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관 2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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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2」를 읽으며 눈시울을 몇 번이나 훔쳤는지 모른다.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등골이 쭈뼛 서는 서늘함을 느끼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포룸 로마눔에서 개혁을 외치는 호민관에 환호하는 로마인이기도 했다. 이천년 전부터 쌓여온 역사는 콜린 매컬로의 펜 끝에서 재탄생했고, 번역이라는 프리즘 너머로도 선명한 광채를 드러낸다. 나는 역사를 뛰어넘은 인물들의 생생한 카리스마에 압도당하고, 또 해체되어 무력한 독자일 뿐이었다. 역사가 이미 스포일러이나, 그럼에도 이 책을 읽게 될 다른 분들을 위하여 중요한 부분은 감추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로마의 일인자』에서 『풀잎관』이 다루는 시기는 20여년인데, 기원전 110년에서 86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풀잎관 2」의 전반부는 기원전 91년의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주인공이다. 『로마의 일인자』에서 게르만에 맞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대, ‘마리우스의 노새들’ 대다수는 로마시민 5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최하층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권리가 없기에 의무도 없던 이들은 군인으로 다시 태어났고, 마리우스는 전쟁 후 그들을 공유지에 정착시키고자 한다. 그들에게 땅을 주겠다는 개혁은 반대에 부딪치고, 마리우스는 세금을 걷느라 미처 그 ‘과정’을 신경 쓰지 못했다. 로마를 대표하는 ‘징세청부업자’들은 학정을 일삼아, 아시아 속주 내 반발은 커져간다. 속주와 이웃한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왕은 지중해 세계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다.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로마에게 충성(세금, 군인)을 제공하며 ‘로마 시민’이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오랜 차별이었고, 이로 인한 불만은 끓어 넘치기 직전이었다.


「풀잎관 1」에서 아시아 속주에 파견된 총독 스카이볼라는 잘못된 세금징수계약을 바로잡는다. 감찰관들은 로마 시민 전수 조사를 계획하고, 이탈리아인들은 거짓 명부를 작성한다. 사실 여부를 증명하지 못할 때 벌어질 참극을 각오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법정을 세워 그들을 가혹하게 처벌하고, 결국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에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마르시족 실로는 그들의 계획을 마르쿠스 드루수스에게 털어놓고, 형제 간 전쟁을 막기 위해 드루수스는 호민관이 되어 시민법을 개정하기로 결심한다. 로마의 가장 보수적인 피를 이었으며, 도덕과 법의 절차를 지키며 평화롭게 회의를 이끄는 드루수스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간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 드루수스는 로마의 시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투표일 전날, 그는 법안에 반대하는 원로원의 사주로 피격당한다. 그가 남긴 유언은 ‘누가, 누가 나처럼 우리 공화국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였다.


그 외침에 대한 답은 동맹시 전쟁이었다. 이탈리아는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고, 마르시족은 로마에 선전포고한다. 사태파악을 못한 원로원은 이탈리아인의 참정권 허용을 지지한 이들을 법정에 세운다. 아스쿨룸 피켄툼 학살 이후 겨우 로마로 돌아온 법무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의 증언을 듣고서야, 원로원은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피를 흘리지만 얻을 것은 없는 전쟁, 로마의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미 준비를 마친 이탈리아에 로마는 패전을 거듭한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잘 준비된 군사들과 함께 유력 세력으로 떠오른다. 비관적인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이 되어 답답해하던 술라는 마리우스의 편지로 노장의 군대에 합류한다. 마리우스는 로마에 첫 승리를 가져오지만 뇌졸중도 함께였다. 술라는 폼페이에서 만 3천여 명으로 10만 명이 웃도는 삼니움족을 몰아낸다. 그의 병사들은 그에게 임페라토르라 환호하며, ‘풀잎관’을 선사했다. 율릴라가 아닌, 백인대장들이 엮은 바로 그 풀잎관을! 운명의 여신은 술라에게 활짝 웃었고 그는 로마에 돌아와 집정관이 된다. 언젠가 스카우루스가 예감했고, 선택받은 소수가 본 술라 안의 짐승이 깨어나고 있다.


