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온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학교 다니면서 벌써 남자친구도 생겨 일주일마다 번갈아가며 도시와 도시를 오고 가는 걸보니 한편으론 다 컸구나 싶다가도 뭔가 모를 약간의 섭섭함도 생긴다. 그런데 방학 한달이 다 되어가도 어떻게 저녁 한 끼 마주 보며 먹은 기억이 몇 번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물류배송 관련한 알바도 한번 갔다 오더니 거의 녹초가 되어서 온 적도 있었는데 돈 벌기가 쉬운 것이 아님을 절감했나 보더라.
딸아이 방학을 보니 나의 여름방학이 까마득하게 생각났다. 아마도, 분명, 필시, 대학 때 1학년 여름 방학이 내 인생에 있어서 평생 읽을 책을 모두 읽은 듯이 방학 내내 학교 도서관 열람실에서 책과 함께 보냈던 기억이 난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닥치는 대로 소설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기도 하고 시리즈물은 다 읽지 못하면 대출받아서라도 집으로 싸 들고 가서 읽기도 했으니 책에 몰입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난다. 왜 그렇게 소설책에 빠졌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방학이라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학교 도서관 만한 대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움직이면 모조리 다 돈이 드니 그나마 최소의 비용으로 버티는 데는 학교 도서관이 굉장히 저렴했다. 어쩌면 비싼 등록금을 도서관에서 뿌리를 뽑아 먹었던 셈이다. 요즘이야 스마트폰을 끼고 살고 TV는 하루 온종일 볼 수도 있고 인터넷으로 수많은 영상을 감상할 수도 있는 등 다양한 매체들이 있지만 그 때는 책이 제일 좋은 몰입하는 전달 매개체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던 때였으니까. 하물며 그 많은 책을 모두 돈 주고 사보는 것은 택두 없는 소리인데 신간 서적은 항상 먼저 볼 수 있었다. 특히 매일 열람대의 사서 직원의 안면을 익히고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낯섦이 사라질 무렵 새로운 신간은 먼저 찜해주는 특혜도 받게 되기도 했다. 책이 꼽혀 있는 서고의 열람 대는 오가는 사람도 드물고 하니 거의 독차지할 만큼 한산했던 도서관 서고 열람실. 그해 여름은 더운 줄도 몰랐다. 역시 도서관은 시원하니까.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는 바로 젊은 시절부터 읽은 책들의 소회를 담았다. 그리고 머리말에는 대학에 갓 입학한 딸에게 책을 선물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책을 좋아하는 아빠로써 딸아이에게 유시민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딸아이에게 무얼 유산으로 물려줄 것인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마는, 적어도 딸아이에게 책을 좋아하고 책으로써 자신의 삶에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식견을 넓히는 습관을 들였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비에게 책한 권 선물 받아 본 적이 없는 결핍의 시대를 살았다. 유시민 같은 아빠가 있었다면 얼마나 부모의 복을 타고 날 수 있는 것인지 상상만 해도 로또 복권 당첨만큼이나 벅찬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행히도 나는 아비가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는 시골에서 농사나 짖는 무지랭 같은 부모를 만났으니까 책을 선물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는 거다. 일전에도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는지 가물가물 한데, 인간의 운명은 이미 반은 결정 난 상태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태어난 여건이나 조건에 따라 혹은 출생의 상태에 따라 부모의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을 가능성 보다 크다. 물론 시대적인 영향이나 사회적 환경적 영향이 크게 좌우되기는 하더라도 핵심적인 확정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거다. 인간의 운명은 출생에 따라 달라진다는 운명론을 믿는다.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은 결정적으로 바뀐다. 그래서 위대함은 이 운명을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는 것처럼 거슬러는 것이고 평범함은 강물에 그저 시간에 따라 흐르고야 만다.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함이란 조건이다. 나는 운명을 거슬러 자바리가 안되는 거야 이미 살아온 바가 증명한다. 마치 내 아비도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러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아비를 원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못 배운 아비는 아비가 아는 바대로 열심히 다했으니까 그것으로 만족이야 안되더라도 불만은 소용이야 없다. 책을 주는 아버지가 그립다. 요즘도 가문이나 가풍 따위를 따지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집안이든 면면히 흐르는 유전자적 혈통이라는 것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하지 않는가. 하기야 우리나라 족보는 90%가 가짜이니 대부분은 별거 없다. 증명도 할 수 없는 가짜 족보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자기의 위로 내지 위안거리일 뿐이라는 거다. 운명론에 의한 혈통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내가 내 당대에서 조금이라도 변화를 시도하는 것. 이게 중요하다. 지나온 과거를 따져 본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관건은 내가 내 당대에서 무식한 혈통을 유식하게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당대의 요체가 아닐까. 살아온 대로 살아가면 바꿀 수 없고 나의 후손 누군가가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뭐하고 사셨냐고 묻는다면 내가 하는 내 당대의 스토리텔링은 무어라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저 밥 먹고 똥 싼 조상은 많은데 이걸 굳이 알려주지는 않는다. 덮기 바쁠 것이다. 뭔가 스토리가 있는 재미난 가치의 자랑을 물려주는 것에서 당대의 내가 처한 오늘에서 미래의 후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족했던 조상의 과거는 끊어야 하고 가능의 미래를 주는 것은 오직 오늘의 지금만이 행할 수 있는 키포인트일 것이다.
이 책을 딸내미가 권해도 읽지 않는다면 내가 읽어야겠다. 읽지 않아도 채근하고 싶지는 한다. 딸이라도 스스로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성은 건드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보기는 봤으면 하는 바람이야 가질 수 있는데 이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제 식견과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결핍이 생기고 목말라 갈증을 느꼈듯이 물을 찾는 것처럼 책을 찾아야만 가능하다. 부모 할지라도 물을 대신 마셔줄 수는 없다. 바래서도 안된다. 그러나 이런 책으로 작은 동기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도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