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inumsa님의 "[판미동]「숨만 쉬어도 셀프힐링」서평단 모집"

잠이 안오는 밤을 걱정하다가 우연히 판미동에 들렸습니다. 불면증에 대한 꼭지를 읽었어요. 잠이 안오는 이에게 그럴 땐 이렇게 해봐, 알려주곤 했지요. 이 꼭지들이 모여 책으로 나왔군요! ^^!
또 한 번 기쁘게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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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피터 판과 친구들 기린과숲 e시선
유형진 / 기린과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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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판과 친구들

 

'피터 판'에서 두 가지*를 떠올린다그것은 '피터 팬'의 심심한 변용일 수도 있고피터라는 이름의 판Pan이라는 가능성일 수 있겠다는 것피터 팬은 그 유명한 동화 속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요새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Pan은 목신산과 들에 살면서 가축을 지키고 춤과 음악을 좋아하며 명랑한 성격을 가졌다는 반인반수다첫 장을 넘기고 피터 판이 '피터 팬'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의 친구들이 그다지 매력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후문이다.) 피터 팬의 친구라면 팅커벨이라든가혹은 팅커벨이 아닐까그러나 피터 판의 꿈과 모험을 제일 먼저 맞는 이, <초록코털괴물>이었다그래서 피터 판은 판Pan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패닉'이라는 말이 판Pan에게서 유래한 사실을 아는지간혹 잠들어 있는 인간에게 악몽을 불어넣어서 그렇다고 한다뿔난 망아지처럼 초원을 뛰어다닐 피터 판의 '친구들'을 만나자그리고 잊지 말자우리가 만나야 하는 것은 바로 '피터 판'이라는 것을.

 

피터 판과 친구들이 떠날 곳이 <허니밀크랜드>라고 했을 때 [워터멜론 슈가]가 잠시 떠올랐지만, <초록코털괴물>과 <풍선머리조종사>와 <옷걸이요정>의 생김새를 떠올리느라 둘의 연관성을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다음에 또 읽으면서 [워터멜론 슈가]와 <허니밀크랜드>의 유사점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데 친구들 이름이 뭐라고요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급한 결론은, 우리가 가보지 못하는 세계는 저마다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 황홀하지만달콤하고 아름다운 만큼 현실의 추접스러움과 절망스러움을 동반한다는 것. <허니밀크랜드>도 다르지 않다. '흑탕물과 폐유가 뒤섞여 흐르는 여름날의 어떤 아스팔트에 서서 우리의 계약을 떠올립니다.'「피터 판과 친구들 프롤로그」 부분.

 

피터 판과 친구들이 '에피소드 12'까지 만들동안 피터 판은 등장하지 않는다그러나 피터 판의 친구라고 소개하는 이들이 피터 판의 분신이라면피터 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고 있는 셈이다짐작했겠지만. <초록코털괴물>과 <옷걸이요정>, 그리고 <풍선머리조종사>는 피터 판의 친구가 아니라 피터 판 '마음 속'에 사는 친구들이다이들은 각기 피터 판의 한 부분씩을 맡고 있다합치면 피터 판의 모습을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시도하지는 않겠다. 어떤 '윤리'라는 생각이다.

 

피터 판은 이렇다.

<초록코털괴물>처럼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행복하다그러나 <옷걸이요정>처럼 행복을 돈을 주지 않고 살 수 없다고 믿는다그래서 나의 다른 일부, <초록코털괴물>에게 늘 1700원씩의 행복을 산다.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마음이 가장 예쁘게 생긴 것 같은)<초록코털괴물>은 거울보기 좋아하는 <옷걸이요정>을 사랑한다그러나 <옷걸이요정>은 <초록코털괴물>의 1700원치 행복을 사랑할 뿐이다이 둘은 영원히 이뤄지지 않는다. <초록코털괴물>이 <옷걸이요정>을 사랑하면 할수록 <옷걸이요정>은 불안하다행복을 사지 못할까봐. 그러나 <초록코털괴물>은 짝사랑에 슬퍼하느라 행복해’, 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눈물로 다 흘려버린다둘은 다른 곳에서 살아야 맞는 것 같다그러나 한 마음 속에 틀어 있다피터 판의 마음속에는 <초록코털괴물>이 있는가 하면, <옷걸이요정>이 있기도 해서 심란함이 그치지 않는다그리고삼천 번 죽고도 살아있는 <풍선머리조종사>도 있는데, <풍선머리조종사>는 매일 죽고도 살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이 둘의 괴리를 벗어나고 싶다.