열 살이 된 어린 카이사르는 안팎으로 배우며 고모부의 손발이 된다.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는 마리우스의 재활의지를 끌어내고, 마리우스 2세의 문제를 확실히 봉합하는 역할을 한 것도 그였다. 카이사르와 함께 시대를 이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수습 군관이 된다. 천성적인 약골인 그를 구원한 것은 폼페이우스 2세였다. 우리의 과거이자 그들의 미래에서 키케로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만 최고가 될 수 없었던 까닭은 그가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자신이 전장과 맞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어린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로부터 좋은 가르침을 받는다. 파트리키가 아니라 병사로서 싸우라는 조언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조언에 충실히 따를 것이고, 자신의 병사들로부터 사랑과 존경, 충성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와 카이피오의 죽음으로 드루수스 저택에 사는 여섯 아이들은 새로운 보호자를 찾는다. 드루수스의 동생 마메르쿠스는 최고위원 스카우루스의 신임을 얻으며, 술라는 아일리아와 이혼하고 달마티카와 재혼한다. 술라의 가정생활을 통해 로마 가장의 권위, 파트리키 여성들의 위치 등을 실감할 수 있다.


로마의 매력은 민주적이고, 도덕을 부르짖으면서도 어느 한 순간에 야수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찬란한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키고 향유하는 변덕스러운 시민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원로원 의원들과 신관들, ‘위엄과 영광’을 재현하려는 파트리키의 욕망, 이 모두는 ‘로마’의 영속을 위해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콜린 매컬로의 탁월한 선택, 어째서 로마 공화정 말기인가를 책장을 넘길수록 실감하고 감탄한다. 로마 공화정의 찬연한 마지막을 장식할 영웅들의 부상과 몰락, 인간적 일화와 초월한 일면들을 활자 위로 돋아내게 만드는 필력.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다.


스카우루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마에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운명이 과연 그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는 비쩍 마르고 늙고 털이 뽑힌 새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자네를 아주 좋아하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필리푸스보다도 자네의 손에 맡겨졌을 때 로마가 더 끔찍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한쪽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렸다. “자네는 타고난 무관이 아닐지 모르지만 원로원에 들어온 후 거의 줄곧 군대에 있었지. 내 경험에 따르면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한 원로원 의원들은 독재자처럼 변한다네.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보게나. 그런 사람들은 고위 정치인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정치적 제약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저의 시대가 왔을 때 로마가 어떻게 될지는 그 시기의 로마가 어떤 모습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만은 약속드리죠. 저는 로마가 우리 조상들을 욕보이는 꼴을 절대 두고보지 않을 겁니다. 또한 사투르니누스 같은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꼴도 절대 두고 보지않을 겁니다.” 술라가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396-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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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11-26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권까지 읽다가 잠깐 멈춤상태에 있어요.
술라 나왔을 때 엄청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 다시 돌아가야지.
<풀잎관>도 여전히 재미있나 보군요.
어느 한 순간에 야수성, 이 문장이 아주 근사해요. 로마의 특징을 아주 선명하게 설명해주신 것 같아요.
에이바님 리뷰 읽었으니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지요? ㅎㅎ

에이바 2015-11-26 16:19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리비아 드루사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풀잎관 1권에서 밝혀진답니다.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웃다가 다시 울게 돼요. 리비아의 오빠인 리비우스 드루수스도 한층 성숙해지고요. 그가 2권에서는 호민관이 되어 전무후무한 카리스마를 갖게 돼요. 야만이라기엔 좀 맞지 않고, 야수성이 어떤가 했는데 좋다고 해주시니 저도 좋아요. 풀잎관도 꼭 읽어주셔요.ㅎㅎ
 
쇼팽 노트 - 가장 순수한 음악 거장이 만난 거장 1
앙드레 지드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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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쇼팽 노트』는 ‘이 책을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 신부님의 영전에 바친다.’로 시작한다. 음악 애호가이나, 연로한 탓에 피아노 앞에 앉은 지 오래인 신부님은 소리 없이 악보를 읽으며 음악을 상상한다고 한다. 독일인인 그가 지드에게 털어놓은 비밀은, 그가 읽는 악보가 바흐도 모차르트도 아닌 ‘쇼팽’의 악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음악 중에 가장 순수한 음악이죠.’ 지드는 매우 공감하며 이렇게 글을 잇고 있다.


