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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5
윌리엄 트레버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3월
평점 :
“1995년에 구입한 윌리엄 트레버 단편집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작품에 견줄 만한 이야기를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행복하게 죽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줌파 라히리가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한 말이다.
윌리엄 트레버, 좀 부끄럽지만 들어 보기만 한 작가다.
소개글엔 안톤 체호프와 제임스 조이스를 계승한 현대 단편소설의 대가라고 되어 있다.
내가 산 책은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23편이 실린 책이다.
단편들의 시작은 비슷했다. 나 혹은 이름으로 시작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이름을 듣자마자 악수하며 인사도 나누기 전에, 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는 느낌, 질척이거나 뭔가 지저분하다기 보단 그들의 이야기는 불쑥 찾아온 외판원 같다. 난데없이 훅 들어와서는 물건을 팔기보단 일상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속에 그들의 깊숙한 속내가 담겨있다.
시작은 일상이지만, 그 속에 반전과 새로움, 신선한 서사들이 담겨 있다.
할머니의 탁자를 팔아버린 후 후회하다 남편의 불륜을 알아버린 해먼드 부인, 억울하게 누명을 쓴 윈턴과 그녀의 개, 그리고 너무나 뻔뻔하게 그녀를 무시하는 관리인
특히 <탄생을 지켜보다>는 반전의 매력도 있다.
성에 눈 뜨며 학교와 집에서 갈등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 (소녀의 시점에서 쓴 글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소녀의 심리가 잘 표현되어 있어 좋았다. 죽은 하얀 민달팽이 같은 딕비헌터부인이야기나 다리를 다친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는 브리디의 이야기 또한 여성의 시점에서 쓰인 글이다. )
메이비스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매카시와, 노부부와 집사를 몰아내고 집을 차지해 버리는 비열한 댄커스 부부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작가는 아일랜드 태생이지만 경제적 이유로 영국에서 살았고, 평생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삶속에서 항상 외롭거나 부재하거나 쓸쓸한 이들이 대부분 주인공이다. 무시당하기도 하고 이용당하기도 한다. 외롭고 쓸쓸한데다가 우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게 이 단편들의 다는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이 다가 아니듯, 삶 또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엔, 나와 부대끼는 가족이나 타인의 삶들이 함께한다. 그렇게 가족과 타인의 삶들과 내 삶들에 엮이면서, 나라는 그림이 완성되는 것, 그래서 내가 그린 밑그림이 아니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완성작에 가끔 어리둥절하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려지지 않는 삶을 보며 망연자실하는 모습들을 주인공들에게서 만나면 공감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세상은 우리한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아." 아그네스 티처의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친구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미스 그림쇼는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미스 그림쇼는 걸음을 옮겼다. 노란 비닐봉지에 담긴 조개껍데기가 달그락 소리를 냈다. 미스그림쇼는 자신의 머릿속에 파고들려는 생각을 애써 막았다. 마늘새가 공기에 섞여 있었고, 부엌에서는 이 지역 요리인 부야베스의 그윽한 냄새가 풍겨 왔다. 부야베스는 두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였다.
이 작은 도시에서 나는 혼자 사는 이상한 남자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자라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나처럼 자란사람은 병적인 상상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내가 아는 1거라고는 이 해변 도시에서, 아니 이곳을 벗어난 어디에서든 그녀만큼 내 눈앞에 실재하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를 위해 살면서나는, 내가 소망하는 대로 그녀를 소유할 수 없음을 알기에 하루하루를 절망으로 보낸다. 나는 환영을 향한 육욕을 품고 있다. 이런 내 욕망은 신이 내게 보내는 조롱이며 내가 품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처단하려고 신이 내리는 적절한 벌이다.
메이비스는 현관까지 그를 배웅했다. 그러고서 매카시가 지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그의 다리가 난간을 따라 힘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다 사라졌고 메이비스는 부엌으로 돌아와 잔에 차를 따랐다. 메이비스는 그가 언제나사업상 약속이라고 부르는 토요일 약속을 지키는 모습과 일을 마친뒤 버스에 몸을 싣고서 그가 사는 교외로 돌아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앞에 열쇠로 문을 열고서 집 안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이, 개한 마리와 아이 두 명과 몸집이 크고 살갖이 거무스름한 여자가, 아내인 여자가 그를 맞는 모습이 보였다. 개는 큰 소리로 짖었고 여자는 날카로운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잘못된 행동을 했거나 무언가를 잊었거나 사소한 속임수가 발각되었기 때문인 듯했다. 메이비스는 열쇠를여전히 손에 쥔 채,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현관에 선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덮치는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담은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꺼풀 아래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버스는 매카시를 오데온 극장에 내려놓았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한 상점 앞에 걸린 환하게 불이 켜진 시계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의 시간을 비교했다. 그는 차를 한 잔 마실 여유가 있다고, 배가 출출하니 데니시 페이스트리를 하나 먹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차를 마신 뒤 그는 토요일이면 언제나 그렇듯 영화를 보러 갈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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