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글라스 아티초크 픽션 1
얄마르 쇠데르베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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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동트기 직전에는 언제나 공기에 떨림이 있다. _30쪽


무더운 여름, 글라스는 스톡홀름 시내를 산책하다 그레고리우스 목사가 걸어오는 것을 본다. 목사의 외모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자신의 환자이기에 인사를 건넬 수밖에.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를 한 사람의 머리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쇼펜하우어의 일화를 떠올린다. 그레고리우스가 어찌나 싫었던지 글라스는 의지의 힘으로 그를 죽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리란 생각을 한다.


며칠 후 목사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헬가가 찾아와 남편이 혐오스럽다고 고백한다. ‘남편의 권리이자 자신의 의무’인 부부관계가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도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글라스를 존경하는 계기가 된 일화도, 이는 의사를 움직여 목사에게 금욕을 권고하게 한다. 서른셋의 남자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기쁨에 마음을 쓰게 된다.


글라스는 욕망을 자제하는 타입이다. 어려서부터 포부가 대단했으며, 스물셋에 의학 학위를 따자 열의를 잃어버린다. 또래보다 일렀던 사회적 성취는 감정적인 면에서는 미숙했다. 다른 성인남성들이 욕망을 토로할 때, 막연한 꿈과 욕망이 있었을 뿐이다. 천성적인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는 그는, ‘사랑의 꿈’을 믿었고 박제돼버린 스물셋의 첫 키스를 오랫동안 간직한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아름다움을 알기에, 가질 수 없는 여인에게만 끌린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남성의 돈과 명성보다는, 사랑을 쉽게 얻는 남성에게 질투한다. 헬가의 남자인 클라스 레케를 보면서 말이다. 글라스가 느끼는 청춘에의 결핍- 자신이 정상에서 벗어난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 레케의 이상적인 외모와 ‘잠이 들었던’ 헬가를 깨운 그의 순수한 매력… 그러나 이 감정은 그리 날카롭지 않다. 도리어 자신의 권고를 무시하고 아내에게 의무를 이행할 것을 강제한 목사에 대한 혐오, 이를 끝낼 어떤 행위를 꿈꾸게 된다.


글라스는 사실 단호하고 차가운 인물이다. 임신과 출산이 초래할 고통과 불안을 알면서도, 의사의 ‘의무’를 내세워 환자들을 돌려보낸다. 자신을 사모하는 메르텐스 양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해 별다른 반응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마르켈과 비르크와 대화는 나누지만 마음을 털어놓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여름 밤의 일기가 중요하다. 행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등불’을 외치며 깨어난 그 밤, 내면의 목소리들이 벌이는 수많은 대화들. 아주 일품이다.


무의식, 꿈은 강처럼 흘러갔지만 글라스는 그 꿈자락을 기억하고 있었고 외면하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없는 아름다운 회중시계 안에 이 모든 일을 끝낼 무언가를 넣었다는 사실은, 글라스의 사랑과 인생-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 명예와 지위- 두려움조차 불사할 수 있는 강렬한 빛. 아니, 희미한 가짜일까? 어떤 거름망도 없이, 그의 기록은 내면에서 나타났다 사그라들고 발전되는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리(낙태, 안락사)와 도덕과 살인에 관한 이슈들은 지금도 불같은 논의를 일으킬 것이다. 1905년에 이런 글을 쓰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이 작품의 진가는 여름에서 가을, 겨울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글라스의 내면 묘사에 있다. 기존의 도덕 체계를 혐오하며 홀로 살아가는 이 남성은 어쩌면, 1905년 그 당시보다도 현대에 더 어울릴 법한 인물이다. 소설의 마무리까지… “내일 쓰인 소설”이라는 윌리엄 샌섬의 표현이 어울린다.


꿈과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 우리는 기쁨을 느낄 것인가, 두려움을 느낄 것인가? (별점 4.5/5.0)


 


-책을 펼치면 마주하는 이미지들에서 제발츠의 『아우스터리츠』와 브르통의 『나자』를 떠올렸다. 「번역노트」를 보니 이 작가들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 한다. 스톡홀름의 이미지들을 위해…

-「번역노트」에 대한 중역에 대한 이야기도 읽어볼 만 하다.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과 함께 읽었다. 아마도 글라스 내면의 ‘흐름’이 라벨의 흐르는 음표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추천은 스웨덴 국민 밴드 Kent의 노래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도 잘 어울린다.


