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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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비를 뽑듯 우연에 맡기고 책을 펼쳐 눈에 들어오는 페이지를 읽는데, 바로 그것이 흥미로운 거요. 210

직장인들이 일년 평균 10권 미만의 책을 읽어 한 달에 1권도 읽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책을 오죽이나 안사겠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출판 시장 악화'가 자연히 떠올랐다. 그러나 책을 한 달에 스무권 이상 산다고 해도, 스무권을 '읽었다'는 정의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것이다.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읽었다'이후 마침표에는, 험난한 과정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서는 애초에 숫자가 문제인 것이 아니어서 읽거나 산 책의 수량을 세기 전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독서가 한편으로 수량의 문제인지도 다시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읽느냐'는 물음이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 이 물음은 대답하기 곤란한데 수의 많고 적음이 부끄럽거나 남사스러워서가 아니라 '읽었다'는 주관을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읽었다는 뜻이 뭐요? 나부터도 매달 산 책을 '산책'했다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언제나 불충분한 기록이라는 생각이다. 매달 10권이나 13권처럼 똑 떨어지게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틀린 기록에 가깝다는 생각. 정확한 수치가 필요하다면, 나는 이번달 65권을 47/190쯤 읽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삼천포지만 우리가 책을 읽었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표현 중에 못 읽었어/다 읽었어 이외에 '더 읽었어'라는 말은 왜 없는 걸까. 나는 맹랑하게도『밤에 쓰는 편지』라는 시집을 89/23쯤 읽은 것 같다. 그 책이 갖고 있는 텍스트보다 약 세배 이상으로 읽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시집을 더 이상 읽지 않아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농도가 진해진다고 여긴다. 이런 느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나는 시집의 제목을 말하는 순간부터 울컥해서, 조용히 수그러지고 싶다. 오금이나 복숭아뼈, 등 같은 신체의 부분들이 저마다의 행동을 취하려고 한다. 오금은 접히겠다고 한다. 복숭아뼈는 복숭아 뼈를 보고 싶어하고, 등은 갑자기 하늘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그것들이 책을 읽어낸 것 같은. 

삼천포에서 돌아오자. 그것은 아마도 책을 '다 읽었다'는 층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다 읽음'은 물리적인 실체인 책에 쓰인 문자를 다 살폈다는 뜻이겠지만, 이 단정이 가져오는 수많은 상황을 예측하지 않는다. 그 중에 하나, 위에서 보았듯이 더 읽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읽기 전과 차이가 없는 경우-책이 여전히 모르는 것으로 남는 상황-는 묻지 않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 읽었던참을 수 없는 가우쵸』는 문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다 읽었지만, 그 책이 말하는 의도를 이해하려면 약 20권에서 30권에 이르는 라틴문화권의 책을 더 읽어야 했다. 그러니까 한 권을 읽었는데 오히려 스무권에서 서른권이 모자란 것이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 이것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말하듯 이 책이 갖고 있는 도서관과, 내가 갖고 있는 내면의 도서관의 책이 대부분(절망적이지만 한권조차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이 책에 대해 리뷰를 썼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책-읽기를 창조해(?)낸 까닭에 있다.