“가장 순수한 음악.” 바로 이것이다. 내가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한 표현, 그토록 연세 높고 중요한 인물인 종교계 원로가 지닌 일체의 권위로부터 보호하려고 내가 마음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놀라운 표현, 그러나 콘서트에서 연주자들이 우리에게 연주해 보이는 그 현란하고 세속적인 것이 쇼팽의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것이다. (9)


맞다. 내가 생각하던 쇼팽의 음악에 대한 감상이 바로 그것이다. ‘현란하고 세속적인 음악.’ 나는 클래식 애호가도 아닐뿐더러 쇼팽에 대해서도 유약하고 섬세한 기질의 작곡가, 상드의 남자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부터 쇼팽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17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쇼팽을 이렇게도 칠 수 있는 거였나? 결국 유투브 채널을 통해 몇 번이고 그의 연주를 보고 들었고, 실황 앨범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관련 책을 여럿 보기 시작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쇼팽 노트』는 그 중에서도 특히 어렵게 느껴진 책이다. 앙드레 지드라는 이름의 무거움이 첫째, 쇼팽의 음악에 대한 그의 숭고한 사랑이 둘째, 그리고 쇼팽의 음악 세계를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이 그 어려움들이었다.


1장인「쇼팽 노트」의 시작부터... 나는 쇼팽의 전주곡(프렐류드)을 감상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D단조 전주곡, A단조 전주곡이라고 하면 모른다. 하지만 번호를 붙여 전주곡 24번, 전주곡 2번이라 하면 금세 알기에 책은 포스트잇으로 가득해졌다. 이렇게 얇은 책에다 이리도 많은 인덱스라니. 아무튼 지드는 「쇼팽 노트」에서 그가 생각하는 쇼팽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지드의 생각에, 쇼팽을 리스트처럼 연주해서는 안 된다. 기교로는 결코 쇼팽을 연주할 수 없다. 그러한 연주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가장 좋은 연주는 ‘산책’과도 같은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연주자의 손가락 아래서 빚어지는 악구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처럼 보이고, 연주자 자신조차 깜짝 놀라게 되고, 듣는 이를 연주자의 황홀경 속으로 들어오라며 은근히 불러주는 것이 나는 좋다. (16)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유혹하고, 설득’하는 쇼팽의 음악은 ‘당신을 문득 멈추게 하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것이지 능수능란한 기교적 음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쇼팽은 감상적이다. 하지만 지드가 그를 좋아하고 칭송하는 것은 그러한 슬픔(단조)을 통해 기쁨(장조)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음표에 인간적인 감정을 담아, 음 하나하나에 표현적인 힘을 싣는 것이 바로 쇼팽의 표현력이다. 여기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전주곡’이다. 종래의 전주곡이 푸가와 짝을 이루었던 것(그래서 이름이 전주곡)과 달리 쇼팽의 전주곡은 그 자체로 손색없는 ‘연주회용 전주곡’이다. 이 전주곡들은 쇼팽의 천재성이 드러난 작품이라 평가된다.


지드는 쇼팽의 음악을 기교만으로 연주하는 것에 대해 여러 번 불만을 털어놓는다.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는 쇼팽을 연주할 때 테크닉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악구가 끊임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것’이 쇼팽의 특별한 기법이라는데 말이 쉽지... 오른손의 루바토를 위해 왼손의 박자가 정확하게 지켜져야 하지만 결코 반주처럼 느껴져서는 안 된다. 지드가 지적하는 것처럼 기교로서만 연주해서도 안 되고, 감상적으로만 연주해서도 안 된다. 결국 (다른 음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쇼팽의 음악도 테크닉과 해석의 섬세한 조화가 요구되는데 이는 간과되기 쉽고, 따라서 쇼팽의 음악은 연주하기 까다롭다는 것이다.


「쇼팽 노트」는 쇼팽에 대한 지드의 해석과 연주 가이드라 할 수 있다. 지드 자신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으며(1927년 2월 28일 일기에 따르면 매일 세 시간씩 연습한다고!), 악보를 보고 연구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을 들인다. (그가 피아니스트 아니크 모리스를 교습하는 장면이 담긴 영화 내용도 실려 있다.)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드가 해설하는 작품의 악보, 마디가 함께 실려 있지만 해당 작품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지 않으면 그의 목소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2장인 「앙드레 지드의 일기」와 3장 「쇼팽 노트에 관한 단문들」은 1장을 보충하는 텍스트들이다. 4장에서 미카엘 레비나스는 지드의 「쇼팽 노트」에 덧붙여, 쇼팽의 음악을 해설하고 있다.


