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아폴리네르 시집 : 내 사랑의 그림자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0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성귀수 옮김 / 아티초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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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 아래로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네.’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 후 썼다는 「미라보 다리」는 기욤 아폴리네르를 서정적인 시인으로 기억하게 했다. 사실 이 시 밖에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를 담은 아티초크 아트워크-표지의 강렬함은 마음에 쏙 들면서도 다소 의아했다. 시집과 딱 맞아떨어지는 감각적인 표지들이 아티초크의 빈티지 시선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집을 떠듬떠듬 읽은 후에야 표지가 너무도 잘 어울림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이 시집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서’를 모았다. 세상 어느 시가 사랑을 말하지 않겠냐만, 이건 진짜 ‘연애편지’다. 얼굴이 무지 화끈거려서 도무지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에로스적 욕망이 넘실거리는 그런 글이다.


안나 드 노아이유의 시선 『사랑 사랑 뱅뱅』도 '사랑'을 다루고 있고, 읽을 당시 시인의 감정 표현이 굉장히 솔직하다고 느꼈다. 좀 노골적이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기욤 아폴리네르의 작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나의 시가 일기처럼 내밀한 감정을 털어놓는다면, 기욤의 시는 청자를 제대로 상정하고 열망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사랑의 그림자』에 실린 시들은 오로지 한 사람, ‘루’에게 바쳐졌다. 루이즈 드 콜리니샤티용 백작. 정작 시인의 구애에는 미지근하다 그가 군에 입대해버리자, 다음 날 병영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 여인. 8일간의 밀회 이후, 자신의 연인 ‘투투’와 지내기 위해 돌아가 버린 하지만 시인의 몸과 마음을 이미 취해버린 바로 그 ‘무법자’가 아폴리네르의 장미이자 별, ‘루’이다.


병영에서 쓰인 시들은 루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루에 대한 기욤의 감정은 ‘갈망’이다. 그녀의 손길을, 그녀의 몸에 닿고 싶은 욕망은 육체에서 정신에 대한 소유욕으로 발전해간다. 멀리 있는 연인의 또 다른 연인(투투)에게는 ‘우리가 루를 지켜줘야 한다’는 「송가」를 보내기도 한다. 그의 사랑, 열광은 폭력적이면서(육체) 결코 폭력적이지 않(정신)다. 놀라운 것은 관계는 고작 6개월, 세 번의 만남이었으며 마지막 만남에서 이별했음에도 시인은 여전히 ‘루’를 위한 연서를 썼다는 것이다. ‘번역 노트’에 따르면 주변 인물들은 기욤이 루이즈에 의해 성애에 눈떴기 때문이라 본다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에 대한 생생한 욕구와 갈망, 끝없는 그리움. 사랑을 솔직하게, 직설적이면서도 뭉근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너무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시인이 바로 그러하구나. 시에 담긴 감정의 색채가 너무도 선연하고, 너무도 간절해 그 감정에 휩쓸리게 된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천천히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시, 삶을 마비시키는 강렬함. 비록 사랑의 속도는 같지 않았지만, 오래 지속된 만큼 기욤의 사랑은 더 다듬어지고 깊어만 간다. 남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기분이란 이런 것이구나! 


어두운 전나무 숲에서 신음하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나는 우수에 처박힐 것이다

오 나의 루 너의 큼직한 두 눈망울은 나의 유일한 동무들

나의 루가 나를 잊었으니 나는 모든 걸 잃지 않았는가


-「오늘 밤 나는 참호에서 자련다」중에서 (102)



-「Sous les ponts de Paris」는 1914년에 발표된 샹송입니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살았던 벨 에포크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지지 않나 합니다. Lucienne Delyle이 1950년에 부른 버전을 링크합니다.

- 소개하는 시는 자체검열을 마친 '점잖은' 문단입니다. 얼마나 노골적이길래 하시는 분들은 시집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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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1-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폴리네르가 무명시절에 썼던 포르노 소설 두 편이 있는데, 내용이 엄청 야합니다. 오래 전에 <일만일천번의 채찍질>이라는 제목으로 성귀수 씨가 번역한 책이 나왔는데, 절판되었어요. 이 책 안에 ‘일반일천번의 채찍질’과 ‘어린 돈 후안의 무용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문출판사에서 이 두 작품을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으로 만들었어요.

에이바 2015-11-18 20:5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찾아보고 좀 놀랐답니다. 서정적인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범상찮은 과거를 가지고 있더군요. 말씀하신 채찍은 이 시집에서도 자주 등장해요. 좀 쉬었다가 알코올을 읽어볼까 하는데 솔직히 아폴리네르가 두렵습니다. ㅎㅎㅎㅎ

AgalmA 2015-11-2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기네 올젠이 없었다면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어찌 되었을지 모르죠. `루`에게 바친 아폴리네르의 시들 보니 키르케고르의 열정이 문득 생각나서..:ㅡ)

에이바 2015-11-23 21:42   좋아요 0 | URL
철학자의 개인사를 알고 있으니 사랑을 지키기 보다 떠나는 용기를 낸 것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레기네가 젤 불쌍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