사실 우리는 그 도서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우리를 만들어온, 그래서 이제는 고통 없이는 우리와 분리될 수 없게 된 축적된 그 책들의 앙상블은 바로 우리라는 존재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마틴스가 자신의 우상이 쓴 소설들에 대한 비판을 참기 힘들어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간직한 내면 도서관의 책들을 험담하는 말들,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된 것들을 비난하는 말들은 때때로 우리의 존재 깊은 곳까지 상처를 준다. 108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면 『참을 수 없는 가우초』와 내가 갖고 있는 내면의 도서관에 겹치는 책이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 어떤 문장들은 내게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문학+병=병"이라는 수상한 수식으로부터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들, 그가 놀라운 이야기를 꺼낼 때 그와 너무나 다른곳에서 듣는 나의 위치들. 독서는 정해진 텍스트를 읽는(원래의 텍스트를 가감할 수 없는) 수동적인 행동이지만, 그것을 리뷰하는 것은 원래의 텍스트를 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쓸 수'도 있는 매우 능동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과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어떻게 말해줄까, 궁금하겠지만 그런건 없다. 저자는 그럴듯한 소제목들을 내세워(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등등) 비법을 속삭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책을 잘 읽는 법"에 대해 역설한다. 그렇다면 책을 잘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소제목을 빌려 이야기 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이라고 하더니 그 다음에는 (책을 꾸며낼 것)이라고 하고는 마지막에서 (자기 얘기를 할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책을 읽었는데, 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서의 패러독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길이 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저 통과만 하고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각가의 책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훌륭한 독자, 그런 독자에게 책들에 멈추지 않는 지혜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그런 '책 가로지르기'를 행할 것이다. 229 

이 책은 독서의 대상인 '책'이 아닌 것처럼 거리를 두는 듯 하지만 이 역시 책이라는 사실. 나는 '책을 가로질러' 곧바로 저자의 얼굴에 닿는다. 독서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저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가깝게 만나고 있다. 밤늦게까지 부시시한 얼굴에서도. 계란토스트 냄새를 풍기면서도. 다른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썼음에도 읽는 기쁨을 준다. 못난 글씨의 제목과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는 모두 함정이었다. 말랑말랑한 표지를 열면 종잡을 수 없는 사방이다. 떨어지는 금박지, 만화경의 안에 들어온 듯 무수한 각을 가졌다. 아까 마주했던 문장을 다시 만나도 새롭게 반짝인다. 



+[여름언덕]이라는 출판사가 궁금하다. 서지사항에는 그런게 왜 중요하냐는 듯 편낸이는 물론이거니와 편집자조차 써 있지 않다. 다행히 그들의 주소와 번호가 있어서 유령회사는 아니라는 안심을 주긴한다. 
이 출판사에서 피에르 바야르의 저작을 여러권냈다. 모두 읽고 싶다. 번역도 좋고, 편집도 잘 되어서 읽기 좋았다. 여름언덕은 실체를 드러내라. 어떤 책을 만들고 있는지 찾을 수 없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목록을 조회하고 있는 독자의 무심한 표정을 읽어주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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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25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야르 책 다 읽어볼 만합니다. 정말 흥미쥔쥔하죠.
홈즈가 틀렸다, 는 정말 걸작입니다. 무릎을 탁 하치 아 하게 됩니다.
햄릿과 로저 애크로이드'도 정말 재미있어요. 확실히 탁월한 감각이 있는 분입니다.
반면 예상표절은 약간 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여튼 저도 이 양반 책이 좋아서 다 읽어보았습니다. 재미있어요.

봄밤 2014-02-25 12:55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글쓰기에요. 곰발님의 추천까지 완전하네요!
정신분석가여서 그런지 문장이 마음 깊숙히 들어와요.
저는 제목만 보고 예상표절을 먼저 읽고 싶었는데 말씀 고맙습니다. ㅎㅎ
홈즈가 틀렸다, 부터 찾아야겠어요. 오호!!
 
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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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국경은 수평으로 된 수직
 전혀- 라는 표현은 어떤 대상을 완전히 부정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것이 '이해'의 문제에 쓰여 무엇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때, 말 그대로 화자는 이해의 바깥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해 속에 (갇혀)있어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이해인지, 이해가 아닌지 스스로 살피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팽 선생을 읽고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1 무슨 소리일까, 이해를 전혀 못하겠어. 2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이해의 한 가운데이기 때문에 이해의 여부를 살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니까 나는 이해를 하고 있는지, 하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 4 수평으로 된 수직*을 걷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수평으로 된 수직'이 불가능한 것은 한 개의 차원에 한정지어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개 이상의 시공간을 한 번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물질적으로는 언제나 수평의 상태만 갖는다. 

