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inumsa님의 "[민음사] 신간 "청춘 파산" 서평단 모집!"

제목을 보고 '급기야.' 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나왔습니다. '파산'이라는 단어가 '청춘'뒤에 붙는 형국. 이제 이상할 것은 없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을 건강하게 빠져나가고 싶어 '다음'을 벌써 두리번 거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생경한 이름의 신춘문예, 한 작가의 책이 묶여져 나오는 것을 '응원' 하고 싶어 신청합니다. 잘 읽어낼 수 있는 보통의 2030십대 독자 여기 있습니다. 서평단을 내준 민음사에게도 고맙습니다. '청춘' 그 자체가 파산된 것일지도 모르는 중의, 무겁게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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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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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봉책-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그는 말수가 적었다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투명한 눈망울이나 의미 없는 고개짓, 그늘진 등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일이 어리석다고도 했다그래서 말이 많은 곳에서는 그를 찾기 어려웠다시끄러운 곳에는 사람이 많았고그들은 대개 없어진 무엇을 찾느라 분주했다없어진 것에 대한 관심이 끊길 때 비로소 그는 옷깃을 털며 오후를 걸었다.


-진실이 산책하는 법



 


진실이란 말수가 없어서 거짓말 할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다구로프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사랑이 진실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들은 거짓말 할 가능성을 만들지 않는다. <그녀를 만나러 가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아마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272> 둘만의 만남둘만의 시간둘만이 기억하는 곳. <지금 기온이 3도인데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271> 라고 구로프가 말하는 것은 실은 ''을 빌려 딸에게 '나는 이곳에 있지만 실은 다른곳에 있단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다정하면서 명쾌하다길 걷는 사람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과그 구름에서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전혀 다르니까구로프와 안나가 비밀스럽게 만나는 곳에서도 사람들을 분명히 만나지만,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구로프와 안나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과 같다땅에 있는 우리는 이곳에 눈이 내리거나 내린다고 해도 하늘의 일은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지금 기온이 3도가 아니라 30도라고 해도 하늘 꼭대기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흔하고 뻔한 불륜에 진실의 장관설을 늘어놓는 것은우리가 지치는 일은 대게 진실을 보호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실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짐으로써 이해하는 것이다말해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비로소 '진실'할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말을 할 가능성을 갖는다진실조차도. 그래서 위태로운 삶이다. 구로프가 자신의 비밀을 정당화 하면서 다른이들 역시 자신처럼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각자 개인의 생활은 비밀 속에서 유지되며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이유 때문에 교양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예민하게 사생활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도 몰랐다. 272

 

구로프는 안나와 바닷소리가 평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평온 자체'일 것으로 보이는 바다에 빠지지는 않는다. 위험하기 때문에. 구로프는 바닷소리에서 영원에 대한 '비밀'을 감지하지만, 바다와 거리를 좁히지는 않는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매미들이 울고 있었다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영원한 잠평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렇게 아래에서는 바닷소리가이곳에 아직 얄따도 오레안다도 없었던 때에도 울렸고지금도 울리고 있고우리가 없어진 후에도 똑같이 무심하고 공허하게 울릴 것이다어쩌면 바로 이 변화 없음에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지상의 끊임없는 삶의 움직임에 관한완성을 향한 부단한 움직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262


안나와 헤어진 구로프는 돌아와 저녁을 먹어야 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해야했다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다그곳에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는 듯이 모두 열중한다그리고는 구로프에게 장소와 시간에 어울리는 말을 끊임없이 요구한다이렇게. <조금 전 당신이 한 말이 옳았소그 철갑상어는 냄새가 아주 고약했어.> 머리 속에는 온통 안나와안나를 만났던 바닷가 생각 뿐이지만, 그는 중요하지도 않은 '당신'에게 비유 맞추는 말을 짜내고 있다유연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대화가 동시에 원하는 세계에 갈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운다스스로에게 구로프는 환멸을 느낀다. 그때 들었던 바닷소리에 삶의 비밀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곳을 떠나온 자신이 지겨운 것이다.