기본적인 생존의 차원을 넘어선 정신문명은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예술과 문학, 음악도 모두 그곳에서 흘러나온다. (...) 효과적이든 아니든 장식용으로 또는 즐거움을 위해 제작된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모두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다. (...) 그 근원의 이름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꿈이다. _27,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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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토끼 2016-01-26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바님 좋은 밤 되세요

에이바 2016-01-26 21: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심심토끼님도 따뜻한 밤 되세요.^^

2016-01-27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8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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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_14쪽


벨라루스의 언론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만난 대조국전쟁 참전 ‘여성’ 용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라는 말에 대체로 고개를 저었고, 그들이 입을 여는 것은 ‘여성 전우들의 모임’에서 잠깐 눈물을 보인 후였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위대한 용사들이 두려워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에 남자들은 ‘여자들이 꾸며낸 얘기’라고 했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에서 연애질이나 했던 여자들’이라며 손가락질 했다. 참전용사의 귀환에, 어머니는 집을 나가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네가 남자들이랑 있던 것을 아는데 동생들은 시집가야하지 않느냐고. 누이라 부르며 전우애를 키웠던 동료마저도 등을 돌렸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세운 공을 여자와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참전했던 ‘여성’은 두 개의 인생을 산다. 남자의 인생과 여자의 인생. 소녀 저격병들의 활약으로, 독일 측에서 퍼뜨린 ‘소련여자는 간성인(인터섹슈얼)’이라는 선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남자들이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고 주어지는 보상을 누릴 때, 여자들은 조용히 앞치마를 메고 부엌에 서야 했다. 참전 사실을 숨겨야 했다. 아무도 그들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순결했음을 아는 전우들마저도.


소녀 병사들은 순결하고 무지하다. 전쟁에서 시작한 월경에, 자신이 부상당했다고 생각할 정도다. 나이를 속이거나 무작정 부대에 숨어든 여성들은 얇은 사라사천으로 대충 옷을 지어 입었다. 혹한 속 돌무더기를 지나다 찢어진 옷, 드러난 피부는 화상과 동상에 온통 상처였지만 제 몸무게의 두 배는 나가는 병사들을 들쳐 업고 포탄 사이를 기어 다녔다. 전쟁 막바지에야 여성용 팬티가 지급되었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교육받았기에, 어머니 조국에 대한 사랑에 참전한 여성들. 그들은 군인이 되기 위해 제거한 여성성을,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입어야 했다. 갓난아이의 몸에 소금을 문지르고 마늘을 포대기에 넣어 발진을 일으켜 티푸스라며, 마을을 오간 빨치산 엄마도. 남성들의 구애에 응할 수 없는 노파의 시선을 가진 젊은 여인도. 당에서 내세우는 ‘조국의 영웅’이 되기 위해 진짜 이야기는 숨겨야 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간호병, 제빵병, 낙하산부대원, 전투비행사, 그리고 자동소총부대원으로. 또 의무병으로 세탁병으로 기계수리공으로도 있었다. 치열한 전선에서도, 전선이 이동하면 따라가는 제2전선에서도 임무를 수행했다. 여성이기에 더 끔찍했던 독일군의 고문들, 누이처럼 대우했던 병사들만 있던 것이 아니었던 부대들, 살기 위해 상관의 여자가 되어야 했던 일들… 영예롭지 못한 모든 이야기들은 침묵 속에 묻혔다.


스베틀라나가 되살려낸 다수의 목소리들은 전쟁 속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에 감사하고, 작은 강아지의 존재에 까르르 웃고, 총부리에 제비꽃을 매달고 바느질을 했던 여성들. 전쟁 또한 평범한 삶의 일부였기에 할 수 있는 한 깨끗이 씻고,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사랑을 했다. 죽음을 묘사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바로 여성이었다.


전후 그들을 맞이한 혹독한 고향에서도 어떻게든 이겨내고 살아남은 이들. 그들에게 남은 상흔은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전장의 논리와 사회의 논리는 달랐기 때문에… 아픈 기억을 되살려 진실을 소리 높이는 이들은 말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선전용 영웅’이 모두가 아니라고. 진짜 전쟁은 이러했노라고, 전쟁의 과정과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다른 시각에서 보라고 말이다.