<풍선머리조종사>는 <초록코털괴물>을 무척 싫어한다싫어하는 이유는 나오지 않는데 나를 근거해서 추측해 보건데아마도 병신 같은 나를 싫어하는 이는 누구보다 나인 경우여서가 아닌가 한다행복하면서행복을 팔면서 <옷걸이요정>에게 눈물을 질질 짜는 <초록코털괴물>이 꼴도 보기 싫다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두통이 자주 오는 <풍선머리조종사>는 여행가기를 좋아한다조부모에게 물려받은 바람이 <1밀리바>씩 빠지는 풍선 머리를 치유하기 위해 떠도는 것이다직감하겠지만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다시 풍선으로 태어나지 않고서는그리고 풍선머리조종사가 계속 여행할 수 있는 것은매일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터 판의 친구들은 친절하게도 외양을 알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모습의 일부에만 집중해 부르느라 전체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이렇게 흔한 비유를 들고 싶지는 않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다. <초록코털괴물>이라는 이름은 초록코털은 쉽게 떠올일 수 있지만 초록코털이 있는 얼굴, 다리(?)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옷걸이요정>은 옷걸이의 모습 그대로다. 요정이라니 우드재질에 고급스런 마감을 갖으려나 상상할수도 있지만 우리집에는 그냥 세탁소에서 주는 흰색끈으로 감은 철사 옷걸이가 많으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옷걸이요정>을 생각하면 왜 행복을 돈으로 주고 사야 안심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어떤 옷이든지 입어 볼 수 있지만 모두 거울이 있는 옷장 속에서만 한정된다. 어떤 옷이든지 입을 수 있지만, 어느 것도 자신의 옷일 수는 없다. (게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은 그야말로 걸치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옷을 입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옷걸이요정>은 거울 속의 자신만 볼 수 있다. 이 허함, 허무함을 1700원으로 위로하는 알뜰함을 생각하건데, 그는 분명히 세탁소 철사 옷걸이일 것이다. 


<풍선머리조종사>역시 마찬가지이다. 외양은 '풍선'일 것 같은데 '조종사'라고 하니 떠올리기 쉽지 않다. 후에 양파를 좋아한다든지, 양파망을 하고 있다든지 세부적인 묘사가 나오지만 그것 역시 아주 일부를 표현하는 것 뿐이다. 피터 판은 친구들의 속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그들을 잘 구현해 내지는 못한다. 이것은 불러내는 이가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이 '이만큼'이라는 한정일 수 있고, 그들을 훤하게 손바닥 보듯 보고 싶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가능성을 후자에 두고 싶다. 이유로 '비밀이 없는 영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어떤이의 말로 대신하자. 자기 마음 속의 친구를 알아보는 일이라도 그렇다. 나의 끝까지 달려나가, 내가 모르는 나의 원초를 파내서, 내 욕망이 부딪히는 소리를 모두 받아 적는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달그닥 거리는, 서로 다른 마음의 아주 '일부분'만을 알아채고 적는다. 이를테면 '삼키는 눈물'의 맛 같은 것. '휴가철 막힌 고속도로에서 파는 뻥튀기의 뻑뻑한 맛입니다.' 피터 판과 친구들 프롤로그」 부분.


친구들을 만나다보면, 에필로그다. 그곳에 '슈퍼문'이라는 기막힌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동네 슈퍼문(세븐일레븐)은 일단 닫히지를 않아서 언제 열릴지를 모르는데, 시인의 말에 따르면 '행복이란 슈퍼문처럼/동네마다 문 여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지만/일생에 한번은 무심코 쳐다본 슈퍼문으로부터/얼음같은 총알이 날아와/당신 심장에 박힐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피터 판과 친구들 에필로그」 부분. 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더 쓰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여 놓았다. 


그때 당신은 살고/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피터 판과 친구들 에필로그」 부분.

 

겁도 없이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시인이다. 

나는 이제 '피터 판'과 '친구들'을 다 만났다시집을 덮으면 이영주 시인의 간결하고 다정한 발문을 만날 수 있다이제 내 친구들을 불러야겠다하나 둘셋 넷‥‥. 이름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름을 잊고 있었던 친구다. 우리동네 슈퍼문이 잠시 밤을 갖고, 무심코 열리는 날까지 불러봐야겠다.