평소에 하던 이 평범한 말이 어쩐지 갑자기 구로프를 짜증나게 했다이 말이 모욕적이고 불결하게 여겨졌다얼마나 야만적인 습관들이며 야만적인 사람들인가정말 의미 없는 매일 밤이고흥미도 가치도 없는 나날들이다미친 듯한 카드놀이,폭식폭음끝없이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쓸데없는 일과 시시한 대화로 좋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도 결국 남는 것은 꼬리도 날개도 잘린 삶실없는 농담뿐이다정신 병원이나 감옥에 갇힌 듯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266

 

구로프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만나는 것은 '이곳'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자신에 대한 환멸을 거두고, 거추장스럽게 자신을 말해줬던 구로프를 떠나고 싶다. 그렇다면 삶의 '비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자신이 모르는 구로프를 찾아 떠나는 여행, 오랫동안 '안나'로 불행했던 안나 역시 주저하지만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벗어남은 불안정해 보인다. '공개된 나'를 버릴 수 있을까? 평온을 이야기 하는 바다를 듣는 것. 그리고 평온 자체인 것만 같은 바다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알려진 나를 두고 오는 것은 감수하기 어려운 위험이다. 용기있게 내던졌다고 하자. 이중의 삶 하나를 버린다고 해도, 나는 다시 '나'와, '좀더 나'인 것으로 분리해 나갈 것이다. 삶이 온통 진실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나는 언제나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당하다. 안전한 곳으로 나를 피신하는 동안 다른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진실하다.


추측이 난무하지만 소설은 끝났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페이지에는 없지만 저들은 우선 옷을 가볍게 하는 것 같다. 질주 하려는데 3피스 정장과 모자바닥에 끌리는 치마와 양산은 필요 없으니까.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와 어울리는 옷을 입고. 그곳에 도착하면 미봉책이나마, 진실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깊게 입맞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의 거짓과, 그 거짓들의 틈에 끼여있는 진실로써 숨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적한 바닷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 개 이름을 물어보고싶다. 진실은 궁금하지 않다. '공개된 나'의 가벼움에 조소를 거두고 오늘은 이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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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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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과 무관하게-침묵의 거리에서




1제곱은 선이고 2제곱은 사각형, 3제곱은 입방체를 의미한다. 
이보다 더 큰 지수를 도형으로 시각화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자연은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 지롤라모 카르다노가 지수에 관하여 남긴 말*



그러나 허락되었건 금지되었건 간에, 4 제곱(제곱의 제곱)과 6 제곱(세제곱의 제곱)은 존재가 인정되었다카르다노 역시 5차, 7차 등의 거듭제곱을 다루면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고차원 거듭제곱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기하학적인 해설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과 사각형, 입방체로 대응되는 3제곱 이상의 것은 머리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 고차원 거듭제곱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쾌하게 알리는 수학의 목소리다.  

책 『침묵의 거리에서』의 '어떤 죽음'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말한다. 학교와 집, 친구와 가족이 세계의 전부처럼 보여 죽음의 인과 또한 그처럼 간단해 보이는 중학생의 죽음이라도 말이다. 중고등 학생의 사고 뉴스를 보면서 시기를 지나온 어른들은 그들의 죽음을 쉽게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왔기 때문에 이 짐작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쉽사리 이해할 수도, 이유에 닿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작가의 말에 쓰고 있듯 이것은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 왕따'가 소재다.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를 이보다 다면적이고 치밀하게 추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은 아이의 죽음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지역'을 통찰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한 페이지를 넘어가지 않는 평범한 서술이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리한다.

농협 시설도 일류 기업 못지않았다. 옛날부터 지연이며 혈연이 강세인 지역이고 사찰이 큰 영향력을 가진 까닭에, 전통 있는 단가는 마을 유지로써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곤 했다. 농협과 절, 그리고 보수 정치.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지방의 풍경이다. 공무원 채용도 공정하게 이루어진 전례가 없었다. 선거법 위반도 늘 있는 일이었다. 1/27
대부분 자영업에 종사하던 시민들은 월급 생활자가 되었으며 외국인 노동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지역 분위기에도 변화가 생겨, 전체주의적인 풍조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가을 축제 보조금은 벌써 5년 연속 최저액을 경신했다. (...)늦은 밤 편의점 앞에서 중학생들이 담배를 피워 대도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이 변화 또한 전형적인 지방 풍경이었다. 1/28

작은 지방에서 일어난 중학생 죽음을 수사하는데 지역이 어떠한지 원거리에서 바라본다. 중학교가 작아서 4반 밖에 없고 근방 2개의 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이 그대로 진학하는 것,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과 이것을 수사하러 온 형사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점 등은 마을이 얼마나 집약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알린다. 이곳에서의 관계는 부모에게서 아이로 소개될 뿐만 아니라 아이와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 된다는 흰트를 얻는다. 게다가 죽은 아이의 부모가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포목상을 운영한다는 설정까지. 피해자 부모는 아이의 죽음 이후 학교를 압박한다.  