지드는 쇼팽의 작품이 폴란드적인 감성을 담아낸 것을 인정하면서도, 프랑스 방식도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마도 '해설'에 따르면, 프랑스 피아니즘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쇼팽은 자신을 폴란드인이라 생각했지만, 주 무대는 프랑스였기에 그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연주했던 플레옐이 프랑스 브랜드이기도 하고... 거의 평생을 음악과 함께하며, 쇼팽을 듣고 연주하고 사랑해온 지드가 쓴 「쇼팽 노트」를 단번에 이해하겠다는 것은 내 욕심이다. 그래서 아마 이 책의 리뷰는 다시 쓰게 될 것이다. 여러 연주자들의 해석을 듣고, 악보를 보며 조금은 피아노를 쳐 보기도 하고, 쇼팽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이다. 아, 나도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글, 애정을 쏟아 부은 이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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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5-11-1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저도 요즘 에이바님덕에 예약구매한 조성진 실황 앨범을 아주 잘 듣고 있어요. 아들이 `이걸 대체 어떻게 구입했냐고` 놀라더라고요. 아침에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듣는데, 너무 좋아요. 쇼팽은 현란한 기교의 곡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가을, 낙엽, 회색빛 아침이랑 어울리더라고요. 차를 타고 달리던 무미건조한 길이 덕분에 아주 풍성해졌어요^^

에이바 2015-11-19 16:24   좋아요 0 | URL
오로라님의 아침이 풍성해졌다니 저도 기뻐요.^^ 저도 요즘 조성진의 연주 덕에 참 행복하답니다. 어제는 소나타가, 오늘은 프렐류드 3번, 내일은 스케르초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작품도 계속 바껴요. 오로라님처럼 저도 쇼팽은 현란한 기교로 가득찬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드는 오히려 가장 순수한 음악이래요. 악상을 화려하게 꾸민다거나, 기교를 통한 표현이 아니라 `완벽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표현을 극도로 단순화`하려고 했다고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요.ㅎㅎ

2015-11-19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9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11-1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팽이 듣고 싶어지는 글이에요. 인용하신 지드의 글도 정말 좋아요. 사실 어떤 분야이든 덕후의 글은 읽는 재미와 깊이, 감동을 주기 마련인데 무려 덕후가 지드라니^^, 저도 읽어 보고 싶은 책입니다!!ㅎ

에이바 2015-11-19 23:23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지드가 쓴 글이라 물고기자리님 생각이 났어요. 지드의 밀알~ 책에 등장하는 유년시절 쇼팽 음악과의 마주침도 실려 있어요. ^^
 
기욤 아폴리네르 시집 : 내 사랑의 그림자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0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성귀수 옮김 / 아티초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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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 아래로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네.’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 후 썼다는 「미라보 다리」는 기욤 아폴리네르를 서정적인 시인으로 기억하게 했다. 사실 이 시 밖에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를 담은 아티초크 아트워크-표지의 강렬함은 마음에 쏙 들면서도 다소 의아했다. 시집과 딱 맞아떨어지는 감각적인 표지들이 아티초크의 빈티지 시선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집을 떠듬떠듬 읽은 후에야 표지가 너무도 잘 어울림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이 시집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서’를 모았다. 세상 어느 시가 사랑을 말하지 않겠냐만, 이건 진짜 ‘연애편지’다. 얼굴이 무지 화끈거려서 도무지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에로스적 욕망이 넘실거리는 그런 글이다.


안나 드 노아이유의 시선 『사랑 사랑 뱅뱅』도 '사랑'을 다루고 있고, 읽을 당시 시인의 감정 표현이 굉장히 솔직하다고 느꼈다. 좀 노골적이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기욤 아폴리네르의 작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나의 시가 일기처럼 내밀한 감정을 털어놓는다면, 기욤의 시는 청자를 제대로 상정하고 열망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사랑의 그림자』에 실린 시들은 오로지 한 사람, ‘루’에게 바쳐졌다. 루이즈 드 콜리니샤티용 백작. 정작 시인의 구애에는 미지근하다 그가 군에 입대해버리자, 다음 날 병영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 여인. 8일간의 밀회 이후, 자신의 연인 ‘투투’와 지내기 위해 돌아가 버린 하지만 시인의 몸과 마음을 이미 취해버린 바로 그 ‘무법자’가 아폴리네르의 장미이자 별, ‘루’이다.


