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모에가라 지음, 김해용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가오리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은하철도의 밤》을 받아 들었다.

“미야자와 겐지는 도호쿠에서 성장기를 보냈어. 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도쿄로 이주해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일본을 떠나본 적이 없었지. 그런 사람이 은하여행을 그린 책을 쓴 거야.”

가오리가 차창으로 들이비치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신 듯 커튼을 반쯤 내리며 말했다.

가오리가 내 눈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어디로 떠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미야자와 겐지는 아마도 병든 누이와 은하여행을 떠나고 싶었을 거야.”

만약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시간 속으로 가고 싶을까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 혹은 그런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게 첫사랑일 수도 있고, 뭔가에 대한 첫 번째 경험일 수도 있고, 잊을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모에가라는 과거에 만났던 연인 가오리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녀를 만난 날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으며, 비로소 오래도록 멈춰 서 있던 고장 난 생의 시계가 째깍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생의 가장 특별했던 순간, 바로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어 준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했던 존재가 누구의 삶에서나 단 한번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배경은 굉장히 특별하다. 일본의 평범한 샐러리맨이 트위터에 올리기 시작한 글이 9만 명이나 되는 팔로워로부터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며 결국 단행본으로 출간이 된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트위터에 140자씩 글을 써서 올리다 보니 ‘140자 문학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고. 게다가 저자인 모에가라는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그저 평범한 마흔 세 살의 중년 남자에 불과했다. 그저 자신이 살아온 생의 경험들을 글로 풀어내는 것만으로는 소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에가라는 수많은 독자들의 열광과 공감을 얻어냈던 것일까.

"국회도서관에는 우리가 앞으로 50년쯤 더 살고,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해도 끝내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출판물들이 있어. 세계인구는 70억을 넘어 점점 더 불어나고 있지. 우리가 앞으로 50년을 더 산다고 해도 모든 인류를 다 만나볼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기적이나 다름없어."

그렇다. 세키구치가 그나마 이런 녀석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 해올 수 있었다.

아트디렉터로 일하는 모에가라는 흔들리는 전동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가 '알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글과 함께 한 여성의 이름을 보게 된다. SNS를 하다 보면 종종 내가 아는 사람 혹은 아는 사람과 연결된 다른 아는 사람들이 추천 목록에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여성은 바로 지난날 자신보다 더 소중했던 여자 가오리였다. 지나치게 친절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덕분에 그는 가오리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현재 남편과의 생활과 일상들을 둘러보게 된다. 그러다 전동차 안의 밀려오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그만 실수로 가오리에게 친구 신청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했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20대 초반 시절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별다른 꿈도 없이 에클레어 공장에서 포장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취업정보지 펜팔을 통해 가오리와 연락을 하다 만나게 되고, 연인이 되었다. 이야기는 17년 전 펜팔로 만났던 연인을 17년 후 페이스 북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의 그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가 살아낸 시간과 사는 동안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하고 소소하게 들리지만 8,90년대의 색채와 풍경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불운의 연속이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귀여워해주었던 스트립걸 누나, 에클레어 공장의 인간미 넘치는 동료 나나미, 오랜 세월 함께 일해 온 동료 세키구치 등등... 지금의 그를 잊게 만든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 잊을 수 없는 연인 가오리도 있었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내 이야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지나온 내 생을 돌아보며 나를 스쳐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이를 만난 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건 기적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런 기적이 찾아올 것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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