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위의 국화 그림자
국화가 다른 꽃들보다 뛰어난 점이 네 가지 있다. 늦게 피는 것, 오래 견디는 것, 향기로운 것,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차갑지 않은 것, 이 넷이다.
국화를 사랑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거나 국화의 멋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그 사랑하는 점이 이 네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네 가지 외에 벽에 비친 국화 그림자를 특별히 좋아한다. 밤마다 국화 그림자를 보려고 벽을 치우고 등촉(燈燭)을 켜고 고요히 그 앞에 앉아 스스로 즐겼다.
하루는 윤이서*에게 가서 말했다.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자면서 함께 국화를 구경합시다."
이서가 말했다.
"국화가 아무리 아름답지만 어떻게 밤에 구경할 수 있겠나?"
그러면서 몸이 좋지 않다고 사양하므로, 내가 말했다.
"한 번만 구경해 보십시오."
그러고는 굳이 청하여 함께 집으로 왔다.
저녁이 되자, 일부러 동자에게 국화분 하나 앞에 등촉을 가까이 갖다 대고 있게 한 다음, 이서를 이끌고 가 보여 주면서 말했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이서가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자네 말이 이상하이. 나는 기이한 줄 모르겠네."
그래서 나도 그러시냐고 하였다.
조금 뒤에 다시 동자에게 제대로 한번 해 보게 했다. 옷걸이와 책상같이 어수선하고 들쭉날쭉한 물건들을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정한 다음, 적당한 곳에다 등촉을 둔 뒤, 불을 비추었다.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 이채로운 형상이 홀연 벽에 가득했다.
108쪽
(중략)
국화 그림자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즐기는 다산. 33세 때의 글이다.
*윤이서_고산 윤선도의 직계 후손이며 윤두서의 증손으로 다산의 외육촌이다. 다산보다 열 살이 많았으나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정약용 산문 선집, 박혜숙 편역,『다산의 마음』, 돌베개. 2008. 6.
와유(臥遊)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
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
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
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에 취하리
안현미,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9.
다산의 서른 셋. 이마 반듯하고 환한 얼굴로 밤중에 국화를 보자며 형을 이끈다. 그 당기는 팔이며, 벽에 국화 그림자와 함께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며, 그 밤 고요했을 불빛이며. 풀벌레 소리여. 흔들림 없는 밤이다. 그 밑에 <와유>라는 시를 문간방에 놓으면 다산이 보시고 좋다. 하셨을 것이다. 이것 좀 보라, 도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 다산의 집 담에 기대고 있으면 홀로 켜진 방안에 그와 윤이서와 벽에 그려진 국화 그림자의 탄성이 말 없이 들릴 것인데. 바다의 바깥으로 밀려가는 물의 움직임처럼 나는 그곳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이라. 가을, 옛 글을 앞에 두고 국화 없이 취한다.
국화, 깨끗하지만 차갑지는 않은 것. 목이 가는 국화가 놓이는 모양을 생각하다가 저 멀리 떠내려가 이제는 무엇으로도 잊는지 알 수 없는 사월을 시월에 놓는 일이 있다. 국화나 가을이나 그런 것이 다 무엇일까. 시간 앞에 취할 수 없는 이들이 모여 있다. 그 광장.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그곳이 마치 훌쩍 들려 물러났다는 듯이, 작고, 조용하고, 멀다. '그 까닭을 생각한다'. 라고 쓰는 자판의 두드림에 스탠드에 걸린 노란 리본이 가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