병영에서 쓰인 시들은 루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루에 대한 기욤의 감정은 ‘갈망’이다. 그녀의 손길을, 그녀의 몸에 닿고 싶은 욕망은 육체에서 정신에 대한 소유욕으로 발전해간다. 멀리 있는 연인의 또 다른 연인(투투)에게는 ‘우리가 루를 지켜줘야 한다’는 「송가」를 보내기도 한다. 그의 사랑, 열광은 폭력적이면서(육체) 결코 폭력적이지 않(정신)다. 놀라운 것은 관계는 고작 6개월, 세 번의 만남이었으며 마지막 만남에서 이별했음에도 시인은 여전히 ‘루’를 위한 연서를 썼다는 것이다. ‘번역 노트’에 따르면 주변 인물들은 기욤이 루이즈에 의해 성애에 눈떴기 때문이라 본다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에 대한 생생한 욕구와 갈망, 끝없는 그리움. 사랑을 솔직하게, 직설적이면서도 뭉근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너무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시인이 바로 그러하구나. 시에 담긴 감정의 색채가 너무도 선연하고, 너무도 간절해 그 감정에 휩쓸리게 된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천천히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시, 삶을 마비시키는 강렬함. 비록 사랑의 속도는 같지 않았지만, 오래 지속된 만큼 기욤의 사랑은 더 다듬어지고 깊어만 간다. 남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기분이란 이런 것이구나! 


어두운 전나무 숲에서 신음하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나는 우수에 처박힐 것이다

오 나의 루 너의 큼직한 두 눈망울은 나의 유일한 동무들

나의 루가 나를 잊었으니 나는 모든 걸 잃지 않았는가


-「오늘 밤 나는 참호에서 자련다」중에서 (102)



-「Sous les ponts de Paris」는 1914년에 발표된 샹송입니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살았던 벨 에포크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지지 않나 합니다. Lucienne Delyle이 1950년에 부른 버전을 링크합니다.

- 소개하는 시는 자체검열을 마친 '점잖은' 문단입니다. 얼마나 노골적이길래 하시는 분들은 시집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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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1-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폴리네르가 무명시절에 썼던 포르노 소설 두 편이 있는데, 내용이 엄청 야합니다. 오래 전에 <일만일천번의 채찍질>이라는 제목으로 성귀수 씨가 번역한 책이 나왔는데, 절판되었어요. 이 책 안에 ‘일반일천번의 채찍질’과 ‘어린 돈 후안의 무용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문출판사에서 이 두 작품을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으로 만들었어요.

에이바 2015-11-18 20:5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찾아보고 좀 놀랐답니다. 서정적인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범상찮은 과거를 가지고 있더군요. 말씀하신 채찍은 이 시집에서도 자주 등장해요. 좀 쉬었다가 알코올을 읽어볼까 하는데 솔직히 아폴리네르가 두렵습니다. ㅎㅎㅎㅎ

AgalmA 2015-11-2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기네 올젠이 없었다면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어찌 되었을지 모르죠. `루`에게 바친 아폴리네르의 시들 보니 키르케고르의 열정이 문득 생각나서..:ㅡ)

에이바 2015-11-23 21:42   좋아요 0 | URL
철학자의 개인사를 알고 있으니 사랑을 지키기 보다 떠나는 용기를 낸 것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레기네가 젤 불쌍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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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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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40이 가까워 오는 패러데이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영국 워릭셔의 유서 깊은 저택 헌드레즈홀에서 일했던 유모의 아들로, 부모의 헌신 덕에 의사가 되었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다. 건강 보험법이 통과되면 수입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인기는 없지만 실력은 꽤 인정받고 있다. 응급환자를 돌보는 동업자 대신 찾게 된 헌드레즈홀에서 그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조우한다. 저택은 이미 쇠락의 기운이 가득하다. 양차 대전 이후, 에어즈 가문의 가세가 기울었고 넓은 저택을 관리하던 하인들도 하나 둘 떠난 것이다. 패러데이는 저택의 영광된 시기를 잘 기억하고 있다. 방문 이유는 그 댁의 유일한 하녀, 베티의 꾀병 때문인데 너무도 크고 조용한 저택의 ‘기운’에 짓눌려 느낀 공포가 그 원인이었다.