전쟁에서 남성 못지않게 공을 세운 여성, ‘용맹한 병사’ 메달을 받고, 자랑스러운 훈장을 가슴에 매단 여성, 조국을 빛낸 그런 영웅만을 바라고 기대하던… 이면을 생각지 못한, 그토록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신을 반성하게끔 하는 위대한 작업의 결과물.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고,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들려준 노장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전하고 싶다.


-여기서 언급하는 여성성은 타고난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전, 주어졌던 일상에의 회복과 정체성 유지에 더 기울어져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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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에이바 2016-01-18 18:39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

AgalmA 2017-04-18 0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있는데 스베틀라나와 에이바님 글 목소리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용함 속에 호소어림... :)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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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원제를 보고 나서였다. ‘Chaque jour est un adieu.’ 가슴에 와 박히는,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이란 말인가. 김광석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와 같은… 아듀는 다시 만나지 못할 헤어짐을 뜻한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책을 펼쳐 읽고 있으려니 샤토브리앙의 문장이라 한다.


나의 모든 하루하루는 작별의 나날이었다. _84쪽


공습으로 고향이 파괴되어 노르망디에서 브르타뉴로 오게 된 레몽네. 부모 2인과 5대 5 성비의 10남매로 구성된 가족은 가톨릭에 우파였다. 전쟁 후 국가의 모범적 모델이라 할 만 했다. 우리 집에 대한 얘기로 글이 시작된다. ‘그 곳을 떠난 지 25년이 되었어도, 그 집은 여전히 우리 집이야!’ 하는, 그러나 아픔이 가득해 돌아갈 수 없는… 알랭 레몽은 자신의 유년기를 지배하는 장소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짧은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따스해진다. 미화된 기억이라 해도 좋다. 슬픔도, 아픔도 파스텔 톤의 부드러움이 감싼다. 겨울이면 따스한 돌을 데워 발아래 두었다가 돌이 식어 새벽이면 동상에 걸리고 했던 일들, 화장실은 어떻게 해결했고 하는 얘기들. 물은 우물에서 길어 와야 했지만 산길로 접어들면 그 곳은 상상으로 지어진 왕궁이었다. 놀이는 무궁무진했다. 닭과 토끼를 기르고 먹이는 장면들에선 가난의 모습이 슬쩍 비치지만 그마저도 즐거운 추억이다.


목수가 깎아주는 머리, 푸줏간 마당을 차지한 큰 솥에서 삶는 이불, 일요일 성당에 모이는 각양각색의 마을 사람들. 학교를 졸업하고 기숙학교로 간 형과 누나들이 돌아오는 날은 축제다. 따스한 햇볕과 시끌시끌하고 단단한 씨족으로 맺어진 유대 관계는 옛 카페 터였던 ‘우리 집’에서 이어진다. 그것을 비집고 들어오는 부모님의 높은 언성은 어린 알랭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간절한 기도들과 함께 마지막 장에 가까워 올수록 눈물이 아른거린다.


참았던 눈물이 흐른 건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에서 아버지께 용서를 비는 대목이었다. 그리움, 사랑, 죄책감…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성공 이후, 사람들은 아버지가 난폭했고 부인을 때렸다고 생각했다. 알랭은 이 오해에 화가 나고 또 아버지가 그립다. 이 마음은, 고모가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발견하면서 조금씩 풀린다. 자신이 머물렀던 알제에서 조금 떨어진 모로코에서 근무했던, 넷째 아들이 알지 못했던 20대 초반의 아버지.


유년 시절과 20대를 털어놓는 이 글들은 유기적이며, 서로를 보충한다. 견습사제로서 캐나다와 로마에서 공부하고, 알제를 다녀오고 파리에서 사회 운동을 벌인 과거는 지금의 알랭을 구성한다. 행동에 옮겨진 열정은 그저 부럽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했던가… 알랭 레몽은 이 글을 통해 과거와 조우하고, 화해한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고통을 마주한다. 그리고 ‘삶은 전진한다.’


