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죠. 사진은 전부가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디카시 장르에서 주장하는 날시, 즉흥시 같은 사진은 아닙니다. 무작정으로 담는 표현의 즉흥일 수가 없겠지요. 가급적 무의도적으로도 무심코 카메라 뷰 파인더를 접안 시키고 셔터를 누르지 않습니다. 물론 비의도적으로 찍는 경우는 카메라 테스트할 때나 해당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건 비의도적이므로 나는 사진이라 보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고 싶지 이미지를 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한 달 전에 모 문학제에 신인문학상에 디카시를 응모해봤어요. 사진 이웃분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무슨 변명 같아서 조금은 머쓱하지만 사진을 오래 담아 왔던 나로서는 문학 상이라는 메리트가 별로 없기도 하고 하다못해 어떤 주제의 사진 공모전조차 한 번도 출품해본 적도 없는데 문학 상이라니 사진을 찍어 왔던 의도적 성격과는 사뭇 맞지는 않는 그런 행사였기도 했습니다. 시인되고 싶어서 사진을 찍어 온 게 아니라서 말이죠. 시인이 되고 싶었더라면 사진을 찍지 않고 시를 지었어야 맞겠죠.
때로는 사진에 글을 억지스럽게 붙인 적도 있었거든요. 사진으로 사진 글이 비약하는 경우도 있었기도 합니다. 즉 억지 글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진은 사진만으로 메시지가 전달되는 게 사진의 최대의 목표이자 사진적 가치의 궁극적 표현이기도 하거든요. 왜 사진에 자꾸 글을 붙인 것인지는 원하는 사진에 대한 메시지의 전달력 부족과 사진 표현력의 부족이라는 큰 단점의 보완적 성격이 글로 나타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뭐 따지고 보면 사진을 참 잘못 찍어서 글이 나온 셈이니 사진의 결핍이 글을 불러들인 결과를 낳게 되는 거라서요. 원하는 대로 사진을 못 찍어서 글로 그 사진의 부족한 면은 보충하는 목적도 있었더란 말이죠. 그러니 그게 시처럼 보였을지라도 따지고 보면 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진 표현의 부족으로 나온 글을 시같은 형식이라고해서 디카시 문학상에 응모를 한다는 게 좀 말이 안 되는 거라서요.
사진에는 의도와 작위성이 반드시 따라붙습니다. 무의도적이거나 무작위라면 사진 안 찍거든요. 내가 어떤 이야기를 사진의 형식으로 빌어서 말할 때 그 어떤 이야기가 사진이든 시이든 방식이 다르지만 언어로 표현하거든요. 그것이 이미지의 언어이든 텍스트의 언어이든 표현이란 속성은 사실 비슷하거든요. 다만 형태가 다를 뿐이라서요. 사진이든 시이든 즉흥성과 무작위성이라는 날 것의 싱싱함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내가 찍는 사진이 흡사 낙서와 뭐가 다르겠는지 모를 일입니다.
사진을 매게로 한 문학의 장르인 디카시에 사진이 배제된다는 것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디카시라는 장르에 디카라는 것은 디지털카메라로 만들어지는 사진을 통해서 시를 연출하는 형식이라고 정의한다면 디지털카메라, 디카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나 혹은 사진은 시를 위한 보충제 역할인지. 혹은 이미지를 뺀 기존 문학 장르의 시와는 다를 바도 없는 셈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디카시 장르에 왜 사진작가가 심사위원으로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사진의 작품성은 아예 배제하겠다는 의미였나 싶었거든요. 얼핏 디카시라는 분야에 사진 혹은 이미지 이 자체의 작품성은 아예 제외해 버린 것처럼 보였는데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사진도 사진 자체로는 시보다 덜 심오한 세계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현대 사회의 발터 밴야민의 이야기처럼 이미지나 사진의 해독의 부족은 현대의 문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니까요. 사진은 글의 사족 같은 역할이 아니거든요. 사진도 사진 본연의 표현적 방식으로 연출되고 각색하는 것도 있으니까요.
사진은 기본적으로 빛의 복사라는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아무리 핸드폰 기계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카메라를 따라갈 수 없는 기계적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카메라 렌즈 85MM 구경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사진과 핸드폰 렌즈 1mm로 빛을 받아들이는 광량과 광의 세기는 차이가 너무나도 크죠. 하다못해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갤러리에 전시를 하면 아주 크게 프린트가 됩니다만 핸드폰 사진은 프린트를 할 수가 없거든요. 픽셀이 다 께지는 뭐가 뭔지도 모를 정도의 조악한 화질을 냅니다. 그러니 어느 사진작가치고 프린트 크게 하는 걸 원합니다. 가끔 객기같이 핸드폰 사진으로 작품을 여는 경우도 있는데 전혀 일반적이지도 않고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만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라서요. 열악한 화질과 조악한 사진을 가지고 시를 넣는 것도 일단 사진 감상에서는 최악의 요소로 작용하거든요.
앞으로도 누군가 정해 놓은 형식대로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진과 시가 예술의 한 범주로 포함을 시키는 거라면 누군가 정해 놓은 것의 테두리 내에서 나의 사진과 글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는 의미입니다. 예술이란 규정과 비규정의 끝없는 치열함일 것이니까요. 시의 은유가 비틀듯이 사진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이렇게 이웃 분의 문학상 응모 권유로 그동안의 사진과 글에 대해 더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런 디카시 형식의 규정으로 사진과 글을 제한할 이유는 나에게는 없거든요.
앞으로도 여전히 사진과 글로 자유로운 사유와 세상의 피사체에 통찰하고 싶은 시인(是認) 하고 살아갈 일들일 뿐이죠. 사진에 글을 붙인다고 시인(詩人)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예술적 허영심으로 사진은 맞지 않아서요. 그간 많은 사람들이 이 허영심 체우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지만 수년간 지켜보니 모두 나가리 되는 게 왜 그렇게 사진을 그만 두는지 알게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