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내용으로 감독과 배우 제작자를 블랙리스트로 올린 이유>
먼저 기생충 영화가 아카데미 오스카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에게 축하드린다. 대구 출신이라면서 봉준호 생가가 어쩌고저쩌고 하기도 하고 영화 기념관을 만들자는 둥 보자니 웃기는 소리가 나온다. 그것도 지난 정권에서 영화 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배척하며 제외하는 모종의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한 정권과 그 숭구리당당에서 나오는 썰이다. 그야말로 숟가락 얹기가 이렇게 사람들이 후안무치한 것에 대해 가상하다 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곧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곳에서야 그 당에 공천만 받으면 따놓은 당상이니 본선보다 예선이 더 치열할 것이 뻔하고 뭐라도 이슈 하나 더 챙기기 바쁘다.
아무래도 그렇지. 자기들이 봉준호 감독, 송강호 배우에게 블랙리스트를 올려놓고 친 정권적이지 않다고 배제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외서 오스카상을 4개나 받았다고 배재 시킬 때는 지난 것이니 지금은 다르다는 발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렇지. 늘 이런 식이거든. 그때마다 시기마다 손해난다 싶으면 배척하며, 이익이다 싶으면 언제든 손을 잡겠다는, 어떻게 보면 세상 참 편하게 사는 가치일지는 모르겠으나, 아닌 건 아니고 기는 긴 것이다. 뭔 주관이 이렇게도 없냐. 이랬다저랬다 나 꼴리는 대로 사는 게 웃기지도 않아 화가 난다. 인간들이 말이야. 이랬다 저랬다 하는데 어떤 일관성이 있어야지. 곤조면 곤조로 살든가, 이랬다 저랬다. 이게 뭐냐.
평상시에도 저분들이 언제 문화 예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나. 전혀 없던 관심이 오스카상 받았다고 쏟아 오르는 열의에 대해 기막혀서 어안이 벙벙벙하다. 이곳처럼 문화 예술계가 거의 황무지처럼 척박한데 미국의 로컬 상 받았다고 난리라니, 그렇다면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은 글로벌한 세계적인 상일 때는 왜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던 건가 말이다. 하여간 뭔가 이익이 된다 싶으면 숟가락 걸치는 기회주의적인 행태는 조금도 새롭지가 않다. 아 너무 진부하다.
영화의 맥락이 뭔가. 자본주의적인 비판적인 메시지가 있는데, 자본과 정치권력에 붙어서 지역의 유지로 지역의 이익을 챙기면서 살았던 사람들, 방해가 된다 싶으면 배척하고 소외시키며 살았던 사람들이 손을 내밀고 악수를 창하는 모습에서 모종의 역겨움이 느껴진다. 생색일랑 그만하시라. 지난 정권 때 그 사람들이 블랙리스트라며 명단 올리고 문화 예술계 인사를 탄압하다가 이제 정권이 바뀌고 나니 다시 문화 예술 분야의 창달을 위해 손을 내밀고 영화산업에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란 것에 대하여 그 어떤 진정성 1도 없는 거짓말이란 걸 모르면 그렇게 또 당한다. 사람이란 말보다는 행동이다. 그들이 했던 행동에서 삶이 보이는 이유이다. 선거철이니 면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것 쯤은 안다. 다면 그 면면이 뻔뻔스러움일 때, 뻔뻔해서 수치스러움을 모를 때, 혐오와 구토를 유발한다. 어제는 이랬다가 오늘은 저랬다가 이익 앞에서 그 면의 바꿈에 대해 그럴 수 있음에 대한 무치스러움. 보편적인 감성으로 일관성의 유지와 가치관의 일관성을 철학적으로 주장하지만 이게 얼마나 일부 사람들에겐 공염불이고 공치사인지, 감히 쪽팔려서 나서지도 못할 텐데 그들은 그렇게 뻔뻔스러움으로 숟가락을 걸쳐 올려댄다.
사람이 살다가 실수할 수도 있고, 일을 거르쳐 잘못할 수도 있다. 사는 게 어떻게 모든 일에 완벽만 할 수는 없는, 그래서 인간적인 한계가 반드시 있다. 간혹 지나고 보면 쪽팔리는 일도 부끄러운 일도 없을 수가 없다. 사는 게 무수한 실수와 오류의 반복으로 점철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게 인생이란 거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오류가 너무나 뻔히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제의 행위가 오늘의 행위에 모순이 된다면 결국 자기 자신의 과오는 여실하다. 지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를 올려 살생부인 것처럼 옥죄는 (심리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억압적 행태를 자행해 놓고 그기에 동조하여 일언반구도 없었으면서, 이제 자신의 선거에 도움이 될 성싶으니 지난 일은 까먹고 오히려 없었던 것처럼 하며 두 손들어 환영을 하고 가두에 현수막을 걸며 축하한다는 짓이 진짜 짜증과 혐오의 복합적 작용이 치밀어 오른다는 거다. 사람이 말이야. 왜 이렇게 뻔뻔하냐? 응.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최대 처신의 무기가 뻔뻔함을 무시한다는 거다. 배울 만큼 배우고 생각할 만큼 생각한다. 일일이 디테일하게 따지면 생각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왜? 삶의 방식이 뻔뻔한 것일까라는 심리 상태에서 의문스러운 것은 없다. 전염병이 돌아 마스크를 매점매석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익 앞에서는 자신의 가치관쯤이야 아랑곤 하지 않는 조변석개의 삶의 방식이다.