저택의 구성원은 에어즈 부인과 그녀의 자녀들인 캐럴라인과 로더릭이다. 낡은 옷을 걸칠 지언정 과거의 영광을 두르고 살아가는 에어즈 부인과 달리, 자녀들은 어떻게든 살림을 꾸리는데 힘쓰고 있다. 가주인 로더릭은 24살로, 전쟁에서 얻은 상처가 낫기도 전에 농장 일을 하느라 언제나 고달프다. 26살인 캐럴라인은 털털한 성격이지만 저택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지라 외모에 신경쓸 틈이 없다. 그들의 이름에 지워진 책임은 막중하지만... 패러데이는 로더릭의 다리 상처를 봐주겠노라며 주말마다 저택을 방문하며 에어즈 가와 친분을 맺는다. 패러데이의 시선은 저택의 인물들을 낱낱이 해체하며, 당시 영국 사회의 귀족의 몰락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 몰락은 이미 낡아버린 저택의 구성원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악한 것’에 공격을 당하면서 시작된다.


저택(계급)에 대한 공격은 가문을 지켜온 오랜 피의 약점을 하나씩 들춰낸다. 처음은 가주로서의 책임이 막중한 로더릭을, 다음은 개 지프에 의지하는 캐럴라인을 그리고 긍지 넘치는 에어즈 부인의 아픈 과거가 마지막 대상이다. 귀신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은 저택에 머무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지만 오직 ‘에어즈 가’ 사람들만 공격한다. 이러한 존재(리틀 스트레인저)의 정체는 마지막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며, 세 사람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문의 몰락과 마찬가지로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패러데이’의 심리 상태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헌드레즈홀을 동경했고, 쇠락했을지언정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저택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에어즈 가 사람들이 공포에 질릴수록, 에어즈 가의 준-구성원이 되어 이 사태에 끼어드는 그의 모습은 점점 기이한 형태로 발전된다.


폴터가이스트를 소재로 했지만 무섭지 않은 것이, 정작 작가가 얘기하려던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금 으스스하긴 했지만 앞부분은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과학도, 의사로서 전개하는 패러데이의 논리가 의아하게 느껴지는 순간부터 이 소설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패러데이의 욕망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바로 공포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로맨스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후반부에 가서야 이해가 된다. 공포소설이라기 보다는 추리소설에 가깝지 않은가 한다. 소설은 사회변화가 가져온 계급의 몰락과 욕망을 거대한 저택에 비유한다. 저택을 지키려는 사람, 떠나려는 사람, 떠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들어가려는 사람... 결국 떠나고자 한 사람은 자유를 얻지 못했고, 들어가고자 한 사람은 권한을 얻지 못한다. 사회가 변했을지언정, 계급이 몰락했을지언정 이미 그어진 선은 넘을 수 없다는 것일까? 처음부터 시작한 찜찜한 분위기는 개운하지 못하게 마무리된다. 개인적으로 세라 워터스의 전작이 낫다고 느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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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1-1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보니, 조금 무서운 면도 있는 이야기 같은데요.^^;
잘 읽었습니다. 에이바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

에이바 2015-11-14 10:46   좋아요 1 | URL
섬찟한 부분들이 있었어요.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CREBBP 2015-11-14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경우 어느 순간 패러데이의 욕망이 읽혔냐면 캐롤라인이랑 결혼하자고 하면서 우리 집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랬어요 완전 깜놓했죠. 그래서 그 이후부터 그의 계략을 눈여겨보려고 집중했는데 화자가 독자애개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죠

CREBBP 2015-11-14 17:40   좋아요 0 | URL
그 전까도 조금 의심은 했지만..암튼 그럼에도 결론에 대해 이해가 안돼요. 화자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꾸밀 수 있죠? 사건이 있던 부분만 골라서 다시 읽어봐야겠는데 두꺼워서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요.

에이바 2015-11-15 12:35   좋아요 1 | URL
(스포일러)