 






*(궁금) 피터 래빗에서 왔을 가능성은 없나요? 라는 제보가 들어왔다. (답변) 토끼는 귀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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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백이호 옮김, 이인식 / 김영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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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은 철선의 굽은 곡선처럼 매우 서서히 우회적으로 지금의 형태로 진화했다그 형태는 평범하지만 내재된 연관성은 엄청나게 복합적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은마치 100개의 클립이 들어 있는 상자 안에서 특별한 클립을 하나 집어내는 것처럼 자의적이고 어려울 수 있다이제 문화와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인공물 자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면클립의 꼬리가 서로 엉켜 연결되는 것처럼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99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는 디자인과 공학에 초점을 맞춘 책이지만명확하게 보이는 분야에 권장하면서 진실로 맥락이 닿아 있는 어떤 분야에 추천하는 것을 잊은 것 같다아니, 그 '어떤 분야'가 생소해서 이름을 모르고 넘어 간 것일수도 있겠다. '이해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 '고고학'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양서로 읽힐 만 하다. 물건을 '만드는 입장'에서 '물건의 변화'를 바라보면서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이라고 너무 놀라진 말자. 글자 그대로 옛것古을 생각한다考는 분야일 뿐이다. 인공물을 살피는 이들의 눈매는 그것을 만든이의 눈이 오래 머문 곳을 찾는다. 인공물의 시기와 맞물린 흥망무엇보다 어째서라는 물음을 늘 지녀야 할 이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또는, 반대로 고고학적으로 인공물에 접근하는 태도가 디자인과 공학 분야에서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헨리 페트로스키가 포크와 나이프를 나열하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살펴보는 방법은 고고학 수업을 떠오를 정도였다. (더 궁금한 사람은 몬텔리우스의 형식학적 방법과 페트리의 계기 연대법을 참고하면 좋다.) 책의 내용은 경영과 디자인, 그리고 발명가들의 입장에서 유익한 '관점'을 제공하려는 것 같다. 바로 여기에서 고고학적 측면으로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 것 같은데, 어려운 것 아니고, 그저 옛것을 생각한다는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소개해 보려 한다.


일단 포크가 네 갈퀴를 갖게 되기까지 여정을 (고고학적으로)따라가 보자포크가 다량 확보되어야 한다. 시기를 알수 있으면 좋지만 알 수 없어도 좋다. 그리고 포크의 원료공정의 가짓수, 형태등에 따라 나누는 작업을 시작한다포크의 머리몸의 길이곡선의 휘어짐어떤 것이 시기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지 캐낸다그리고 포크를 사용한 계층의 파악도 잊어서는 안 된다한 시기에 통용된 포크라 하더라도 귀족이 쓰던 포크와 일반인이 썼을 포크의 양식이 같을 리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포크의 발달을 살펴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술의 발달은 지역마다 다르고 계층마다 다르다. 또한, '복고'를 최초의 출현으로 착각하는 오류는 금물이다. 1920년대 유행했던 옷 스타일이 2000년대 들어와 다시 유행하는 '복고'는 옷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인공물에게도 돌아온다. 21세기인 지금도 백자 세트를 생산해 내는 것처럼 말이다. 


 포크는 식탁에서 중요하고 싶고, 뽑내고 싶어서 쓸데 없이 열 갈퀴를 가질 수도 있었다. 갈퀴마다 작은 톱니를 세워 음식물을 빠트리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왜 네 갈퀴의 단순한 디자인으로 굳혀진 것일까. 인공물이 가장 발달한 후에는 순수하게 '필요한 기능'과 사회 문화가 '요구하는 부분'을 집중해 오히려 이전보다 쇠퇴한 경향을 보인다. 모든 발전과 양상을 경험한 물건의 최종태는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책상이 직사각형에 네개의 다리를 가진 것은 '생활'이 그런 책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상은 아직도 다양한 형태를 꿈꾼다. 그러나 그것이 집집마다 쓰이기까지는 멀고 먼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네 갈퀴의 포크가 마침내 괜찮은 것으로 자리 잡아진 후에도 어느 시기에는 갈퀴를 두 개 가진 포크가 유행 했을 수도 있다. 그 시기 유독두 갈퀴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대 유행 했다거나아니면 유난히 원료인 철이 모자랐거나(전쟁 등으로 인해)때문에, 물건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원인은 사회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사람이 가장 자주 쓰는 것이 가장 민감하게 변한다. 사람은 죽고 없지만쓰던 물건들은 남아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옛것을 보고 생각한다는 학문은 결국 나 이전에 나처럼 살았을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이 책을 단순히 물건의 발달과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생각을 키워주는 것, 또는 앞으로 발명될 물건에 대한 가능성을 따질 수 있는 도구로 덮어두지 않기를 바란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종 다양하게 늘어난 포크를 보면서, 유난히 먹을 것이 풍족했거나 풍족하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사치스럽게 먹는 것을 우선의 가치로 삼았을 사회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물건의 발명에는 그것을 사용하면서 지냈던, 그리고 지낼 사람들의 생활 에 관심 갖고 이해하는 일이 우선한다. 


