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책을 빌려주는데 인색한가.
크리스마스다. 거리에 캐롤이 울려퍼지고 친구들과 시내를 쏘다니던 20대를 지나고 나면 사실 그렇게 큰 감흥은 없다. 아, 아이에게 올해는 무슨 선물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정도?
크리스마스는 사실 무언가를 나누고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는 날, 그래서 스쿠루지는 매번 고약한 얼굴로 나타나 온갖 인색함을 내뿜으며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되찾으라 이야기한다.
스쿠루지, 그는 돈에 지독히 인색하다. 나는 책의 스쿠루지?
사실 나는 뭐든 잘 빌려주는 타입이다. 돌려달라는 말도 거절도 잘 못하는 엄마말로는 맹추! 답답이.
그런데 책만큼은 싫다. 아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숱하게 겪었을 그런 에피소드들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첫째, 누구냐!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한 말, 아주 당당하게 이 말을 하며 내게 빌려간 책 다섯 권을 주지 않은 내 대학동기 김삐삐~(심한 욕 심한 욕) 차마 거절은 못하고, 우리집에 놀러 온 날 신나하며 빌려간 내 소중한 책들, 결국 알바비를 털어 다시 그 책들을 샀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더럽다. 특히 단정하고 깔끔하며 정갈한 내 책을 두 배로 불린 후에 누렇게 얼룩까지 묻혀서는 히죽이죽 웃으며 돌려준 그 삐삐~
세 번째, 도무지 돌려주지 않는다. 돌려줄게 돌려줄게. 결국 나만 쫌팽이에 오히려 책 돌려달라고 독촉하는 가해자가 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책도 비싼데.
네 번째, 책은 일기장 같기도 하다. 줄을 긋기도 하고 옆에 내 감상평을 쓰기도 한다. 깜박하고 그렇게 줄 긋고 메모해둔 책을 빌려준 적이 있다. 내 메모 옆에 작게 볼펜!!으로 쓰여진 글씨 “유치해” 이 미친 삐삐삐 (심한 욕 심한 욕) 그때부터 내 책인데도 옆에 메모하면서도 혹시 유치한가라는 자가검열을 하게 만든, 메모의 자유를 앗아간 나쁜 삐삐삐
다섯 번째 오롯이 내 것이고 싶은 마음. 우리집은 다섯남매, 그리고 나는 막내다. 어릴 때부터 내 것은 잘 없었다. 물려입은 내복과 물려입은 옷들과 물려신은 양말, 그러니 용돈을 아껴 산 책들만 새 것이었다. 특히 나는 언니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게 싫다. 어릴 적 용돈을 모아 두근거리며 산 책들을 보곤, 막내야 너 읽어도 이해못할 책은 왜 사니? 또 그런 책이냐? 등등의 비아냥과 구박들,무시하는 발언. 물론 언니들이 나쁜 뜻으로 한 건 아니다. 그냥 버릇? 막내를 놀리고 싶은, 그리고 내가 그런 지나가는 말들에 상처입을 줄 몰랐겠지. 하지만 그들이 내뱉는 한 마디들은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더 그랬나보다. 나같은게 어떻게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어? 그런거라도 해야지. 그러면서 부탁한 사람들을 미워했다. 그러다가 거절 못해 상대방을 미워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 거절하고 혹여 맘 상할까 고민하고.
그렇지만 이젠 책을 빌려달라는 말에 단호히 나는 책은 안 빌려줘, 대신 남편은 필요하면 빌려줄게~ 라고 말한다. 밤에 잠들기 전 잠시 혹시 상처받았으려나 내가 너무 싸가지 없이 이야기했나 고민도 되지만, 누더기가 되어 돌아올 내 책들의 몰골을 생각하면 그래 거절이 나아 하며 잠이 든다.
그럼 슬프게도 누더기가 되어 돌아온 내 책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썩은 우유냄새, 두 배가 되어 돌아왔다.)
2. 안네의 일기 (낙서가 잔뜩, 거기엔 돼지엄마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다. 뭐지? )
3. 태백산맥(그 삐삐삐가 앞부분을 몽땅 갖고가서 돌려주지 않은 책.)
이 외 수 많은 내 피 같은 책들!
( 물론 기분 좋게 빌려주는 이들도 있다. 고마워하며 깨끗하게 돌려주고 감상평도 짧게 이야기하는 친구들, 조카. 그리고 밀없이 들고가 말없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 아이, 책보기를 돌같이 하는 남편 ㅎㅎ)
내일이면 크리스마스, 떠나간 내 책들의 안녕을 빌며, 그 시절의 그 삐삐삐들을 용서하며, 그리고 앞으로도 책 대여는 거절하는 걸로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실천해 볼까 한다.
여러분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여러분들의 책들에게도 메리 크리스마스!
한 해 동안 제 모자란 글들에 좋아요 눌러주신 북플 친구님들! 진짜 복 받으실 겁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아, 사진은 그냥 우리 강아지 자랑하고 싶어서요.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