이건 제가 이해한 거긴 한데... 산만한 중에 읽은지라 기억만 더듬어 볼게요. 패러데이의 진술이 처음부터 거짓일 가능성을 고려해야할 것 같아요. 오히려 헌드레즈홀(상류층)에 대한 욕망만큼은 선연한데, 어릴적에 벽장식을 떼서 호주머니에 넣잖아요. 베티 왕진으로 30년만에 찾은 저택에서도 그 부분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요. 그리고선 로드에게 치료를 빙자해서 접근하는데 집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이죠. 전장에서 귀환한 20대 초반의 청년을 의사가 주무르기 쉽잖아요. PTSD 치료 경험도 있고요. 로드에게 건넨 연고나 담배에 환각 성분이 있었을 수도 있고, 지프를 자극한 것도 패러데이 일 수 있죠. 또 남매와 달리 어릴 때 수전의 존재와 에어즈 가의 영광을 알고 있으니 에어즈 부인을 자극할 수 있죠. 베티는 어리고 순진하니 의사라는 권위가 더욱 먹히고요. 저택 식구를 하나씩 고립하면서 남은 건 캐럴라인인데, 군에서도 멋지게 복무를 했고 `에어즈 가`에 어울리면서도(권위) 어울리지 않는(자유) 인물이잖아요. 캐럴라인을 살려둔 것은 그녀를 통해 욕망을 달성함과 동시에,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요. 후반부 패러데이가 발광할 때 캐럴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처음 봤을 때의 눈빛과 비슷하고,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서 확인할 수 있고... 심지어 지인들까지 캐럴의 파혼을 이해한다고 해야 하나 패러데이를 애잔하게 보잖아요. 결국 삼년이 지났음에도 열쇠를 버리지 않고 저택을 드나드는 집착에서 봐도 뭐 패러데이는 정상이 아니다... 그런...ㅋㅋㅋ 마지막 장면은 자신도 알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에이바 2015-11-15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근데 별점 너무 짜게 줬네요. 3.5 정도 됩니다... 사라 워터스에 대한 기대치 때문에 깎은 거예요 ㅠㅠ

단발머리 2015-11-15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리뷰 잘 읽었어요.
도서관에서 빌려읽던 중에 무섭다는 리뷰가 많아, 무서운 부분까지만 읽어야지... 했거든요.
저택 파티에서 여자아이가 개에게 물렸을때부터 읽지 않았는데 며칠을 계속 궁금한 거예요.
다른 분들 리뷰 읽어도 이해가 안 되구요.
오늘에서야 .... 아하...했습니다.
마저 읽고 싶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그런 밤입니다. ^^

에이바 2015-11-16 13:00   좋아요 0 | URL
에어즈 부인에게 리틀 스트레인저가 다가오는 부분이 좀 무서워요. 개에 물리는 장면부터 재밌어지는데 아쉽네요 ㅎㅎ 근데 전체적으로 그다지 무섭진 않았어요. 음...
 
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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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는 스페인의 황금시대였다. 그러나 정치·외교적 결합은 영토 내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지 못했고,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내적 통일을 위해 가톨릭을 강조한다. 이는 사회·경제적 발전을 시작한 타국에 비해 스페인이 뒤처지는 배경이 된다. 금서 목록의 선포는 출판물의 검열로 문학 발전을 저해했다.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 참전영웅으로, 포로로 붙들려 5년간 노예생활을 한다. 가까스로 돌아온 고국은 짙은 패배감에 빠져 있다. 네덜란드는 독립하였고 무적함대는 영국에 격파 당했으며, 국가는 파산했다. 도덕적 가치를 부르짖던 시절은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 따라서 그는 당시 스페인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는, 기사소설을 패러디하는 노인 편력기사가 등장하는 소설을 구상한다.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에 푹 빠진 한 노인이 옆집에 사는 농부를 꼬드겨 종자로 삼고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이 영감에게 풍차는 거인으로, 창녀는 귀부인으로, 놋쇠 대야는 전설의 투구로 보인다. 따라다니는 시선들은 그를 ‘광인’으로 취급한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소설에 관련된 상황에서만 모험을 빙자한 사건·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주제를 다룰 때 이 이달고의 통찰력과 판단력은 정상이다. 돈키호테는 정말 광인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기사소설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라 모레나 산맥에서 둘시네아로부터 버려졌다는 ‘설정’의 고행을 시작하는 장면을 보자.


이미 내가 말하지 않았나? 돈키호테가 말했다. 아마디스를 모방하여 여기서 절망한 채 어리석고 분노에 찬 자로 지내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곁들여 용감한 돈 롤단도 모방할걸세. … 그중에서 제일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큰 틀에서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작정이네. (355)


돈키호테가 미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도 기사도와 정의를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광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모험을 계속하는 것일까. 편력기사가 되어 정의로운 이상을 펼치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변화된 스페인에서 기사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웅적 가치들은 비웃음의 대상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돈키호테를 조롱하면서도, 그들 역시 기사소설에 통달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작품 초반에 돈키호테의 서재에서 불온서적을 골라내던 신부와 이발사, 미코미코나 공주 행세를 했던 도로테아, 객줏집 주인과 그 가족, 이후 만나게 되는 교단 회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돈키호테만큼 기사소설을 좋아한다. 객줏집 주인은 그 내용이 허구라는 말에 분개할 정도이다.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면서도, 그 때를 상징하는 ‘기사소설’의 가치와 그 상징을 박대하는 당시 스페인 사회의 모순인 것이다.


