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제비를 뽑듯 우연에 맡기고 책을 펼쳐 눈에 들어오는 페이지를 읽는데, 바로 그것이 흥미로운 거요. 210

직장인들이 일년 평균 10권 미만의 책을 읽어 한 달에 1권도 읽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책을 오죽이나 안사겠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출판 시장 악화'가 자연히 떠올랐다. 그러나 책을 한 달에 스무권 이상 산다고 해도, 스무권을 '읽었다'는 정의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것이다.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읽었다'이후 마침표에는, 험난한 과정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서는 애초에 숫자가 문제인 것이 아니어서 읽거나 산 책의 수량을 세기 전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독서가 한편으로 수량의 문제인지도 다시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읽느냐'는 물음이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 이 물음은 대답하기 곤란한데 수의 많고 적음이 부끄럽거나 남사스러워서가 아니라 '읽었다'는 주관을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읽었다는 뜻이 뭐요? 나부터도 매달 산 책을 '산책'했다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언제나 불충분한 기록이라는 생각이다. 매달 10권이나 13권처럼 똑 떨어지게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틀린 기록에 가깝다는 생각. 정확한 수치가 필요하다면, 나는 이번달 65권을 47/190쯤 읽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삼천포지만 우리가 책을 읽었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표현 중에 못 읽었어/다 읽었어 이외에 '더 읽었어'라는 말은 왜 없는 걸까. 나는 맹랑하게도『밤에 쓰는 편지』라는 시집을 89/23쯤 읽은 것 같다. 그 책이 갖고 있는 텍스트보다 약 세배 이상으로 읽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시집을 더 이상 읽지 않아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농도가 진해진다고 여긴다. 이런 느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나는 시집의 제목을 말하는 순간부터 울컥해서, 조용히 수그러지고 싶다. 오금이나 복숭아뼈, 등 같은 신체의 부분들이 저마다의 행동을 취하려고 한다. 오금은 접히겠다고 한다. 복숭아뼈는 복숭아 뼈를 보고 싶어하고, 등은 갑자기 하늘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그것들이 책을 읽어낸 것 같은. 

삼천포에서 돌아오자. 그것은 아마도 책을 '다 읽었다'는 층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다 읽음'은 물리적인 실체인 책에 쓰인 문자를 다 살폈다는 뜻이겠지만, 이 단정이 가져오는 수많은 상황을 예측하지 않는다. 그 중에 하나, 위에서 보았듯이 더 읽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읽기 전과 차이가 없는 경우-책이 여전히 모르는 것으로 남는 상황-는 묻지 않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 읽었던참을 수 없는 가우쵸』는 문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다 읽었지만, 그 책이 말하는 의도를 이해하려면 약 20권에서 30권에 이르는 라틴문화권의 책을 더 읽어야 했다. 그러니까 한 권을 읽었는데 오히려 스무권에서 서른권이 모자란 것이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 이것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말하듯 이 책이 갖고 있는 도서관과, 내가 갖고 있는 내면의 도서관의 책이 대부분(절망적이지만 한권조차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이 책에 대해 리뷰를 썼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책-읽기를 창조해(?)낸 까닭에 있다.

사실 우리는 그 도서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우리를 만들어온, 그래서 이제는 고통 없이는 우리와 분리될 수 없게 된 축적된 그 책들의 앙상블은 바로 우리라는 존재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마틴스가 자신의 우상이 쓴 소설들에 대한 비판을 참기 힘들어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간직한 내면 도서관의 책들을 험담하는 말들,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된 것들을 비난하는 말들은 때때로 우리의 존재 깊은 곳까지 상처를 준다. 108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면 『참을 수 없는 가우초』와 내가 갖고 있는 내면의 도서관에 겹치는 책이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 어떤 문장들은 내게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문학+병=병"이라는 수상한 수식으로부터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들, 그가 놀라운 이야기를 꺼낼 때 그와 너무나 다른곳에서 듣는 나의 위치들. 독서는 정해진 텍스트를 읽는(원래의 텍스트를 가감할 수 없는) 수동적인 행동이지만, 그것을 리뷰하는 것은 원래의 텍스트를 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쓸 수'도 있는 매우 능동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과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어떻게 말해줄까, 궁금하겠지만 그런건 없다. 저자는 그럴듯한 소제목들을 내세워(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등등) 비법을 속삭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책을 잘 읽는 법"에 대해 역설한다. 그렇다면 책을 잘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소제목을 빌려 이야기 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이라고 하더니 그 다음에는 (책을 꾸며낼 것)이라고 하고는 마지막에서 (자기 얘기를 할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책을 읽었는데, 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서의 패러독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길이 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저 통과만 하고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각가의 책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훌륭한 독자, 그런 독자에게 책들에 멈추지 않는 지혜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그런 '책 가로지르기'를 행할 것이다. 229 

이 책은 독서의 대상인 '책'이 아닌 것처럼 거리를 두는 듯 하지만 이 역시 책이라는 사실. 나는 '책을 가로질러' 곧바로 저자의 얼굴에 닿는다. 독서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저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가깝게 만나고 있다. 밤늦게까지 부시시한 얼굴에서도. 계란토스트 냄새를 풍기면서도. 다른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썼음에도 읽는 기쁨을 준다. 못난 글씨의 제목과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는 모두 함정이었다. 말랑말랑한 표지를 열면 종잡을 수 없는 사방이다. 떨어지는 금박지, 만화경의 안에 들어온 듯 무수한 각을 가졌다. 아까 마주했던 문장을 다시 만나도 새롭게 반짝인다. 



+[여름언덕]이라는 출판사가 궁금하다. 서지사항에는 그런게 왜 중요하냐는 듯 편낸이는 물론이거니와 편집자조차 써 있지 않다. 다행히 그들의 주소와 번호가 있어서 유령회사는 아니라는 안심을 주긴한다. 
이 출판사에서 피에르 바야르의 저작을 여러권냈다. 모두 읽고 싶다. 번역도 좋고, 편집도 잘 되어서 읽기 좋았다. 여름언덕은 실체를 드러내라. 어떤 책을 만들고 있는지 찾을 수 없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목록을 조회하고 있는 독자의 무심한 표정을 읽어주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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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25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야르 책 다 읽어볼 만합니다. 정말 흥미쥔쥔하죠.
홈즈가 틀렸다, 는 정말 걸작입니다. 무릎을 탁 하치 아 하게 됩니다.
햄릿과 로저 애크로이드'도 정말 재미있어요. 확실히 탁월한 감각이 있는 분입니다.
반면 예상표절은 약간 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여튼 저도 이 양반 책이 좋아서 다 읽어보았습니다. 재미있어요.

봄밤 2014-02-25 12:55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글쓰기에요. 곰발님의 추천까지 완전하네요!
정신분석가여서 그런지 문장이 마음 깊숙히 들어와요.
저는 제목만 보고 예상표절을 먼저 읽고 싶었는데 말씀 고맙습니다. ㅎㅎ
홈즈가 틀렸다, 부터 찾아야겠어요. 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