왜? 그렇게 분위기 타는 게 얼굴 바꿈의 면면이 유리하니까. 일단은 분위기에 걸쳐 놓고 숟가락에 표가 쌓이고 당선에 유리하니까 그러는 거다. 그럼 다시 분위기가 반전될 때는? 그야 당연히 난 그런데 관심이 없고 멀어진다. 그런 약속 따위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부정한다. 부인하기에서 첫 번째가 지기 부정할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치고 빠지는 게 우리 인생사에서 경쟁에서 더 많이 더 빨리 채우는 삶의 방식이 곧 살아가는 행태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당사자는 자신의 문제였을 테니 너무나도 정확히 판단할 것이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속내는 얼마나 씁쓸하게 여길 것이며 배척했던 사람들이 다시 손을 내밀 때의 그 머쓱함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참 오글거리는 뻔뻔함에 대해 인간적인 환멸 같은 느낌이 없을 수가 없다. 지난 때는 척결의 대상이었다가 오늘은 손 맞잡고 지원의 대상이 되는 상반된 현상에 대해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라야 할 것인지. 선거에 나가 당선해야겠다는 목적이 과연 국민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은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던 이유가 아닐까 한다. 혹여 그런 것을 보고서도 지역민의 줏대 없는 지지에 웃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다시 국회에 보내 달라고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올 것이고 그들은 허리 디스크가 걸릴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제발 이번만은 국회에서 다시 봉사할 수 있도록 아부를 떨 것이다. 인간 중에 제일 저질이 뭐겠는가. 화장실 갈 때와 화장실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데 있다. 급할 땐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하다가 원하는 대로 되고 한 후는 안면 몰수하며 외면해버리는 인간형이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처신의 약삭빠름이라고도 하고 유연한 대처하는 거라고 추켜 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지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나.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부동산 시세 차액으로 막대한 부를 쌓고자 불철주야 파사삭 요령을 피우며 빈틈을 노리는 사고방식이라는 거다. 그래서 선비가 없다. 지조 따위는 멀리 내던져 버리면서도 졸부적 가치가 최고가 아니냐라고 과시할 것이다.
얼마나 일회성으로 던진 거짓말인지에 대해 따져 봐도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다. 영화 박물관, 생가 터 복원, 영화 진흥산업 지원 등등 대부분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 사업들이다. 돈은 뭐 하늘에서 떨어지냐. 그거 다 세금 아닌가 말이다. 그럼 세금 내는 시민들의 의사를 한 번이라도 물어 본적도 없이 단순히 상품성 높아졌다고 앞뒤 검토 없이 마구 질러 버리는 식이라면 뭐 답은 나온다. 분위기 뜰 때 타는 거고 물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는 거라. 걸핏하면 죄파 빨갱이 영화감독이라는 오명을 쒸우고서, 사회불안 조장성 영화라며 블랙리스트에 올렸던 그 면면들의 모순된 두꺼움이 이내 곧 역겨움으로 돌변하는 이유이다.
일전에 봉준호 감독이 말하길, 자신이 정권으로부터 블랙리스트에 올려진 것이 트라우마라고도 했다. 그래 내가 뭘 잘못했지?라며 스스로 백 번도 더 물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란 사회적인 현상과 모순과 비리를 은유하는 영상 예술이기도 하다. 그기엔 감독이 주장하는 메시지를 담고 하고 싶은 말들을 영화로 표현한다. 이 표현에 대한 제갈을 물리겠다는 발상은 여전히 개발 독재가 판을 치던 60년대 70년대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이다. 아 정권이 바뀌면 역사는 퇴보한다는 걸 스스로 느꼈을 것이다.
사실 어느 정권이 권력을 잡아도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지만, 실수도 있고 오류도 분명 따라다닌다. 어느 사회이든 권력은 지상천국을 목표로 하지만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천국을 이룬 적도 없다. 그러나, 예술에 대해 억압적이거나 정권의 입맛에 따라오도록 제어하려 할 때 반드시 퇴보하는 경험은 부지기수로 겪었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어느 사회이든지 간에 어떤 말이라도 억압당하지 않고 비록 완전한 표현이 아닐지라도 인류가 가진 보편타당한 오랜 경험이 축적된 가치에 의거한 표현에 대해 배척과 수용의 기준을 권력의 도구쯤으로 여겼을 때 문화는 죽는다.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이 돈보다는 의미와 가치에 더 목숨을 거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하고 자본의 더 약탈적이고 고도화되어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소리가 권력과 자본의 입맛에 재단될 때 인류가 가진 가장 고귀한 가치가 빛을 잃고 천국은 이루지 못해도 지옥은 금방 성립되는 현상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 그들이 주장하는 무슨 지원 운운할 것이 아니라, 그들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져서 배척 당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성찰하고 반성의 전화라도 한통 넣어 주는 게 먼저 해야 할 인간적인 도리가 아닐까. 그 땐 미안했다. 얼마나 심적 고충과 고민이 많았을지에 대해 사과드린다는 진정성을 보여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뭐가 쪽팔린 줄도 모르고 다시 표를 구걸하는 게 아니다. 뭐 지역 정서상, 또 저런 무치한 자가 당선될 것이 아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