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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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_14쪽


벨라루스의 언론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만난 대조국전쟁 참전 ‘여성’ 용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라는 말에 대체로 고개를 저었고, 그들이 입을 여는 것은 ‘여성 전우들의 모임’에서 잠깐 눈물을 보인 후였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위대한 용사들이 두려워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에 남자들은 ‘여자들이 꾸며낸 얘기’라고 했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에서 연애질이나 했던 여자들’이라며 손가락질 했다. 참전용사의 귀환에, 어머니는 집을 나가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네가 남자들이랑 있던 것을 아는데 동생들은 시집가야하지 않느냐고. 누이라 부르며 전우애를 키웠던 동료마저도 등을 돌렸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세운 공을 여자와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참전했던 ‘여성’은 두 개의 인생을 산다. 남자의 인생과 여자의 인생. 소녀 저격병들의 활약으로, 독일 측에서 퍼뜨린 ‘소련여자는 간성인(인터섹슈얼)’이라는 선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남자들이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고 주어지는 보상을 누릴 때, 여자들은 조용히 앞치마를 메고 부엌에 서야 했다. 참전 사실을 숨겨야 했다. 아무도 그들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순결했음을 아는 전우들마저도.


소녀 병사들은 순결하고 무지하다. 전쟁에서 시작한 월경에, 자신이 부상당했다고 생각할 정도다. 나이를 속이거나 무작정 부대에 숨어든 여성들은 얇은 사라사천으로 대충 옷을 지어 입었다. 혹한 속 돌무더기를 지나다 찢어진 옷, 드러난 피부는 화상과 동상에 온통 상처였지만 제 몸무게의 두 배는 나가는 병사들을 들쳐 업고 포탄 사이를 기어 다녔다. 전쟁 막바지에야 여성용 팬티가 지급되었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교육받았기에, 어머니 조국에 대한 사랑에 참전한 여성들. 그들은 군인이 되기 위해 제거한 여성성을,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입어야 했다. 갓난아이의 몸에 소금을 문지르고 마늘을 포대기에 넣어 발진을 일으켜 티푸스라며, 마을을 오간 빨치산 엄마도. 남성들의 구애에 응할 수 없는 노파의 시선을 가진 젊은 여인도. 당에서 내세우는 ‘조국의 영웅’이 되기 위해 진짜 이야기는 숨겨야 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간호병, 제빵병, 낙하산부대원, 전투비행사, 그리고 자동소총부대원으로. 또 의무병으로 세탁병으로 기계수리공으로도 있었다. 치열한 전선에서도, 전선이 이동하면 따라가는 제2전선에서도 임무를 수행했다. 여성이기에 더 끔찍했던 독일군의 고문들, 누이처럼 대우했던 병사들만 있던 것이 아니었던 부대들, 살기 위해 상관의 여자가 되어야 했던 일들… 영예롭지 못한 모든 이야기들은 침묵 속에 묻혔다.


스베틀라나가 되살려낸 다수의 목소리들은 전쟁 속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에 감사하고, 작은 강아지의 존재에 까르르 웃고, 총부리에 제비꽃을 매달고 바느질을 했던 여성들. 전쟁 또한 평범한 삶의 일부였기에 할 수 있는 한 깨끗이 씻고,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사랑을 했다. 죽음을 묘사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바로 여성이었다.


전후 그들을 맞이한 혹독한 고향에서도 어떻게든 이겨내고 살아남은 이들. 그들에게 남은 상흔은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전장의 논리와 사회의 논리는 달랐기 때문에… 아픈 기억을 되살려 진실을 소리 높이는 이들은 말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선전용 영웅’이 모두가 아니라고. 진짜 전쟁은 이러했노라고, 전쟁의 과정과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다른 시각에서 보라고 말이다.


전쟁에서 남성 못지않게 공을 세운 여성, ‘용맹한 병사’ 메달을 받고, 자랑스러운 훈장을 가슴에 매단 여성, 조국을 빛낸 그런 영웅만을 바라고 기대하던… 이면을 생각지 못한, 그토록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신을 반성하게끔 하는 위대한 작업의 결과물.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고,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들려준 노장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전하고 싶다.


-여기서 언급하는 여성성은 타고난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전, 주어졌던 일상에의 회복과 정체성 유지에 더 기울어져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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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에이바 2016-01-18 18:39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

AgalmA 2017-04-18 0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있는데 스베틀라나와 에이바님 글 목소리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용함 속에 호소어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