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서재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이란 빌미가 글쓰기의 동기였으나, 책을 읽고 치미는 감정을 토로하는 글도 간간이 쓰게 되기도 하고, 혹은 이외에도 책에 관해서거나 이에 대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적은 글도 있다. 어쨌거나 무슨 글이 되었든 간에, 이를 통틀어 글쓰기라고 하자. 글을 쓰다 보면 느끼는 감정들이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글의 문장을 지어 낼 때, 나 스스로가 글을 잘 못쓰는 구나하고 새삼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문장 구성이 이상할 때도 많고 중구난방으로 산만하기도 하고 간간이 글의 논점인 주제를 잃고서 엉뚱하게 삼천포로 빠지기도 한다. 또는 비슷한 주장을 계속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했던 이야기 또 하면 글은 상당히 재미가 없게 된다. 더구나 누구라도 지적할 수 있는 오자와 탈자, 심지어 맞춤법과 띄어쓰기조차 틀리는 것도 너무 많다. 아마 이 글조차 틀린 문장이나 잘못된 문장과 다른 맞춤법이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게 나의 국어 실력이요, 문장 실력이라 느끼는 부분이다. 항상 포스팅하기 전에 맞춤법 검사로 확인해도, 맞춤법 검사한 글이 제대로인지 검증하기도 벅차다. 문장 검사는 나중에 AI 문장 검사기를 기다리기로 하자. 뭐, 너무 잘 쓸 수 있는, 그런 재능 있는 것도 아니고, 이를 일찍 감치 발견했더라면 작가했을 거 같지도 않다. 글쓰기에 제대로 못 되는 실력이라는 걸 스스로가 알아차리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글을 쓰게 됨으로써 나의 부족을 알아차리게 된다. 읽기는 먹는 것이고 글을 쓰는 것은 토해서 게워 내는 거다. 어쩌면 글이란 우웩 우웩 흥건하게 게워 내야만 속이 편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슴에 담아두면 병나거든. 비록 못나게 쓸지라도 글은 쓰야 한다. 써지기도 하고...
두 번째가, 글을 쓰다 보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지식의 결핍이다. 무엇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신처럼 전부 다 알아서 줄줄 나오는 것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개념을 잡고 글을 써야 하는데 자주 모르는 것들에서 막히는 경우가 있을 때다. 글을 쓰게 됨으로써 나의 무식함이 가장 잘 들어 나는 부분이다. 글은 무식해야 쓰게 되는, 그러니 계속 책을 찾게 되는 동기가 되고, 또한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글을 쓰면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느끼는 것. 글쎄 글을 안 쓰면 많은 걸 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글쓰기는 내 결핍의 확인 용이라는 점. 글을 쓸려면 계속 지식을 배우는 공부가 필요한 이유이다. 물론 많이 배운 학자나 지식가들의 글이 전유물처럼 대체적으로 글은 많이 배워야만 나오는 게 맞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몰라도 알아가면서 쓰야 하겠지.
세 번째가 사유가 부족하다는 것도 느낀다. 아는 것이 부족하니 동원할 단어의 부족과 생각의 부족으로 나온다. 치밀하지 못하고 엉성함의 글쓰기는 사유 부족의 증명과도 같다. 고전적인 명언인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가 되려면 일단 뭐라도 쓰려 들면 사유가 얼마나 치밀하고 깊은건지 그 정도가 나온다. 얄팍한 것임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글쓸 때 나온다. 흡사 빨랫감에서 수분이 툭툭 떨어질 정도로 맺혀야 물이 떨어지는데 비틀어낸 수건은 뒤틀리는 어색함이 나온다.
그래서 글을 자주 써봐야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무식함을 들어내고, 스스로 부족한 단어를 들어 냄으로써 이 반작용으로 더 추구되는 책과 글쓰기로 이어지는 동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작가도 아닌데 왠 글쓰기라고 말할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얼마나 무식하고 부족하고 덜 익어 설었는지 글을 자주 써보면 안다. 그것도 장문의 글 A4나 원고지 몇십 장 되는 글을 써보면 글 문이 막히는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란 것을 느낌다. 단어 몇 개로 어디 인터넷 댓글하고는 차이가 많다. 마음 같아서는 청산유수처럼 글이 줄줄줄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삶이겠지만 보잘것없다는 걸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글을 쓰는 자와 쓰지 않는 자로 나눌 수 있다. 글쓰기가 주제이니까 글을 쓰지 않는 자에 대해 논외로 하고, 글쓰는 자에 대한 생각도 있다. 글을 잘 쓰는 자와, 나처럼 글을 자유자재로 못 쓰고 부족함으로 글을 쓰는 경우로 나눈다. 물론 난 후자다. 여기서 문제는 글을 못 쓴다고 해서 글을 안쓰게 될 때의 문제이다. 앞으로 돌아가서, 글을 쓰는 자와 안 쓰는 자의 구분에서 글을 안 쓰는 자의 가장 큰 이유와 변명이 글을 못쓰니까 안쓴다라고 하는 거다. 문맹이 없는 사회라고는 하나, 읽기에 못지않게,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역시 문맹이나 마찬가지로 같다. 글 한줄 쓰지 않는다는 것의 문맹은 읽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글을 안쓰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사유 부족을 못 느낀다. 무식해도 글을 안 쓰니, 내가 얼마나 아는게 빈약한지를 모른다. 그래서 글 쓰지 않는 사람들 중에 많은 자들이 세상에서 자신이 평균 이상의 지능으로 내 지식이 좀 많다고 느낌적 느낌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내가 해본 것들을 문장으로 서술하기 위한 것에서 아무것이나 쓰지 못할 때, 결국 생각의 정리와 일관성이 부족한다. 생각이 다듬어지지 못하며 산만하여 두서없는 굴곡진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요란을 떨고 있을 뿐이다. 불쑥 불쑥 스치는 생각이 정리가 안된다면 이는 글쓰기 부족으로 연결된다. 이는 글을 써보면 안다. 지식을 정리하고 생각이 얼마나 정리가 되어야 글이란 문장으로 나열하여 논지의 맥락이 일관되게 나올 수 있는지를 말이다.