밑그림을 그린 후, 사방에서 아이의 죽음을 설명하고자 서로 다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죽음을 조사하고, 밝히고, 정리하려는 이는 모두 다른 '위치'에서 온다. 모두들 '정의'롭고 싶다. 정의가 유일무이한 것이라면 죽음이 일어난 곳엔 그 연유를 밝히는 것이 단 하나의 정의여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 나오는 이들을 자신의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른 바람을 갖고 있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상황에 따라 '다른 정의'를 내걸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죽음(사건)도 본질에 닿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1. 담임 선생님은 아이의 죽음이 '사고'이기를 바란다. 죽은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남은 아이들이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우선하는 것이다. 는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표면적이다. 조금더 들어가 보면 이 사고가 사건으로 기록되었을 때 그 무게가 감당 되지 않는 것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2. 가해자-로서 조사를 받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사건과 자신의 아이를 분리한다. '상해했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거기까지'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가 내몰았을지 모르는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경찰을 '위험'으로 규정한다. 그곳에서 '보호'하려고 한다. 파렴치한가? 그렇다면 이들의 정의가 틀렸다고 할것인가? 명확한 증명이 있을때까지 이들에게 정의는 이것 하나뿐이다. 부모들은 아이를 구출해내는데 촉각을 내세운다. 이 촉각이 두드러질수록 애도가 옅어진다. 자신의 아이의 친구가 죽었는데도, 슬픔은 마음에 미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죽은 아이는 물론, 자신의 아이가 가해자로 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회사일이 먼저인 남편이 그려지는 것이 인상적이다. 가족이 더이상 끈끈하며 하나의 목적과 사랑을 갖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 남편은 자신으로서의 삶이 먼저다. 

[남편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져 갔다. 시게유키는 이번 일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니구라 가족에 대한 대만 해도 그랬다. 아버지라면 아이가 돌아오자마자 그 집을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겐타와 함께 고개
를 숙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어째서 가족을 지키려 하지 않는 거지. 1/355

3. 그런가 하면 경찰들은 그날 지붕 위에 나 있던 발자국, 그 아이들에게만 집중한다. 죽은 아이가 가졌을 관계의 가지수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 아이들을 구속 수사하는 것은, 이들로 한정하기 때문에 이미 실패라는 조짐이다. 아이들의 발자국이 지붕에 나 있었다. 그리고 죽은 아이는 이들에게 괴롭힘 받은 상해흔이 몸에 있다. 아이는 그곳에서 추락사했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이렇게 명확한 죽음이라니 말이다. 정황이 뚜렷한 죽음 앞에서 경찰에게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찰에게 중학생은 우선 거짓말을 쉽게 해서 수사를 어렵게 하는 대상이다. 이들이 혹여라도 느낄 '죄책감'을 알지 못하며 '영웅심리'같은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4. 이것을 취재하는 기자는 사건을 쓰지만 '쓴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감추지 않는다. 난처하게도 자신이 취재한 것이 1면에 실린다는 흥분도 있다. 자신의 기사가 무엇을 더 환기할 수 있을지, 그것이 정의에 가까운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기사화가 된다. 그러나 사건의 '알림'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는 '죽음의 정의'가 아니라 그녀가 '바라보는 정의'가 깃들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선의 '정의'에 혼동하기 쉽다. 나의 가치 역시,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책의 전반적인 목표라면, 책의 백미白眉 학생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미묘한 세계를 자세하게 써내려 가는점이다. 가해자-피해자가 쌍방의 관계에서만 불리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피해자(죽은 아이)는 가해자로 불리는 아이에게서는 피해자로 불렸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을 내버려둔 가해자로, 또한 피해자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보다 더 어리고 허약한 아이를 괴롭힌 것도 중요하다. 아이는 또래 세계의 룰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쉽게 저버리면서 어른을 끌고 들어온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에게서 따돌려졌던 '캠프에서 일'은 그것을 고자질한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선생님은 아이들만의 세계를 모르는척 눈감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 했다. 자신이 정말 슬프다며 훈계하는 장면은 막막하다. 슬프도록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정말 슬프다. 왜 아무도 규칙을 어기는 걸 말리지 않았지? 왜 아무도 선생님에게 알려 주지 않았지?" 아무도 안 할 게 당연하잖아. 도모미는 마음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러면 선생들은 자기가 중학생일 때 어른들에게 고자질을 했다는 거야? 만일 그렇다면 정말 왕재수 아냐. 중학교 다닐 때 일은 벌써 잊어버린 거냐고. 2/168]
선생은 슬픈 훈계로 아이들만의 세계를 쉽게 무너뜨리고, 아이를 일방적으로 비밀을 발설한 배신자로 만들어버렸다. 이 밖에 죽은 아이가 외동이었으며, 부자인 까닭에 또래보다 원하는 것을 쉽게 가질 수 있었고 그것으로 환심을 사려고 했거나 권력으로 이용(되었던)했던 장면이 세세히 적힌다. 죽음의 무게에 짓눌려 그저 '불쌍한 아이'로 단정짓는 것을 피한다. 그 아이가 살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죽음의 연유를 밝히는 것만큼이나 그 아이가 살아있을 때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일본에 리갈하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법정드라마를 표방하며 사회의 폐부를 유쾌하게 비트는데, 스페셜로 다뤘던 테마가 중학생 이지메 사건이었다. 겉으로는 유쾌한 드라마여야 하기 때문에 아이는 건물에서 떨어져 다친 것으로 설정된다. 아이가 다쳤다는 점을 빼면 놀라울정도로 책의 시선과 비슷하다. 책에서처럼 왕따문제를 깊게 다루지 못했지만 거의 같은 부분을 노려보았다. 이곳에서는 우선 교사가 이지메를 알았느냐에 최대 중점을 둔다. 그렇다면 가해자로 지목되는 아이들보다 학교에 책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중학생 이지메 사건을 말하면서 학교의 은폐, 내부고발, 가해자로 지목된 불량해 보이고(덩치 큰) 아이는 과연 리더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괴롭히는 아이의 리더를 찾는 것은 매우 부질없는 짓이다. 중학생 아이들은 '혼자라는 선택지가 없어. 중학생이란 생물은 연못 속의 물고기 같은 존재라, 모두 같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60)

