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디블 가족 - 2029년~2047년의 기록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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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감정의 영향을 받아. 모든 값어치는 주관적이야. 따라서 돈은 사람들이 느끼는 딱 그만큼의 가치를 갖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은 돈을 믿기 때문이야. 경제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까워. 수백만 시민들이 통화를 믿지 않으면 돈은 그저 색을 입힌 종잇장에 불과해. 마찬가지로 채권자들 역시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면 그 돈을 결국 받는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돈을 빌려주지 않겠지. 그러니까 믿음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야. 유일한 문제라고."

이야기의 배경은 세계 대공황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9년의 미국이다. 서민들은 심각한 물 부족 사태와 실업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들은 샤워를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그나마도 초절수 샤워기를 이용해 안개처럼 분사되는 물로 씻어야 했다. 그렇게 물 부족으로 인해 평상시에도 재활용수를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렇게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뉴욕의 식당들은 붐볐고, 증권시장은 활황이었으니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국은 그 동안 숱한 위기를 겪어 왔다. 2001년의 911테러로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받았고,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뒤이은 세계경기 침체, 그리고 2024년에는 스톤에이지 사건으로 주요 인터넷 인프라가 마비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사회는 예상보다 빨리 안정세로 회복되었지만, 이번에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다. 바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금융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2029년의 어느 날, 미국 대통령은 중국, 러시아 동맹국을 상대로 무혈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하룻밤 사이에 달러의 가치가 폭락하고, 새로운 기축통화가 이를 대체하면서 정부는 보복성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게 되는데...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은 국가의 위기를 넘어 시민들 모두의 돈도 순식간에 집어삼키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이야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저작권사를 운영하며 저명한 소설가들을 유치하여 큰돈을 벌어 들인 더글러스 맨디블의 가족들이 이 위기 상황을 겪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더글러스의 장녀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장녀 에놀라와 뉴욕 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카터, 그리고 카터의 두 딸과 막내아들, 그들의 가족들이 있다. 주요 스토리는 카터의 큰딸로 노숙자 보호소에서 일하는 플로렌스와 그녀의 가족, 사설 클리닉에서 환자를 돌보며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둘째 딸 에이버리와 그녀의 가족들이 보여 주고 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해선 아버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손해를 많이 본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잖아. 미래를 위해 저축한 사람들. 미래를 믿은 사람들. 자기 자신을, 그리고 미래를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기 당한 기분을 느끼고 있거든. 거대한 몹쓸 장난에 당한 기분이라고."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누구나 생각했지만 아무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가장 시니컬하고 강렬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이다. <케빈에 대하여>에서는 소시오패스 아들을 둔 엄마의 모성애를 다뤘고, <내 아내에 대하여>에서는 의료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에 대해, <빅 브러더>에서는 사회적 문제인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 문제인비만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번 작품 <맨디블 가족>에서는 금융 쿠테타로 인한 통화의 위기로 인한 서민의 삶을 통해 정부와 사회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장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날을 각자의 입장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맨디블 가족에게 통화의 위기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꿈처럼 현실로 다가온다.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 왔고, 미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노인 원호 생활시설에서 여생을 즐기던 더글러스부터, 플로렌스의 외동아들로 어른보다 더 경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심이 많은 열세 살 윌링에 이르기까지 맨디블 가족들은 4대에 걸쳐 각자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재정적 파탄을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인프라나 금융을 포함해 모든 거래는 오프라인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어 종이 계좌 내역서와 수표책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민간 대중교통이 사라지고, 국가는 개인이 보유한 모든 금을 회수하겠다고 선언한다. 주식 시장이 붕괴되고, 자본가들의 연금이 날아가 버리고, 군인들이 집들을 다니며 숨겨둔 금을 찾아 개별 수색을 하기 시작한다. 담보대출 이자는 계속 치솟았고, 월급의 물가 수당이 올랐지만 실제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시작에 불과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이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엄청난 연구 조사를 했고, 그 철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논리를 토대로 경제적 디스토피아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너무도 리얼하게 현재를 반영하고 있어 더 오싹하고, 공감되는 무서운 작품이기도 하다. 맨디블이라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패권전쟁으로 생존 위기에 직면한 서민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 그 돈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등장 인물들에겐 하나 같이 대사가 빽빽하게 주어져 있고, 마치 경제학 책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경제와 관련된 전문적인 이론들이 난무하는 작품이라, 읽기에 수월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저 허구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현재를 너무도 소름 끼치게 반영하고 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 만큼 현대 사회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시대를 탁월하게 포착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2018년 현재, 우리가 이 작품을 꼭 읽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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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0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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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2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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