돈키호테로 대변되는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에서 잘 드러난다. 서문의 ‘자유는 황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이는 세르반테스가 노예 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던 인간의 존엄으로, 자유를 강제하는 것을 무자비하게 여겨 자신의 의지에 반해 끌려가는 포로들을 풀어주는 돈키호테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무어 여인 소라이다와 함께 등장한 포로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아베드라 아무개는 세르반테스 자신이며,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편력기사로서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그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것이다.


그의 주장은 남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었으며, 최고의 가치는 아름다움과 순결이었다. 결혼 후 ‘집안에 갇혀 살던’ 카밀라, 정인이 있음에도 아버지가 결정한 사람과 결혼해야 했던 루스신다, 천과 망으로 창문을 가려놓은 집에 살았던 클라라는 당시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세르반테스는 목동 마르셀라의 순결에 대한 이야기와 비혼 선언을 비호하는 돈키호테를 통해, 여성 역시 남성과 평등하며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자유의지가 있음을 알린다. 이 외에도 신분 차이와 같은 갈등으로 이뤄지지 못했던 남녀를 맺어줌으로써, 자유연애를 거쳐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을 장려하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돈키호테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불도저 같은 인물로 해석되던 시기가 있었다. 시대착오적 인물로, 계몽적 인물로 또 실존적 인물로 해석되기도 했다. 시대별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작품이 전달하는 힘이 그만큼 생생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황 시절을 그리워하는 대한민국은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던 스페인과 닮았다. ‘섬’을 얻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산초 판사의 욕망 역시 로또 1등을 염원하는 현대인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섰던 산초 판사가 돈키호테의 이상에 어느 정도 공감하여 동화되어 가는 것처럼, 가치 있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열정은 그 온도를 주변에 퍼뜨린다. 출간된 지 400년이 지났지만 돈키호테가 우리 시대에 의미를 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사랑’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 대한 열정과 그 도전이 하찮게 느껴지더라도, 그 시도가 몰가치 한 것이 아님을 돈키호테는 보여주고 있다. 비록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지만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을 걸었던 그의 모험은 진정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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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11-12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 항상 `읽고 싶어요`에 올라있는 책이지만, 아직도 시작을 못 하고 있는, 그 돈키호테.
집에는 창비 출판사에서 나온 빨간 책이라, 열린책들 사서 읽으리라 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는데,
에이바님 멋진 리뷰 읽고나니, 이젠 더 이상 안 되겠어요.
읽어야겠네요. 진짜...
만나야겠네요, 이 사람 ^^

에이바 2015-11-12 14:29   좋아요 1 | URL
특유의 만연체도 잘 살린 번역인데 앞 부분만 잘 넘기면(문장) 술술 넘어가요.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도 삽입이 되어 있고, 주석도 풍부한데 주석은 호불호가 좀 갈리는 모양이에요. 미주가 아니라 각주라서... 돈키호테의 모험담에 낄낄 웃다가도 측은해지고 오만 생각이 다 드네요. 기사소설 덕후 영감님 만나보세요, 단발머리님. ㅎㅎ

만병통치약 2015-11-12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덕후˝ 맞네요. 기사애니 덕후...돈키호테를 두고 이런 저런 해석이 많은데 오늘로 논쟁 종결이네요. 돈키호테는 세계최초의 덕후문학이다.!!!

에이바 2015-11-12 17:48   좋아요 1 | URL
그렇죠?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코믹콘에서 코스프레로 유명세를 떨쳤을 거예요.ㅎㅎ

붉은돼지 2015-11-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함 읽어보려고 열린책들 `돈키호테`를 사 놓고는 있습니다만...
그 중후한 자태를 볼때마다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ㅜㅜ 너무 두꺼워요 ㅜㅜ

에이바 2015-11-12 17:50   좋아요 0 | URL
며칠에 걸쳐 읽긴 했는데 재밌었어요. 앞부분에 글투만 좀 적응되면 진도가 쑥쑥 나가요. 액자소설 구성의 이야기들도 좀 있고...

2015-11-13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4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