인공물의 진화와 유행쇠퇴를 읽으며 진실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지점은 디자인과 기업 아이템의 흥망이 아니라그 속에 있는 생활의 변화일 것이다기업의 이익 때문에(깨끗해 보임, 정돈된 이미지, 보온효과) 출시됬던 맥도날드의 대합형 플라스틱 폼 포장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종이 포장을 고수하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가장 유용한 제품은삶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란현재 살아가고 있음을 충실히 알 뿐만 아니라, 지금 이전과 이후 모두를 고민할 수 있는 것에 있다.



 

유물을 기술하는 이들은 그 시대 쓰였던 물건의 이름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알 수 있는 물건과 빗대어, 또는 기능을 추측해 이름을 짓는다. 이것에 경종을 울릴 만한 일화가 이 책에 다양하다우선

 

1860년대 영국 버밍엄에서 망치의 종류가 무려 500가지나 된다는 사실에 마르크스는 크게 놀랐지만이는 결코 자본가의 계략 때문은 아니었다만일 어떤 계략이 있었다면 오히려 더 많이 만들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망치의 종류가 급격히 불어났던 이유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특수하게 쓸 곳이 많기 때문이었다. 257

 

500가지나 되는 망치의 종류라니! 망치의 이름을 오백개를 생각해 본다이렇게 다양한 숫자라니아무리 상황이 다르다고 해도, 5세기쯤에도 망치가 열 종 정도는 번듯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상상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당시 전해진 물건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고루하다. 지금의 망치를 자세히 살피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느린 길에 전해지지 않은 망치들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또 놀랐던 것은 공방에서 도구를 부르는 이름에서였다. 저자는 윌리엄 스미스에 대한 회고록에서 장인의 마음과 공구의 진화에 관한 실감나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어느 의자의 이름은 '퍼진 엉덩이'였다옹기장이는 작업실에서 이 의자가 보이지 않으면 "퍼진 엉덩이 가져와!"라고 소리를 질렀다다른 의자는 '늙은 영감태기'라고 불렀다그중 가장 쓸모가 많으면서도 이름이 기묘한 의자는 외발의 '아무도 아닌 놈'이었다. 196

 

근엄하게 유물의 형태를 추출해 이름 붙였던 것들이 퍼진 엉덩이나 늙은 영감탱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게다가 아무도 아닌 놈이라고 부르고 애용했을 수도 있다이런 이름만 전해진다면당시 공방의 생활이나 활력삶에 더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을텐데, 남지를 않는다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작은 일화에 오래 머물기를지금도 공방에서는 그런 이름들로 도구를 부르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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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2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이런 미시적 역사서 좋아합니다. 재미있겠군요.

봄밤 2014-03-2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코, 하지만 역시 미시역사서라기 보다 역시 디자인 발달사/비화로 읽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아요. 리뷰를 고쳐야겠어요ㅠ
포크가 네 갈퀴를 갖게 된 이야기는 제가 상상(?)을 가미한 것입니다요. 책에 당시 문화나 사회양상까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 보고서
프랑크 비베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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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데이를 맞아 고백 하나

 

 

좋아하는 기업이 있다

 

당신은 좋아하는 기업이 있는가기업이 만들어낸 상품을 좋아하기는 쉬워도 기업 자체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회사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르고 사탕이라도 받아보려는 심사일까오해는 금물이다.