다친 아이의 배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배금주의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후, 놀라운 말을 듣는다괴롭힘을 당했던 것도 맞고, 왕따였던 것도 맞았으나, 건물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다쳤던 아이 자신이 직접했다는 . 괴롭혔던 아이들의 성화를 진실이라고 밝혀내 수사가 끝났으나, -다친 아이는 전학을 가고, 배상 받은 돈으로 가난한 집을 이사한다- 그럼에도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진실이었다. 5제곱근과 7제곱근이 자연의 허락과는 무관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진실이 있는 장소는 그려지지(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침묵의 거리>에서도 이와 비슷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 책을 덮고 취할 수 있는 포즈는 '허탈'이 아니다. 밝혀지고 '있다는' 모든 사건에 거대한 상상 불러오는 것. 상상력을 (이미)허락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허락과는 무관하게, 형체로 현 수 없는 '사람'과 '사회'의 문제가 있다. 우리에겐 그것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언제나 조금 더 필요하다.   



*, **배리 마주르, 『허수(시인의 마음으로 들여다본 수학적 상상의 세계)』, 승산, 2008.

***연기파 국민배우 사카이 마사토 주연. 일본 후지TV 

: 1/12 = 1권 1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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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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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비를 뽑듯 우연에 맡기고 책을 펼쳐 눈에 들어오는 페이지를 읽는데, 바로 그것이 흥미로운 거요. 210

직장인들이 일년 평균 10권 미만의 책을 읽어 한 달에 1권도 읽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책을 오죽이나 안사겠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출판 시장 악화'가 자연히 떠올랐다. 그러나 책을 한 달에 스무권 이상 산다고 해도, 스무권을 '읽었다'는 정의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것이다.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읽었다'이후 마침표에는, 험난한 과정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서는 애초에 숫자가 문제인 것이 아니어서 읽거나 산 책의 수량을 세기 전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독서가 한편으로 수량의 문제인지도 다시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읽느냐'는 물음이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 이 물음은 대답하기 곤란한데 수의 많고 적음이 부끄럽거나 남사스러워서가 아니라 '읽었다'는 주관을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읽었다는 뜻이 뭐요? 나부터도 매달 산 책을 '산책'했다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언제나 불충분한 기록이라는 생각이다. 매달 10권이나 13권처럼 똑 떨어지게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틀린 기록에 가깝다는 생각. 정확한 수치가 필요하다면, 나는 이번달 65권을 47/190쯤 읽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삼천포지만 우리가 책을 읽었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표현 중에 못 읽었어/다 읽었어 이외에 '더 읽었어'라는 말은 왜 없는 걸까. 나는 맹랑하게도『밤에 쓰는 편지』라는 시집을 89/23쯤 읽은 것 같다. 그 책이 갖고 있는 텍스트보다 약 세배 이상으로 읽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시집을 더 이상 읽지 않아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농도가 진해진다고 여긴다. 이런 느낌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나는 시집의 제목을 말하는 순간부터 울컥해서, 조용히 수그러지고 싶다. 오금이나 복숭아뼈, 등 같은 신체의 부분들이 저마다의 행동을 취하려고 한다. 오금은 접히겠다고 한다. 복숭아뼈는 복숭아 뼈를 보고 싶어하고, 등은 갑자기 하늘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그것들이 책을 읽어낸 것 같은. 