내가 대학 입시 때 처음으로 도입된 논술시험이 있었다. 학력고사의 점수와 지원한 학과에서 다시 논술시험을 쳐서 학력고사와 논술시험의 합산한 성적으로 합격 여부를 가렸다. 그러다 입시제도가 바뀌면서 논술시험이 사라져 버렸다. 그 당시 소위 이름있는 유명한 대학을 지원 실력도 없어서 논술시험에 대비해서 해봤자 고작 신문의 사설을 자주 읽으라는 논술시험을 대비용이었을 뿐이었다. 글을 쓰라는 것은 없었다. 논설을 쓰는 기자들이야 글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글이 논지에 부합하게 써 내려가겠지만, 사실 논술 시험에 무슨 문제가 나와서 어떻게 문제지의 여백을 글로 매울 수 있을 것인지 재대로 교육 받은 것도 없었다. 그나마 수험서를 제외한 여러 가지 책이라도 읽은 학생들이야 이런저런 조합으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책도 변변히 없었기도 했지만, 읽기만 했지 쓰지는 못했고 막상 쓰려 하면 어떻게 첫 스타트의 단어를 적으면서 이어가야 할지 참 난감했을 것이다. 이런 논술시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어 버렸다. 요즘의 대학 입시에 별도로 논술 시험만으로 전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아쉬운 것은 정원의 몇 퍼센트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대학에서 수학 능력을 평가하려면 지식도 중요한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글쓰기 즉, 논술이 아닐까 한다. 논술이 왜 필수가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리포트를 하나 쓰더라도 글쓰기 작문이고 전공 시험을 보더라도 대부분 논술로 답을 적는데, 어떻게 입학시험에서 논술시험 전형으로만 국한 시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쓸려면 일단은 뭐든 많이 읽어야 한다. 읽지 않고 글이 쉽게 나오는 경우도 있긴 하나, 이는 글쓰기에 특출난 사람일 테고 대부분은 뭐든 읽고 정보를 얻어서 사유가 결합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두서 없이 섞여 있는 견해를 논지에 적합하게 풀어 체계화시켜 나가는 작업이 글쓰기일 것이다. 에세이나 소설, 시와 산문형식의 글도 형식에 걸맞은 글쓰기는 결국 기본적인 토대가 쓰기란 생각의 정리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일종의 마음의 배설이다. 들어간 인풋에 아웃풋이 없을 때 사람은 정신적으로 탈출구가 없다. 쌓인 것이 울분이라면 쏟아야 하듯이, 쌓인 감정이 축적될수록 눈물의 량과 농도가 짙어지며 이것을 글로 풀어 낼 때, 시원함을 느끼는 것처럼 화장실 안 가는 사람이 없듯, 글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한다. 어떤 노인네가 자신의 굴곡진 삶은 소설 3권도 부족하다고 토로한다. 그만큼 쌓인 것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처럼 일기라도 3권을 풀어써보면 이게 자서전이 된다. 어느 인생이든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잘 없다. 늙어간다는 것은 쌓인 게 많아 무거워진다는 거다. 결국 쏟아내듯 토로하듯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의 삶이 정리가 되고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또한 누군가 그 글을 읽게 됨으로써 자신의 삶의 과정을 알게 되어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는 바탕이 곧 글이 될 것이다. 죽기 전에 다 쏟아 놓고 게워 내고 나면 떠날 때도 홀가분할지도 모르겠다. 가지런히 정돈시키고 물려줄 건 물려주고 버릴 것은 버리고 살아온 삶의 사랑은 가져갈 것도 생기는 이유도 바로 글쓰기가 아닐까 한다.
인류의 역사는 서술의 역사일 것이다. 역사가 쓰이지 못했더라면 역사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시간일 뿐이다. 그런데 이 살아온 인류들의 역사가 기록되었기에 오늘날의 현재도 있는 까닭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비단 역사의 서술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글 또한 역사의 일부이다. 그런 일부와 일부가 모이고 모여서 거대한 전체의 역사를 이루는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 글을 못쓴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간혹 글 쓰라면 초등학생 생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 젖는다. 그러나 아무리 글쓰기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도, 특히 밥벌이나 돈벌이를 위해 글을 이용하는 것은 위험성이라는 리스크를 안아야 한다. 그동안 밥벌이를 위한 글이 얼마나 목적에 순수한 글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익에 따른 글쓰기의 관건은 글쓰기의 목적에 대한 순수성이 글의 성격을 규정한다. 따라서 순수한 목적이 아닌 다른 어떤 목표에 의한 글쓰기는 언제든 자신이 쓴 글이 자기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이는 글을 아예 안 쓰는 것만도 못할 수도 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