역자 후기를 읽으니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책을 집어든 것은 ‘만만해 보여서’라고 했다. 그리고 원제를 어떻게 번역해야할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제목을 가만히 읊노라면 심장이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 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작별은 예견치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그리움과 후회는 늘 함께한다…


책을 덮고 다시 알랭의 트랑으로 돌아가본다. 소박하면서도 서정적인, 따뜻한 바람이 부는 마당 위로 춤추는 먼지들…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의 2악장, 피아노 트릴이 이끌고 오보에와 플루트가 만나는 이 선율이 지금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b플랫 단조 작품번호 38

https://youtu.be/9_nx3TIbf0k?t=26m4s


바르바라의 유년시절(Mon enfance)

https://youtu.be/VQ7MxTBUZ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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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1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제목만 보고 친구에게 선물했어요. 에이바님 글 읽다보니 과연 친구가 좋아할만한 내용이었을까? 싶긴 하지만^^
클래식 공부 열심히 하시더니 이젠 문학작품 읽고 클래식 선율이 머리에 떠오르는 경지에 이르셨군요. 음악을 들으며 그 마음 짐작해보려고 애써봅니다^^

에이바 2016-01-11 17:05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하루하루가~랑 분위기가 아주 달라요. 알제리에 대한 죄책감으로 대체 복무라고 해야하나? 거기서 우리로 치면 코이카 활동을 하거든요. 이후 68혁명 이후의 파리로 와서 종교에 귀의하려던 다짐을 뒤로 하고 정치 활동 및 저서 집필에 집중하는데요. 젊음의 에너지, 그런 것들이 활자 너머로 전해지더라고요. 그런게 부러웠어요. 뭔가 열정을 다할 수 있다는 것... 차피협은 요즘 듣는 중이라서요 ㅎㅎ 사실 읽을 땐 바르바라의 노래를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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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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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표백』의 부분 발췌글을 읽었을 때 였다. 뭔가 시각이 좀 다른 소설가구나 싶었다. 그 다음 이름을 들은 것은 『한국이 싫어서』였다. 이 때 신문기자였다는 이력을 알았고 이슈를 잘 다루는 작가이구나 생각했다. 그의 글을 읽은 건 Y서점 연재 덕이었다. 한국형 좀비물. 아마 출간 예정인 줄로 안다. 이 작품에 한해서는 좀 어정쩡하고 뒷심이 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여기엔 『한국이 싫어서』에 대한 다양한 리뷰를 읽은 기억도 한 몫 했다. 주인공의 결정에, 어떤 이는 반색하고 어떤 이는 반대했다. 물론 온건한 입장도 있었다. 읽지 않았기에 결정은 보류했지만 원래 편견이 완성되는 과정이라는 게 그렇다. 주어지는 정보 중에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장강명에 대한 나의 편견 또한 그러하다. 풀어내는 과정은 어떠할지 몰라도, 이슈 중에서 소재를 선택하는구나.


하지만 일단 펼치니 책장이 빠르게 넘어간다. 퇴폐성이 드러나는 밤문화는 거북했으나, 자체 정화를 위해 잠깐 알랭 레몽의 글을 읽고 오니 한결 나았다. 이 부분은 소설가가 나름대로 수위 조절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직·간접 경험과 문학적 상상력이 합치된 결과보다 실제는 더 할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의 신뢰성은 알 수 없지만, 몇 년 전 읽은 룸살롱 문화에 대한 르포기사는 여기 등장하는 것보다 수위가 더 했다.


소설의 구성은 인터넷 여론 선동을 주도한 이의 제보와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팀이 어떻게 조직·운영되며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지원을 받는가. 타겟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방법은 얼마나 치밀하게 혹은 허술하게 구상되며 이는 어떤 결과를 낳는가. 이 결과와 여론을 선동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위치·학력 설정과 비교하면 더욱 흥미롭다. 게임에서 스테이지를 넘기고 주어지는 보상을 받을 때 느껴지는 희열과 같은 감정이 전해지는 부분에선 혀를 차게 되고…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에 대한 장강명의 통찰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기자 출신이니 사회 현상을 큰 틀에서 보는 것이 익숙해서일까. 자료 조사과정에서 위키를 상당 참고했다고 하지만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 있는 반전보다 더 나은, 어떤 면에서는 통합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 문화의 형성과 전파 과정, 사용자들의 수용 과정, 팩트 체크조차 않고 기사를 내보내는 언론과 정보의 진실성. 20·30대는 이미 틀렸으니 미래세대인 10대를 타겟으로 해야 한다는 작전까지… 기시감이 없지 않지만…


