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사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원제를 보고 나서였다. ‘Chaque jour est un adieu.’ 가슴에 와 박히는,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이란 말인가. 김광석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와 같은… 아듀는 다시 만나지 못할 헤어짐을 뜻한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책을 펼쳐 읽고 있으려니 샤토브리앙의 문장이라 한다.
나의 모든 하루하루는 작별의 나날이었다. _84쪽
공습으로 고향이 파괴되어 노르망디에서 브르타뉴로 오게 된 레몽네. 부모 2인과 5대 5 성비의 10남매로 구성된 가족은 가톨릭에 우파였다. 전쟁 후 국가의 모범적 모델이라 할 만 했다. 우리 집에 대한 얘기로 글이 시작된다. ‘그 곳을 떠난 지 25년이 되었어도, 그 집은 여전히 우리 집이야!’ 하는, 그러나 아픔이 가득해 돌아갈 수 없는… 알랭 레몽은 자신의 유년기를 지배하는 장소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짧은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따스해진다. 미화된 기억이라 해도 좋다. 슬픔도, 아픔도 파스텔 톤의 부드러움이 감싼다. 겨울이면 따스한 돌을 데워 발아래 두었다가 돌이 식어 새벽이면 동상에 걸리고 했던 일들, 화장실은 어떻게 해결했고 하는 얘기들. 물은 우물에서 길어 와야 했지만 산길로 접어들면 그 곳은 상상으로 지어진 왕궁이었다. 놀이는 무궁무진했다. 닭과 토끼를 기르고 먹이는 장면들에선 가난의 모습이 슬쩍 비치지만 그마저도 즐거운 추억이다.
목수가 깎아주는 머리, 푸줏간 마당을 차지한 큰 솥에서 삶는 이불, 일요일 성당에 모이는 각양각색의 마을 사람들. 학교를 졸업하고 기숙학교로 간 형과 누나들이 돌아오는 날은 축제다. 따스한 햇볕과 시끌시끌하고 단단한 씨족으로 맺어진 유대 관계는 옛 카페 터였던 ‘우리 집’에서 이어진다. 그것을 비집고 들어오는 부모님의 높은 언성은 어린 알랭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간절한 기도들과 함께 마지막 장에 가까워 올수록 눈물이 아른거린다.
참았던 눈물이 흐른 건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에서 아버지께 용서를 비는 대목이었다. 그리움, 사랑, 죄책감…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성공 이후, 사람들은 아버지가 난폭했고 부인을 때렸다고 생각했다. 알랭은 이 오해에 화가 나고 또 아버지가 그립다. 이 마음은, 고모가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발견하면서 조금씩 풀린다. 자신이 머물렀던 알제에서 조금 떨어진 모로코에서 근무했던, 넷째 아들이 알지 못했던 20대 초반의 아버지.
유년 시절과 20대를 털어놓는 이 글들은 유기적이며, 서로를 보충한다. 견습사제로서 캐나다와 로마에서 공부하고, 알제를 다녀오고 파리에서 사회 운동을 벌인 과거는 지금의 알랭을 구성한다. 행동에 옮겨진 열정은 그저 부럽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했던가… 알랭 레몽은 이 글을 통해 과거와 조우하고, 화해한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고통을 마주한다. 그리고 ‘삶은 전진한다.’
역자 후기를 읽으니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책을 집어든 것은 ‘만만해 보여서’라고 했다. 그리고 원제를 어떻게 번역해야할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제목을 가만히 읊노라면 심장이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 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작별은 예견치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그리움과 후회는 늘 함께한다…
책을 덮고 다시 알랭의 트랑으로 돌아가본다. 소박하면서도 서정적인, 따뜻한 바람이 부는 마당 위로 춤추는 먼지들…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의 2악장, 피아노 트릴이 이끌고 오보에와 플루트가 만나는 이 선율이 지금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b플랫 단조 작품번호 38
https://youtu.be/9_nx3TIbf0k?t=26m4s
바르바라의 유년시절(Mon enfance)
https://youtu.be/VQ7MxTBUZ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