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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평점 :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허기를 견뎠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빵 봉지는 안이 투명했다. 구겨진 포장에 빛이 잘 들어왔고 작게 쓰인 글씨가 흔들렸다. 입가에 묻은 우유. 속이 빈 것들을 앞에 두고 말이 없었다. 참이 끝나가는 오후, 골판지 위에 드러누운 황갈색 작업복은 몸을 하나 둘 일으키기 시작했다. “백주대낮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일만 일어나므로” 「교실에서」부분. 현장은 다시 흙먼지와 날것의 온도로 뒤섞였다. 천안 아산역에는 하루 열 세대의 기차가 지났다.
어떤 구절은 어느 날의 신문기사처럼 간결하게 '그날'이었다. 현장은 도로가 잘 보였다. “앰뷸런스와 소방차로 거리는 활기차다/ 열차는 수백 명을 태운 채/ 강물로 뛰어들 뻔했다” 그것은 아주 흔한 소리여서 어쩌면 도로의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문장으로 시마이 할 때까지 다시 부푼, 빵 봉지만큼의 허기를 대신해 견뎠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은 가질 수 있었다. 컨테이너 숙소 이불에 피곤을 뉘이고 ‘무엇을’ 알기 위해 시집을 피곤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 덮고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본다” 로 시작하는 시. 시가 책을 덮으라고 하는 것인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며칠 밤을 졸았었나. “하루종일 침묵한 일을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강철로 된 드롭프스를 넣어준다”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강철로 된 드롭프스*'라고 쓴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그런 날들에 기대 읽기 시작했다.
그 저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니
진은영은 서른 살에 등단했다. 그리고 3년 후, 첫 시집을 냈다. 이 시퍼런 시집을 보면서 벽과 머리의 관계를 생각한다. 물렁한 살로만 지탱된 생이 없듯이 내게도. 어떤 굳건함이 있을거라 믿었던 것은 모두 착각인 듯 싶어서. 시는 너에겐 어떤 방패도 없다는 듯 작정하고 들어왔다. 가령 이런 물음들. "자 그러니 말해봐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 「고요한 저녁의 시」부분. 그 저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니, 찧지 않고서 견딜 수 있겠니. 그러니 벽과 머리의 관계를 생각하고, 비로소 머리의 쓸모를 생각한 것이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
모름지기 시인의 포부란 고작 일곱 개의 단어로 사전을 만들고 고작 몇 마디의 말로 거대한 이름을 설명하려 드는 것. 세상에 사전만큼 무모한 노력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그러나 어떤 사전보다 깊은 갈래를 냈으니, 이 두 쪽 짜리 사전에 금방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슬픔’이라는 말에서 물에 불은 나무토막을 부르는 걸 보자. 처참함, 나무는 쓸모를 잊어버리고 물속에서 헤풀헤풀 풀어질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그것도 모자라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참혹함, 몇 마디 하지 않았으나 그 몇 마디조차 막아버리고 싶은 구절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슬픔' 다음으로 오는 단어가 ‘자본주의’라는 점인데. 오늘이 외면하는 '오늘'을 시가 바로 보겠다는 선언 아닌가. 시가, 저 나약한 가지가,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긴 손가락의 詩」부분. 이라며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온다.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주소가 없다. 당신의 기억이 그렇듯 장소보다 시간에 기대 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보았다는 회상의 흔적은 그의 영혼 속에 있고, 그의 지적 활동의 발현이 작용한다는 것은 그의 행동에서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앞을 보태줄 수 있을지.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 이처럼 있다는 곳에서 살지 못하는 것이 또 하나 있어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름 '가족'이다. 누구나 긴 말 하나씩 품는 단어. 시인도 한 마디 했다. 긴 말 할 것 없다는 듯 간단히.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 전문. 이렇게 쉬운 비유가 이때까지 어디에 있었나, 밖에서 빛나는 것이 어째서 한 집에 들어가면 서로를 쏘아보는 날이 되어야 했나. 이 짧은 시를 쉽게 넘길 수는 없다.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센 언어는 기세가 꺾이지 않고 1,2장 내내 읽는 이에게 처들어 온다. 「가족」에서의 충격은 「청춘」에서 다다르는데, 「청춘」은 연작이다. 아마도 더, 용서 할 수 없었던 모양인가. 익지 않아 무서운 말들에 흠씬 두들겨맞는다. 서른 세살에 나온 시집이므로, 서른 세살 이후에 쓰인 단어는 이곳에 하나도 없다. 분명하게 금 그어진 서른 셋 이전의 날들은 독자와, 쓰는 이를 따라 무섭도록 쪼아댄다.