다만 그곳에 있을 것
꿈과 현실도 그렇다. 물질적으로는 언제나 현실만 존재한다. 그러나 둘 사이 차분하게 유지되던 기울기가 어느날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어떨까. 꿈과 현실이 뒤섞인 팽 선생, 그곳은 구분 가능하지도, 가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곳에 섞여서 의식을 따라가는 것이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 어떤 사건이나 물체는 그 바깥에서야 형태가 파악 가능하지만 그것은 대상이 온전해서 시공간과 분리될 수 있을 때만 그렇다. 구분 불가능하게 섞여 있다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 조차 가능하지 않다. 그럴때는 다만 그곳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해일 것이다. 그러니 갸우뚱한 고개를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현실을 기울여 꾼 꿈
도통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책을 덮는 손 안쪽에 어제의 꿈과 엊그제 꿈이 지나가고 있다. 가능하기를 바랐던 사건 몇 개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을 차분하게 지워나간다. 어제 나는 무척이나 키득거리는 꿈을 꾸었고, 깨어나서도 웃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녹고 있는 강이나, 뒷모습을 감추며 돌아선 고양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 일 정도가 큰 웃음인 까닭이다. 그곳에 아무 상관도 없이 서늘한 뉴스가 내린다. 눈쌓인 지붕이 무너져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이 죽고, 간첩을 증명하기 위해 국가기관이 서류를 날조하는 신문을 가로질러 간다. 나는 아직 온전하다. 과연... 

볼라뇨 식의 표현을 따르자면 내가 이것을 이해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바예호는 팽선생이 필요하지 않았다. 팽 선생이 필요 했던 것은 팽 선생 뿐이다. 꿈 속의 한 사람을 갈라 현실에게 한 사람을 내주는 일. 그렇게 해서 이해는 고통을 피할 수 있었고 고통은 이해를 피할 수 있었다. 지난 밤에서 넘친 웃음이 나를 깨운다.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처음 입을 떼는 것처럼 입가가 건조하다. 현실을 기울여 꾼 꿈이다.



*나희덕의 시「국경의 기울기」에서

**나는 <딸꾹질의 본성>이라는 말을 했다. 아마 딸꾹질의 특성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딸꾹질은 근육의 수축일 뿐이며, 독특한 소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면서 간헐적이고 격렬한 호흡을 유발하는 횡경막의 돌발적인 움직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바예호 씨의 딸꾹질은 환자의 육체와는 완전히 별도로 전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가 딸꾹질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딸꾹질이 환자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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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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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 풀릴 가망 없는 미스터리-겨울일


 첫 번째 이사는 월세 15만원이었다. 가끔씩 그 건물을 지나갈 때면 지금도 놀란다. 누군가 살고 있을까봐. 바닥은 따뜻할까? 라는 걱정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당시 그곳은 누군가 '살았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집이었다. 곰팡이가 주인이었다면 모를까. 그러나 군대에 간다는 세입자가 1년 하고도 6개월 살았다는 주인의 말에 쉽게 의심을 거두던 스무살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위안을 받았다. 서늘하다 못해 축축한 북향. 빛이 아스라하게 들어왔다. 해질무렵이 아침보다 환했다. 무엇을 보고 따졌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언가를 살폈고 근엄하게 계약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른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네 벽을 타고 물이 기어 올라왔다. 보일러 배관이 터져서 불이 돌지 않았던 것. 그것은 내가 점검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아니 점검하기 이전에 당연하게 배치되어야 했을 것이었지만 그랬다. 그래도 그때 마련했던 살림기구들이 여전히 쓰이는 걸 보면 선택이 모두 잘못될 수는 없다고 위로하고 싶다. 키티 밥그릇, 키티 접시, 키티..가 말갛게 마르고 있다. 그 후로 십년, 노련해졌을까? 살핀다고 살피고 들어왔지만 이웃까지 알 수는 없었다. 아랫층에 혼자 사는 95년생 돼지같은 꼬마가 새벽 다섯시까지 소리를 지르며 롤을 한다. 인터넷을 끊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삼키며 귀마개를 다짐했다. 