보다 정확하게 줄거리를 쓰지 않는 이유는 사전에 제공된 정보 없이 읽는 것이 훨 나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등장하는 혹은 언급되는 어떤 인물상에 대입하더라도, 아니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린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문학에 요구되는 어떤 아름다움, 읽기에서 오는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묘사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러한 대중 조작의 가능성, 그에 대처해야 할 방법은 이 글을 읽는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2016년 2월 4일 별점 조정)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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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1-0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강명 소설이 한국이싫어서도 그랬고 이번 것도 약간 르뽀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술술 잘 읽히기는 하죠.

에이바 2016-01-07 17:30   좋아요 0 | URL
시류에 맞게끔 소재를 잘 다루네요. 공감대 형성은 좋은데 좀 더 성찰이 필요한 느낌이 있어요. 그래야 르포 느낌도 덜할텐데... 왜 리모노프 쓴 카레르도 언론인 출신이잖아요. 장강명 작가도 열심히 쓰다보면 그런 느낌이 나려나요? 근데 이런 작가도 필요한 것 같아요. 문학을 도구로 불편해하는 사실을 끄집어내는...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살리미 2016-01-0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작가로서 도전해볼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해요. 인터넷 세상도 더러운 권력 못지않게 참 무서운 세상이더만요 ㅎㅎ
자체정화의 방법이 있었는데... 융통성 없는 저는 계속 불편했어요 ㅋㅋ

에이바 2016-01-07 17:38   좋아요 0 | URL
요즘 커뮤니티 게시글에서 보이는 문제점들... 뾰족한 말투, 짧고 쾌감을 주는 자극적인 글 등 연계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오로라님께도 자체 정화를 알려드려야 했는데... ㅋㅋㅋ

한수철 2016-01-0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장차, 장강명도 자신이 본격 르뽀로 승부수를 걸어야 한다는 걸 알 것 같은데요?ㅎㅎ

사실 한국 순문학(신경숙 등)을 향한 반감의 역작용에 따른 반사이익을 본 면도 없지 않은 것 같아요.
그게 아니어도, 장강명은 장르소설로 나아가거나 말씀드린 대로 본격르뽀소설을 쓰거나 할 것 같아요.
이쪽- 이쪽?-으로 발을 담그는 순간 평범해지리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요.^^

에이바 2016-01-08 11:29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스타일이 최선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작품만 봤지만요. 아무래도 시각 자체가 좀 냉정하달까, 분석은 좋은데 깊이는 보이지 않고 반대로 낭만이나 유미주의 취향은 아닌 것 같고... 그래도 호모 도미난스인가 리뷰에서 SF쪽은 괜찮을 것 같다고 모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근데 좀비물 그건 별로였어요...
 
[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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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사라진 것에 대한 꿈을 꾸었다. _27쪽


한나 렌스트룀, 한나 룬드마르크, 한나 바즈, 아나 블랑카, 아나 네그라. 모두 한 여인의 이름이다.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한나 렌스트룀은 스웨덴 산간 마을 출신의 소녀다. 열여덟번째 생일을 앞두고 어머니는 독립을 요구한다. 도시의 친척을 찾지 못해 포르스만의 집에 머물렀다 그의 주선으로 호주로 가는 배에 오른다. 선상 요리사 자격으로. 그 곳에서 세 살 연상의 항해사를 만나 식을 올리지만 두 달 후, 열병으로 남편을 잃는다.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야음 속에 하선한 한나. 한 호텔에 투숙하며 하혈한 그녀는 현지 여성에게 보살핌을 받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곳은 매음굴이었다.