나는 기업이라든가 경영그런 것은 잘 모르지만 어떤 가치가 훌륭한 것인지는 더듬거려 볼 수는 있다그럴리 없겠지만거대하고 훌륭한 상품을 만들어 내느라 욕도 가장 많이 먹는 기업들이 지금 소개하는 기업의 홈페이지를 하루에 세 번씩 방문하면 넌 행복해지고 넌 건강해지고 넌 웃을 수 있고심지어 시험도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하여간 망설이지 말고 right now, 들어가 보기를일단 그곳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이런 소개가 뜬다답답하겠지만 어떤 기업인지 놀래 주기 위해 기업의 이름과 주력 상품을 블라인드 처리한다.

 

●●소개

○○기업 ●●는 노사관계소유구조경영방식에 있어서 민주적이고자 합니다만든 ○○의 내용과 기업의 운영 방식이 따로 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생산자와 구매자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의 상업적 수익을 늘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좋은 ○○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의 관점이 아닙니다●●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좋은 조합이 ●●의 ○○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것우리가 중요시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겨우 <소개>를 읽고 감동해서는 곤란하다그 옆에 있는 <살림살이>라는 메뉴를 보자이곳에는 기업 내부에서만그것도 볼 수 있는 사람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수입 지출]이 상세하게 공개되어 있다숫자로 어지러운 보고서 밑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도 잊지 않는다다달이 올라오기 때문에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지난달의 현황이다.

 

판매는 지난달에 비해 줄었지만 외주제작으로 인해 수입은 2천만여 원가량 가량 늘었습니다하지만 밀린 4대 보험과 인쇄비 미지급분을 처리하느라 지난 달보다 지출 비용이 2배 가까이 올랐네요.

(중략) 그리고 출시된 지 5개월이 지난 ○○가 출시 때보다 더 높은 판매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어디서 반응이 촉발된 건지 알기 힘든 상황이 영업자로서 좀 답답하긴 하지만다이어트와 성형 등의 문제의식이 좀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

 

그렇다면 문제이곳은 어떤 기업일까?

바로 바로 바로도서출판 후마니타스이다블라인드처리한 ○○는 출판혹은 도서를 넣어서 읽으면 된다●●는 물론 후마니타스이다후마니타스가 뭐하는 곳인지 몰랐다면 오늘부터 알면 된다노파심으로 말해두지만 나는 후마니타스와 아무 관련이 없다이런 책은 어떤 사람들이 만드는지 궁금해서 홈페이지를 들어가봤을 뿐그 후로 가끔 들러 읽었던 소개를 읽고 이번 달은 적자가 아닌가살펴보기도 한다.

 

후마니타스의 소개에서 어떤 부분에 가장 놀라웠느냐면은바로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의 관점이 아닙니다.' 라는 부분에서였다사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는 곳이 대부분의 기업 아닌가그들은대체누구를위해서 그런 희생을 발생시키는 것일까설마 소비자를 위해서맙소사책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는 훌륭한 제품에 가려진 희생을 추적한다소비자는 달콤하거나(네슬레콜라편리하거나(구글마이크로소프트애플그리고 우리의 건강을 챙겨준다는 것이나(노바티스 등이상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게 내 주변에 머무는다양한 분야의 세계 50개 기업의 윤리보고서를 작성한다.

 

2. 윤리보고서의 기준

리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제목에 맞춰 집중하기로 한다.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들어가기 전에 세계 50대 기업에 삼성전자가 들어있다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실을 알린다리뷰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삼성전자는 서운해 하지 말길.

일단 등급평가를 어떤 기준으로 이뤄질까저자는 지속 가능성의 주제중요한 윤리적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세 평가기관의 자료를 이용했다뮌헨의 외콤 리서치취리히의 지속가능성 평가기관 SAM, 암스테르담 서스테널리틱스가 바로 그것이다이들의 기준을 간단하게 알아보면외콤리서치(와콤이 아니다)-사회문화자연에 대한 친화성을 기준으로 평가사업 부문에 따라 가중치가 다름. SAM-경제환경사회적 요소가 일정한 역할지속 가능한 경제적 능력도 포함서스테널리틱스-환경사회적 요소기업 경영의 세 분야를 평가한다고 한다.

 

알파벳 평가와 함께 신호등 평가를 첨부해서 등급을 메기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평가기관들도 대부분 공개된 자료에 의존해 평가할 수밖에 없어 객관성의 한계를 지닌다공개된 자료는 대부분 자사가 낸 보고서이기 때문에그리고 또 하나 특별한 문제가 있는데바로 기관들의 등급 평가-업종 최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분야에서 최고인 기업은 비록 해당 분야가 전체적으로 큰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어도 좋은 점수를 받는다. 59' 이것의 문제는 예상 가능하다.