폴 오스터의 겨울일기는 몸-기억과 집-기억으로 이뤄졌다. 그는 '당신'이라고 자신을 부르면서 자신과 친밀하면서도 적정한 거리를 둔다. 몸-기억은 아주 사소한 감각에 시작해서 자신의 가족사를 살피고 예상 할 수 없는 풍경으로 성큼 나간다. 지나왔던 자신을 쓰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자신은 모두 알고 있었겠지만, 이것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되었던 예전의 감각 또한 많을 것 같다. 길고 가난했던 성적 충동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이렇게 자세하게...당시에 지배적이었을 분노·흥분 등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자신이 어떻게 들볶였는지, 어떻게 굴복했는지 부풀리거나 은폐하지 않고 서술한다. 위트마져 적는다. [당신은 끝날 줄 모르는 성적 흥분의 고통과 좌절 속에 살면서 1961년과 1962년 내내 매달 북미의 자위 기록을 갱신한다. 52] 그럴리 없겠지만 그랬다는 고백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발달하기 전에 폭발해 버린 본능에 대한 안타까움일까. 이제 할아버지에 가까운 그는 그것에 시달렸던 청소년기를 짖궃게, 그러나 아련한 시선으로 되돌아본다. 


몸-기억은 집-기억으로 변한다. 무려 55페이지에 이르는 21번의 이사 기록은 단순히 집을 옮겼던 기록으로 볼 수 없다. 소라게처럼 집을 쓰다가 벗는 것은 자신의 변화를 분명히 수반하기 때문이다. 집이 있던 지역, 당시의 상황, 같이 있던 사람이, 나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이 달라진다. 모두 자신이 살아왔지만 그것은 모두 다른 자신이기 때문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던 타인의 삶 21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집마다 창의 크기가 다르고 들어오는 햇빛의 각이 다르듯 절망의 조도 또한 다르다. 그가 살았던 16 번째 집을 보자. 예감하겠지만, 가장 절망스러운 집이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그 진입이 아무렇지 않다.

  

[이웃들 전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더치스 카운티의 이웃들에 대해 제일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그 집에서 일어난 비극들이었다. 예를 들면 다발성 경화증으로 쓰러진 스물여덟 살 여인, 스물다섯 살 딸이 지난해 암으로 죽어서 슬픔에 잠긴 중년 부부, 술로만 연명하다가 뼈와 가죽만 남은 부인과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다정한 남편, 그 집들의 잠긴 문과 내려진 커튼 뒤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들이 있었고 물론 당신의 집도 그중 하나였다.99] 

 

 잠긴 문과 내려진 커튼 뒤에 너무나 많은 고통, 그리고 그것에 도착하는 곳이 마침내 폴 오스터 자신이라는 서술은 절망이 귀하고 유별난 것이 아니라 흔하고 별스럽지 않은 것임의 증명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껏 겪어 본 세월 중에서 의문의 여지없이 가장 절망적인 세월이었다. 99]라고 절망의 크기를 열심히 그려내면서(그의 첫 번째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는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겪은 절망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를 또 열심히 적는다. 절망스러운 집을 관리했던 사람을 설명하는 구절을 보라. [이웃은 쿠바 태생의 명란한 여자로, 조용한 미국인 정비공과 결혼했고 유리로 된 코끼리(!?) 상을 수집했다. 100] 자기도 이런 자세한 설명이 겸연쩍었는지 코끼리 뒤에 (?!)부호를 적어 놓았다. 나는 코끼리(더욱이 유리로 된) 상을 수집했다는 이야기를 왜 적었을가 생각하다가 코끼리상으로 꾸며진 집을 생각하며 실풋 웃고 말았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절망 속에 적는 것은, 절망의 결에 한가롭게 흐르는 보통을 잊지 말라는 뜻일까. 어쩔 수 없이 절망하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웃게 되는 일을 기억하라는 것인지도. 주어 빈 자리에 굳이 '인생'이라고 쓰기엔 촌스러우니 그냥 비워놓기로 한다. 그렇게 21 번째 이사를 끝으로 작가는 현재에 도착한다. 내가 월세 15만원을 떠올리고 7 번째 이사에 도착한 것처럼, 누구나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오십페이지쯤은 갖고 있다는 귀띔인 것 같다. 