바즈라는 포르투갈인이 운영하는 호텔은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로우렌소 마르케스에 위치한다. 호텔 주인은 백인 간호사를 데려오고, 한나는 그녀에게서 포르투갈어를 배운다. 그리고 이 도시를 양분하는 삶 속에 이질성을 감지한다. 스웨덴 국기를 단 배를 찾던 일을 그만둔 것은 바즈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가 선물한 석조 가옥으로 이사한 후부터였다. 부족할 것 없으나 무료한 생활이 시작된다. 바즈는 흑인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약이라고 주는 것이 독일 수도 있다고, 그는 예견한대로의 죽음을 맞는다.


고향의 끝없는 겨울에서 벗어난 지 2년도 되지 않아, 한나는 열아홉에 두 남편을 떠나보냈다. 이제 그녀는 스웨덴에서도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유산을 상속받았다. 한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어젯밤, 사라진 것에 대한 꿈을 꾸었다.”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모국어로. 이곳에서 그녀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침묵이다. 백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지인들, 그들의 긴 침묵 그리고 융화될 수 없는 상하관계. 불안을 동반한 외로움은 여전했다.


한나를 붙든 것은 사건이었다. 흑인 남자를 죽이고 처벌받지 않은 백인들에 분노한 폭동, 거리에는 두려움의 냄새가 퍼져 있었다. 이제 한나는 호텔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여인들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 그리고 우연히 성공한 포르투갈인 피멘타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가 현지처 이사벨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피멘타가 그녀를 속이고 배신했지만 중요한 것은 흑인이 백인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사벨은 재판 없이 사형당할 것이었다.


한나 바즈, 아니 아나 블랑카는 자신을 에워싼 허위의 세계를 깨닫는다. 흑과 백의 거짓말로 이룩한 세계, 현지인들의 맑은 눈빛을 앗아가고 멸시를 준 백인 사회의 위선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사벨의 오빠 모세스는 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얘기한다. 백인들이 이곳에 와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유를 알 수 없노라고. 금과 다이아몬드는 언젠가 바닥날 것이라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채우는 곳에서 아나는 다짐한다.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이사벨에게 자유를 주겠노라고.


왜 그녀는 다른 백인들과 달랐을까? 왜 주류 사회에 순응하지 않았을까? 포르스만의 집에 머물 때 자신 역시 가난한 노동자였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피부색으로 부여받은 우월성을 행사한 날엔 괴로워했다. 그녀는 허위의 세계에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호텔을 떠나 베이라에 도착한 한나는 이곳의 흑인들에게서 다른 것을 발견한다. 가난 속에서도 삶을 희구하는 모습을. 자신이 느꼈던 풍요, 백인 사회의 외로움과 무료함과는 다른 생동감을. ‘지금까지의 시각은 왜곡된 것이었다.’


그녀는 과연 찾으려던 것을 찾을 수 있을까. 글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 한 번의 연주를 위해, 6년 동안  낡은 피아노를 조율한 조제처럼 이 모든 일을 목격해야 할 사람이 그녀여야만 했던 것이다. 아나 블랑카이자 아나 네그라. 명명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진실을 적시할 용기를 가지고 가능성을 희망해야 한다. 1905년, 한나가 머물던 호텔 정원에 나타났다 사라진 놀라운 기쁨처럼.



-로우렌소 마르케스: 오늘날 모잠비크의 수도 마푸토

-모잠비크는 1975년, 포르투갈에서 독립하였다.

-조제는 쇼팽의 곡을 연주했지만 작품명이 나오지 않는다. 목가적인 풍경 속 불안함을 암시하는 줄곧 야상곡 작품번호 48, 1번이 떠올랐다. 그 대목부터 시작하는 유투브 영상(클릭).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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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1-0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막 끝냈는데, 앵무새죽이기도 생각나더라구요. 표지가 좀 섬뜩하고 맘에 안들어서, 내용까지 우울하게 읽었다는.

에이바 2016-01-07 17:27   좋아요 0 | URL
뭔가 냉정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위기도 있었어요. 카트린 드뇌브 주연 인도차이나 느낌도 살짝 나고 한나가 성장하는 과정 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익숙한 곳을 떠나는 행위가 타인의 결정(어머니, 포르스만)에서 자신의 결정으로 바뀌는 것도 그렇고요. 근데 한나가 배움이 일천한데 일기 내용은 상당히 지적인 구석이 있어 의아한 점도 있었고요. 쇼팽이 등장해서 더 반갑고 좋았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