삼천포에서 돌아오자. 그것은 아마도 책을 '다 읽었다'는 층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다 읽음'은 물리적인 실체인 책에 쓰인 문자를 다 살폈다는 뜻이겠지만, 이 단정이 가져오는 수많은 상황을 예측하지 않는다. 그 중에 하나, 위에서 보았듯이 더 읽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읽기 전과 차이가 없는 경우-책이 여전히 모르는 것으로 남는 상황-는 묻지 않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 읽었던참을 수 없는 가우쵸』는 문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다 읽었지만, 그 책이 말하는 의도를 이해하려면 약 20권에서 30권에 이르는 라틴문화권의 책을 더 읽어야 했다. 그러니까 한 권을 읽었는데 오히려 스무권에서 서른권이 모자란 것이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 이것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말하듯 이 책이 갖고 있는 도서관과, 내가 갖고 있는 내면의 도서관의 책이 대부분(절망적이지만 한권조차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이 책에 대해 리뷰를 썼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책-읽기를 창조해(?)낸 까닭에 있다.

사실 우리는 그 도서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우리를 만들어온, 그래서 이제는 고통 없이는 우리와 분리될 수 없게 된 축적된 그 책들의 앙상블은 바로 우리라는 존재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마틴스가 자신의 우상이 쓴 소설들에 대한 비판을 참기 힘들어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간직한 내면 도서관의 책들을 험담하는 말들,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된 것들을 비난하는 말들은 때때로 우리의 존재 깊은 곳까지 상처를 준다. 108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면 『참을 수 없는 가우초』와 내가 갖고 있는 내면의 도서관에 겹치는 책이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장, 어떤 문장들은 내게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문학+병=병"이라는 수상한 수식으로부터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들, 그가 놀라운 이야기를 꺼낼 때 그와 너무나 다른곳에서 듣는 나의 위치들. 독서는 정해진 텍스트를 읽는(원래의 텍스트를 가감할 수 없는) 수동적인 행동이지만, 그것을 리뷰하는 것은 원래의 텍스트를 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쓸 수'도 있는 매우 능동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과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어떻게 말해줄까, 궁금하겠지만 그런건 없다. 저자는 그럴듯한 소제목들을 내세워(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등등) 비법을 속삭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책을 잘 읽는 법"에 대해 역설한다. 그렇다면 책을 잘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소제목을 빌려 이야기 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이라고 하더니 그 다음에는 (책을 꾸며낼 것)이라고 하고는 마지막에서 (자기 얘기를 할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책을 읽었는데, 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서의 패러독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길이 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저 통과만 하고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각가의 책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훌륭한 독자, 그런 독자에게 책들에 멈추지 않는 지혜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그런 '책 가로지르기'를 행할 것이다. 229 

이 책은 독서의 대상인 '책'이 아닌 것처럼 거리를 두는 듯 하지만 이 역시 책이라는 사실. 나는 '책을 가로질러' 곧바로 저자의 얼굴에 닿는다. 독서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저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가깝게 만나고 있다. 밤늦게까지 부시시한 얼굴에서도. 계란토스트 냄새를 풍기면서도. 다른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썼음에도 읽는 기쁨을 준다. 못난 글씨의 제목과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는 모두 함정이었다. 말랑말랑한 표지를 열면 종잡을 수 없는 사방이다. 떨어지는 금박지, 만화경의 안에 들어온 듯 무수한 각을 가졌다. 아까 마주했던 문장을 다시 만나도 새롭게 반짝인다. 



