장한다. 조선시대 패설에 얽힌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일본 에도 시대의 책 대여상 가시혼야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진진해서, 하나의 소재로 발전시켜 장편으로 발전시켜도 좋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거기다 책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책을 어떻게 훼손하고 통제하는지 보여주는 분서의 역사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도 있고, 덴마크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 도서관'에서 모티브를 얻은 표제작도 매우 재미있었다.

시대도, 소재도, 방식도 너무 다양한 단편들이 마치 선물 상자처럼 느껴지는 이 단편집은 그 뿐 아니라 ''에 관한 방대한 지식까지 함께 전해 주고 있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이 끝나고 나서는 '소설 속 책 이야기'라고 해서 각각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지식들이 실려 있다. 인류의 놀라운 발명품인에 관한 인문학적 주제를 '이야기'로 재탄생시키게 된 계기가 된 정보들이라 소설만큼이나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누드 제본 방식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책에 관한 백과사전 급 단편 모음집'이라는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제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 자체로도 아름답고, 360도 쫙 펴지는 제본이라 읽기에도 너무 좋고, ''이라는 것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식이라 이 작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본이라는 생각도 든다. 짧고 술술 읽히는 이야기들이지만,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멋진 작품이라 오래된 도서관의 운치만큼 여운을 남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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