청춘 2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청춘 2」 전문.
어질한 뒷목을 쓸어 정신을 차리면 다른 시. 이제는 더 정확히 '서른 살'이라고 겨눈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뜻/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서른 살」부분. 서른 살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당신이 생각해야 하는 거고.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말은 다만 이것 뿐이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스무살의 끝에 몰린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나도 없다. 시인이 말하는 방식이 이렇다. 이런 일갈이 어디 청춘에게만 한정돼 있으랴, 뒤를 넘기면 "유신론자는 매일 확인한다/ 어디에나 똑같이 찍힌 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무신론자」부분. 보우하사, 유약한 나를 또 꾸짖고 뱉고 달린다. 시인은 달려서 마침내 이 세상에 없던 포도송이를 하나를 그리는데. 이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 시집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일 것이다. 처참하게도 무용한 시가 폭력에 부딪힌다. 일어났던 폭력과 그것을 침묵했던 폭력, 모두에게 말이다.
...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
네가 흘린 눈물은 다 어디로 갈까
네가 떨어뜨린 물방울은 다 포도송이가 되었다
건물들 사이로 솟은 첨탑 꼭대기에
매달린 포도송이
누구의 그늘이 될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입을 축일 수도 없다
열매가 투명해서 아무도 따먹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쓴다
너에게 수천 개의 물방울이 모여든 이유를
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노동자들이 분신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된 이후로도 다른 스무 살들이 어디론가 끌
려갔다 이곳에서
빈방의 아이들은 불타 죽고 이곳에서
철거촌 사람들은 깡패에게 맞아 죽고 이곳에서
라고 나는 쓴다 이곳은 조용하다
라고 쓰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
라고 쓴다 보랏빛 젖은 안개로 쓴다
네 투명한 포도알 위에
스무 살 메마른 입술 위에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부분.
'너'는 누구인가. 너는 스무 해 첨탑 꼭대기 매달린 포도송이이고, 포도송이가 떨어뜨린 물방울이다. 스무 살 메마른 입술을 가진이다. 그래서 너는 스무 해 동안 일어났던 이 땅을 모두 알고 있거나, 전혀 알지 못한채로 그 땅을 걷는이다. 너는 누구인가. 그러나 너는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며 투명할 포도알과, 스무 살 메마른 입술 위에 이 일들을 '쓰는 행위'다. 나는 포도를 알고 있다. 포도는 작고, 물이 많고, 입에 쏙 들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열매가 투명하다. 포도라고 할 수 있을까? 까맣게 가지에 차 오르는 풍성한 부풀음이 아닌 것을 말이다! 열매가 투명한 포도는 원래 알알이 있다고 믿어졌던 것이나 점차 흐려졌다. 학살과 노동자들의 분신과 다른 스무 살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보지 못하면서, 그 모든 일이 있었던 이곳을 조용하게 만들면서. 이 투명한 포도는 언제 과육과 검은 껍질을 갖게 될 것인가. 스무 살이 되어 그곳을 걷는 '그'가 마침내 한 개의 '몸'을 채워가고 있을것인가. 절망에 몰린 희망을 시인은 "보랏빛 젖은 안개로"쓴다. 그것 참 지워지기 쉬워라. 처음으로 돌아가, 시는 책을 덮으라고 했다. "교실 밖에서"일어나는 삶을 보라고 했다. 배움에 뜻이 있다면 "하루종일 침묵"하느라 "메마른 입술"에 "보랏빛 안개"로 이곳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보랏빛 안개가 내 입술 위에도 내렸을 일을 생각한다. 조용히, 입을 벌려 따라 읽는다.***
*사탕
**프란시스 위스타슈, 이효숙, 『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알마. 26p
원문 : "그 사람을 보았다는 회사의 흔적이 그의 영혼 속에 있고, 그의 지적 활동의 발현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그의 행동방식 속에서 알아볼 수 있다."
***따라 읽는 글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계간 문학동네 2014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