+[여름언덕]이라는 출판사가 궁금하다. 서지사항에는 그런게 왜 중요하냐는 듯 편낸이는 물론이거니와 편집자조차 써 있지 않다. 다행히 그들의 주소와 번호가 있어서 유령회사는 아니라는 안심을 주긴한다. 
이 출판사에서 피에르 바야르의 저작을 여러권냈다. 모두 읽고 싶다. 번역도 좋고, 편집도 잘 되어서 읽기 좋았다. 여름언덕은 실체를 드러내라. 어떤 책을 만들고 있는지 찾을 수 없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목록을 조회하고 있는 독자의 무심한 표정을 읽어주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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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25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야르 책 다 읽어볼 만합니다. 정말 흥미쥔쥔하죠.
홈즈가 틀렸다, 는 정말 걸작입니다. 무릎을 탁 하치 아 하게 됩니다.
햄릿과 로저 애크로이드'도 정말 재미있어요. 확실히 탁월한 감각이 있는 분입니다.
반면 예상표절은 약간 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여튼 저도 이 양반 책이 좋아서 다 읽어보았습니다. 재미있어요.

봄밤 2014-02-25 12:55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글쓰기에요. 곰발님의 추천까지 완전하네요!
정신분석가여서 그런지 문장이 마음 깊숙히 들어와요.
저는 제목만 보고 예상표절을 먼저 읽고 싶었는데 말씀 고맙습니다. ㅎㅎ
홈즈가 틀렸다, 부터 찾아야겠어요. 오호!!
 
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팽 선생


국경은 수평으로 된 수직
 전혀- 라는 표현은 어떤 대상을 완전히 부정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것이 '이해'의 문제에 쓰여 무엇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때, 말 그대로 화자는 이해의 바깥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해 속에 (갇혀)있어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이해인지, 이해가 아닌지 스스로 살피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팽 선생을 읽고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1 무슨 소리일까, 이해를 전혀 못하겠어. 2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이해의 한 가운데이기 때문에 이해의 여부를 살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니까 나는 이해를 하고 있는지, 하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 4 수평으로 된 수직*을 걷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수평으로 된 수직'이 불가능한 것은 한 개의 차원에 한정지어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개 이상의 시공간을 한 번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물질적으로는 언제나 수평의 상태만 갖는다. 

다만 그곳에 있을 것
꿈과 현실도 그렇다. 물질적으로는 언제나 현실만 존재한다. 그러나 둘 사이 차분하게 유지되던 기울기가 어느날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어떨까. 꿈과 현실이 뒤섞인 팽 선생, 그곳은 구분 가능하지도, 가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곳에 섞여서 의식을 따라가는 것이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 어떤 사건이나 물체는 그 바깥에서야 형태가 파악 가능하지만 그것은 대상이 온전해서 시공간과 분리될 수 있을 때만 그렇다. 구분 불가능하게 섞여 있다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 조차 가능하지 않다. 그럴때는 다만 그곳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해일 것이다. 그러니 갸우뚱한 고개를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현실을 기울여 꾼 꿈
도통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책을 덮는 손 안쪽에 어제의 꿈과 엊그제 꿈이 지나가고 있다. 가능하기를 바랐던 사건 몇 개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을 차분하게 지워나간다. 어제 나는 무척이나 키득거리는 꿈을 꾸었고, 깨어나서도 웃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녹고 있는 강이나, 뒷모습을 감추며 돌아선 고양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 일 정도가 큰 웃음인 까닭이다. 그곳에 아무 상관도 없이 서늘한 뉴스가 내린다. 눈쌓인 지붕이 무너져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이 죽고, 간첩을 증명하기 위해 국가기관이 서류를 날조하는 신문을 가로질러 간다. 나는 아직 온전하다. 과연... 

볼라뇨 식의 표현을 따르자면 내가 이것을 이해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바예호는 팽선생이 필요하지 않았다. 팽 선생이 필요 했던 것은 팽 선생 뿐이다. 꿈 속의 한 사람을 갈라 현실에게 한 사람을 내주는 일. 그렇게 해서 이해는 고통을 피할 수 있었고 고통은 이해를 피할 수 있었다. 지난 밤에서 넘친 웃음이 나를 깨운다.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처음 입을 떼는 것처럼 입가가 건조하다. 현실을 기울여 꾼 꿈이다.



*나희덕의 시「국경의 기울기」에서

**나는 <딸꾹질의 본성>이라는 말을 했다. 아마 딸꾹질의 특성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딸꾹질은 근육의 수축일 뿐이며, 독특한 소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면서 간헐적이고 격렬한 호흡을 유발하는 횡경막의 돌발적인 움직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바예호 씨의 딸꾹질은 환자의 육체와는 완전히 별도로 전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가 딸꾹질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딸꾹질이 환자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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