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플님들의 추천으로 희곡 입문 ~혼잣말이 늘었다. ㅎㅎ)
<맨 끝줄 소년>
한예종 입시 지정 희곡중 하나라는 < 맨 끝줄 소년>
소설인 듯 독백인 듯 흘러가는 이야기, 담담한 클라우디오의 미묘한 감정선을 읽기가 힘들 듯 하다. 연극하는 분들에겐 갈등도 감정의 표출도 큰 사건도 없는 그러나 감정의 동요들이 내면에서 출렁이는 이 극본을 연기하는 게 아주 어려울 것 같다.
맨 끝줄에서 자신은 감춘 채, 타인들을 관찰하는 클라우디오에겐 미노타우로스의 미로가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잡고 앞으로 나와, 좀 더 밝은 곳에서 정정당하게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다. 한 쪽만 누리는 관찰과 사생은 불리하고 음침하다. 부도덕적이고 인간관계에선 반칙이다.
그들의 삶을 엿보고 잣대로 판단하며, 마치 신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며 객관화나 비웃음, 혹은 희화화나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가지지만, 결국 헤르만은 소년이 그려내는 재능 앞에서 <계속>이란 도덕적 범죄를 묵인한다.
멈춰야 한다고 말하지만 읽기를 멈추지는 않는 후아나, 그리고 그녀 앞에 나타난 클라우디오.
“널 죽여버리겠어.”
그는 공범자일까 공동종범일까.
도덕성이 결여된 글쓰기 속에서 함께 엿보기를 자처하며, 자신은 다를 거라 생각하는 이들은 모두 길을 잃은 자들이 아닐까.
그들에겐 미노타우로스의 미로가 아닌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필요한 때.
(희곡이 대사만으로도 이렇게 심리적 변화를 잘 표현할 수 있다니, 아이의 작문 하나로 이렇게 깊게 인간의 본연의 심성을 파고 들수 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뿐.)
<밤으로의 긴 여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핑계로 돈에 집착하는 인색한 배우 티론, 집도 없이 배우남편을 따라 여기 저기 떠돌며 지쳐버린, 그리고 돌팔이 의사의 처방으로 모르핀 중독이 된 엄마 메리.
홍역을 옮겨 어린 동생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과 가족들의 미움 속에서 인생의 좌절을 겪는 냉소적이고 삐딱한 제이미, 만사가 비관적인 아픈 몸의 에드먼드.
그렇지만 그들에겐 모두 나름의 핑계가 있다. 삶이 가난이 어린시절이 결혼이 책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거라 생각한다. 별 것 아닌 가족간의 대화에도 살얼음같은 긴장감이 돈다. 어떤 말이 또 누구에게 상처가 될지 모른다. 빌어먹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도, 마치 마리오네뜨처럼 그들은 날카로운 신경줄을 가지고 서로를 아프게 하고, 미안해하고 그러다 또 할퀴며 잔인해 진다. 화해도 구원도 없는 절망만이 차려진 저녁이다.
책 속엔 셰익스피어와 보들레르 등 꽤 많은 문구들이 인용된다. 그런 인용된 문구들이 인물들의 속내를 표현한다고 보여졌다.
아버지 티론의 “여보게 브루투스, 우리가 부하가 된 잘못은 우리 운명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는 걸세 ”
어머니 메리는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제이미 “ 내 얼굴을 보게. 내 이름은 ‘더 훌룽해졌을 지도 모를’ 혹은 ‘더는 아닌’ ‘늦어버린, ’안녕‘ 이라고도 불리지.”
그들은 이제 늦어버린, 더는 아닌, 그래서 서로에게 안녕만 남은 가족일지도 모른다.
(유진 오닐의 삶은 에드워드의 삶의 연장선이었다. 어느 책이었더라, 결혼과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글이 잘 써진다고 하던데. 그의 글들은 그의 슬픔과 아픈 기억의 연장선에 있던 것은 아닐까. 유진 오닐 하면 그의 딸 기억이 난다. 우우나 오닐, “호밀밭의 반항아”란 영화에서 샐린저의 첫사랑으로 나왔다. 실제 첫사랑이기도 했지만, 찰리 채플린과의 결혼으로 샐린저를 차 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