 <겨울일기>는 여러모로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떠오르게 한다. 필립 로스의 그것은 짧고 강렬하고, 손 쓸 틈이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지만 겨울일기는 작고 작은 이야기가 남겨둔 여백에 푹푹 빠져 나의 그때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보다 더 반성적이고, 보다 더 감상적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의 문장은 문득 마법이라서 책을 덮기까지 당신은 그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의식적으로 모든 사람이 되기로, 가장 완전하고 자유롭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안의 모든 이를 포용하기로 했다. 당신이 누구인가는 미스터리고 그 미스터리는 영영 풀릴 가망이 없으니까. 128] 내가 풀릴 가망이 없는 미스터리였다니.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지만...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지? 큰 비밀은 대체로 허탈한 것일까. 귀마개를 고르면서 아랫집 돼지꼬마가 학교에 갈 날을 생각한다. 그 꼬마는 조금도 기다리지 않을 개학날을 내가 대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관도 없었던 아랫집 고등학생의 방학을 셈하게 될 줄이야. 앞으로는 또 얼마나 동떨어진 일들을 마주하게 될까. 


이쯤에서 폴 오스터의 말을 살짝 고쳐도 좋을 것 같다. '당신, 풀린다면 이상한 미스터리.' 그래서 우리가 일기장에 삶의 비밀 같은 것을 아무리 풀어 놓아도, <겨울일기>처럼 대대적으로 들킨대도 걱정할 일 없다. 결코 당신이 누구인가는 밝혀 지지 않으니까. 당신의 내일은 분명히 오늘보다 더 미스터리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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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읽기-논문을 잡지처 '보고읽기


글항아리-아케이드 프로젝트 001, 002, 계속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


오늘날 인문학 출판사들은 갈수록 어려운 글을 기피하는 대중과 양질의 인문서를 집필할 시간이 없는 저자들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고 흥미롭게 파헤치는 책은 내기 힘들어지고,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관점의 글을 단순하게 묶어서 낼 수밖에 없는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학술 출판에 대한 대중의 외면과 출판인들 스스로의 자괴감은 깊어지고 있다. 국내 대부분의 인문학 출판사들은 국내 저자들의 저서를 통해 존립할 수 있는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는 번역서에 대한 심화된 의존과 몇몇 유명 저자에 대한 쏠림 현장을 빚고 있다. 


(…)






논문은 드물다

그것의 유통은 어떤 학회지에 한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반적인 독자를 영영 갖지 못할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그것은 탄생하는 시간이 터무니 없이 많이 드는 것 중에 하나다. 드물게 쓰이며, 그만큼 드물게 읽힌다. 논문에 쓰인 글자만큼 비싼 글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년월일처럼 이름, 제목, 년도로 표시되는 표tag를 갖는다. 태그로 이곳저곳 많이 불리는 것이 논문의 1차적인 목표다. 쓰는 사람들은 한 편에 그쳐서는 안된다. 모아야 책이 되기 때문이고 그래야 누구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 편을 쓸 수 있는 용자 누구던가?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논문을 쓸 수 있는 연구자와 일단 논문을 지금 현상할 수 있는 연구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쨌든 쓸 수 있는 (상황의)사람만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열 개가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지 못하면 한 개의 논문은 다른 논문의 꼬리표로 살기 쉽다. 내용이 아니라 제목만 게 된다. 최종에는 개수로 남는다. 누구, 몇 편 썼더라. 내용은? 모른다. 


