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읽기-논문을 잡지처 '보고읽기


글항아리-아케이드 프로젝트 001, 002, 계속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


오늘날 인문학 출판사들은 갈수록 어려운 글을 기피하는 대중과 양질의 인문서를 집필할 시간이 없는 저자들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고 흥미롭게 파헤치는 책은 내기 힘들어지고,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관점의 글을 단순하게 묶어서 낼 수밖에 없는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학술 출판에 대한 대중의 외면과 출판인들 스스로의 자괴감은 깊어지고 있다. 국내 대부분의 인문학 출판사들은 국내 저자들의 저서를 통해 존립할 수 있는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는 번역서에 대한 심화된 의존과 몇몇 유명 저자에 대한 쏠림 현장을 빚고 있다. 


(…)






논문은 드물다

그것의 유통은 어떤 학회지에 한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반적인 독자를 영영 갖지 못할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그것은 탄생하는 시간이 터무니 없이 많이 드는 것 중에 하나다. 드물게 쓰이며, 그만큼 드물게 읽힌다. 논문에 쓰인 글자만큼 비싼 글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년월일처럼 이름, 제목, 년도로 표시되는 표tag를 갖는다. 태그로 이곳저곳 많이 불리는 것이 논문의 1차적인 목표다. 쓰는 사람들은 한 편에 그쳐서는 안된다. 모아야 책이 되기 때문이고 그래야 누구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 편을 쓸 수 있는 용자 누구던가?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논문을 쓸 수 있는 연구자와 일단 논문을 지금 현상할 수 있는 연구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쨌든 쓸 수 있는 (상황의)사람만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열 개가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지 못하면 한 개의 논문은 다른 논문의 꼬리표로 살기 쉽다. 내용이 아니라 제목만 게 된다. 최종에는 개수로 남는다. 누구, 몇 편 썼더라. 내용은? 모른다. 


가시의 탄생

이 무쓸모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대중은 더이상 어려운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편집부의 말에서처럼 '양질의 인문서를 집필할 시간이 없는 저자들'의 처지와 같다. 읽을 시간이 없다. 시간을 내서, 어려운 책을 읽고, 그것을 음미해서 지知의 기쁨이나 새로운 창을 내는 즐거움을 가질 여유가 없다. 가시적인 계발(어학, 컴퓨터, 그 밖에 넘처나는 자격증)을 하기도 바쁜데 알아주지도 않는 '영혼'의 걸음을 위해 책을 읽고 머리를 싸매라니, 가시가 가득 핀 이유다. 가시는 아름다움을 (지키기)위해서 만들어졌으나, 이제는 아름다움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 장미가 피는 것은 한 철이지만 가시는 일년을 난다. 가시는 잠재적인 장미를 현상하고, 사회는 가시의 날카로움을 사랑한다. 가시를 보고 꽃이라고 말하고 장미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니 장미가 필 시간이 어디있겠나. 하루빨리 가시를 더 돋아야지. 때 맞춰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있다.


논문을 잡지

 나 자신은 도덕적 의무

 면제와 책임 회피,



 즉 처음부터 나의 

책임은 아니었다고 

자위한다.

 주창윤,『허기사회』, 47쪽. (실제 있는 페이지입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가 이 페이지를 편 채로 졸고 있다. 눈이 안 갈 수 없어서 누구라도 한 번씩 읽어보고 기분이 나쁘다. 글항아리는 기분 나쁘라고 이런 페이지를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논문을 잡지처럼 만들었다. 눈이 가기 쉽다고 논문 읽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 풀어쓴 생각은 색보다 깊이 들어온다. 이 똑똑하고 쉬운 논문들은 한 번 들어오면 머릿속에서 좀처럼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책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책을 만든 것에 대한 리뷰이다. 논문을 풀어 써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일단 두께가 얇고, 감각적인 컬러로 눈을 붙잡고, 시작이 부담없고, 읽으면서 모르는 것은 짚어준다. 게다가 중간중간 잠을 쫓는 페이지까지 마련되어 있다(위에서 소개한 페이지). 이것은 발굴이 문제다. 논문은 수두룩하다. 눈 밝은 이가 '어머, 이건 읽혀야 해'하는 논문을 모은다. 튼실하지만 젠체 않는 날렵한 책으로 만든다. 느려터진 시의 외양(가격과 두께)과 잡지의 감각(컬러)을 입혔다. 그곳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함께 모이기 좋은 공터다. 광장이다. 가볼만한 카페나 새로 나온 책, 오늘의 잇 아이템이 아니라, 그곳에서 세기말이나, 울음이나, 죽음을 혼자 읽지 말고 모이자. 나가는 문은 '시'다. 『허기사회』는 마지막에 지독히도 아름다운 대안으로 '눈부처'를 호명한다. 저자는 알고 있던 것이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결국 '시'라는 것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시대에 모든 상황은 상호존중이 아니라 상호배제이며,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만 집착하는 즉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논리만이 지배한다. 눈부처 주체는 불의와 세계의 부조리에 저항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면서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니 허기사회에서 눈부처 주체만큼 지독히도 아름다운 대안은 없을 것이다. 102쪽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정호승, 「눈부처」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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