가시의 탄생

이 무쓸모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대중은 더이상 어려운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편집부의 말에서처럼 '양질의 인문서를 집필할 시간이 없는 저자들'의 처지와 같다. 읽을 시간이 없다. 시간을 내서, 어려운 책을 읽고, 그것을 음미해서 지知의 기쁨이나 새로운 창을 내는 즐거움을 가질 여유가 없다. 가시적인 계발(어학, 컴퓨터, 그 밖에 넘처나는 자격증)을 하기도 바쁜데 알아주지도 않는 '영혼'의 걸음을 위해 책을 읽고 머리를 싸매라니, 가시가 가득 핀 이유다. 가시는 아름다움을 (지키기)위해서 만들어졌으나, 이제는 아름다움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 장미가 피는 것은 한 철이지만 가시는 일년을 난다. 가시는 잠재적인 장미를 현상하고, 사회는 가시의 날카로움을 사랑한다. 가시를 보고 꽃이라고 말하고 장미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니 장미가 필 시간이 어디있겠나. 하루빨리 가시를 더 돋아야지. 때 맞춰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있다.


논문을 잡지

 나 자신은 도덕적 의무

 면제와 책임 회피,



 즉 처음부터 나의 

책임은 아니었다고 

자위한다.

 주창윤,『허기사회』, 47쪽. (실제 있는 페이지입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가 이 페이지를 편 채로 졸고 있다. 눈이 안 갈 수 없어서 누구라도 한 번씩 읽어보고 기분이 나쁘다. 글항아리는 기분 나쁘라고 이런 페이지를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논문을 잡지처럼 만들었다. 눈이 가기 쉽다고 논문 읽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 풀어쓴 생각은 색보다 깊이 들어온다. 이 똑똑하고 쉬운 논문들은 한 번 들어오면 머릿속에서 좀처럼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책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책을 만든 것에 대한 리뷰이다. 논문을 풀어 써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일단 두께가 얇고, 감각적인 컬러로 눈을 붙잡고, 시작이 부담없고, 읽으면서 모르는 것은 짚어준다. 게다가 중간중간 잠을 쫓는 페이지까지 마련되어 있다(위에서 소개한 페이지). 이것은 발굴이 문제다. 논문은 수두룩하다. 눈 밝은 이가 '어머, 이건 읽혀야 해'하는 논문을 모은다. 튼실하지만 젠체 않는 날렵한 책으로 만든다. 느려터진 시의 외양(가격과 두께)과 잡지의 감각(컬러)을 입혔다. 그곳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함께 모이기 좋은 공터다. 광장이다. 가볼만한 카페나 새로 나온 책, 오늘의 잇 아이템이 아니라, 그곳에서 세기말이나, 울음이나, 죽음을 혼자 읽지 말고 모이자. 나가는 문은 '시'다. 『허기사회』는 마지막에 지독히도 아름다운 대안으로 '눈부처'를 호명한다. 저자는 알고 있던 것이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결국 '시'라는 것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시대에 모든 상황은 상호존중이 아니라 상호배제이며,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만 집착하는 즉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논리만이 지배한다. 눈부처 주체는 불의와 세계의 부조리에 저항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면서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니 허기사회에서 눈부처 주체만큼 지독히도 아름다운 대안은 없을 것이다. 102쪽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정호승, 「눈부처」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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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numsa님의 "[서평단 모집] 오쿠다 히데오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서평단 모집 "

'연대적인 함구' 비단 학교내 이지메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섬마을 노예로 충격을 주었던 우리의 사건도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침묵의 거리에서 침묵으로 스며드는 사람들, 남쪽으로 튀어에서 보여주었던 작가의 시선은 결국 '사람' 내가 단 하나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느냐,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어쩌면 고전-적인 이야기가 된 이지메-문제를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까, 새로운 눈을 기대합니다. 


 *참, 서평 기간이 잘못 기재된 것 같습니다. 
서평 기간: 2014.02.27~2014.03.02 (10일간) 날짜가 오타난 것이라 믿습니다. 27일부터 10일간이 맞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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