 

가령 원칙적으로 성능이 굉장히 우수한 자동차가 대부분 불필요한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가려지고그와 함께 제약 회사가 많은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수많은 생명을 구한다는 사실도 가려지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책에서는 <업종 최고>기준에 따라 평가를 내리기보다 전 분야의 윤리 문제도 함께 고려함으로써 우리한테 정말 어떤 제품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고자 한다. 60

 

참고로 50대 기업중 페이스북은 빠져있는데이 이유를 저자는 쿨하게 고백한다. '평가를 포기했다'.


페이스북에 대해서는 자체 평가를 포기했다이 기업이의도적으로 판단을 보류해 놓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던졌기 때문이다별점 다섯 개를 받은 기업은 한 곳밖에 없다. 60

 

평가포기이것은 우리가 공평무사하게 윤리를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 새롭게 생기고 있는 부딪혀야 할 윤리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3.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본격적으로 애플에 대한 평가에 들어가자애플은 평점 별 세 개를 받았다아주 좋은 숫자는 아니나 그렇다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애플이 처한 윤리적 문제는 우선 하청업체에 대한 것이다.

2012년 5월 애플의 발표에 따르면 하청 업체 직원의 95퍼센트가 한 주에 60시간을 일한 것으로 드러났다그러니까 국제적 최저 기준만 간신히 지키는 수준이었다. 204

 

애플의 발표를 따랐을 뿐인데, 직원 대부분이 한 주에 60시간을 일한 것이다저자는 그래도 국제적 최저 기준을 간신히 지키고 있다고 말하면서이런 내부 문제를 보고하는 것을 고무적(!)이라고 평가한다불필요한 의심일까? 60시간은 줄이고 다듬어진 60시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런 내부 문제의 보고 중 중개인들이 개입하는 <비자발적 노동>에 대한 보고를 예로 든다.

 

<비자발적 노동>에 대한 보고가 한 예다비자발적 노동이란 중개인들이 노동자들에게 너무 많은 수수료를 갈취함으로써 사실상 중개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노동자들이 억지로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따라서 애플은 만일 중개업자들이 청구하는 비용이 해당 노동자의 한 달치 세후 월급을 조과하면 그 초과된 돈은 모두 하청 업체가 지불하도록 했다이것은 중개업소를 거쳐 중국 내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베트남 출신의 노동자들과 관련된 문제다. 204

 

다시 정리하자비자발적 노동말 그대로 자발적이지 않은 노동이다이주노동자들이 받는 처우다내 손에 쥐어있는 스마트한 아이폰은 그런 노동 위에 지어져 있다이 책은 기업의 윤리 상태를 체크하게 하면서나의 소비 또한 돌아보게 한다최저의 돈으로 최상의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소비의 윤리 아니던가싸고 질 좋은 물건을 구입한 현명한 자신을 토닥이지만 그러한 값이 나오게 된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가격 뒤에 숨어있는 노동의 댓가윤리적 소비란 이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애플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2010폭스콘에서 노동자들이 집단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폭스콘 노동자 연쇄 자살사건폭스콘은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생산하는 주요 공장이다공장에서는 작업중 동료들 간의 대화 금지화장실도 5분 내로 다녀와야 하고식당에서 밥을 남겨도 별점을 매긴다세 번 적발 시 해고라고 한다기사에 따르면 '열한 번째 투신자가 발생하자 기숙사 옥상에 3미터 높이의 철망과 아래쪽에 추락 방지를 위한 이른바 사랑의 그물을 설치하고 심리 상담사를 배치하는 것 외에 근본적 해결책은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이 내용은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사랑의 그물이라니노동자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 그물을 설치한다니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심지어 노동자들이 고액의 배상금을 노리고 투신한다며노동자들에게 앞으로 자살이나 자해에 대해서는 회사가 배상하지 않는다는 협의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가 엄청난 반발로 바로 폐기해야만 했다'는 내용이다이후폭스콘과 애플에 대한 비난과 규명을 요구하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다이 중영국 가디언의 주말판 <옵저버>의 사설을 소개한 프레시안 기사를 눈여겨볼 만하다. '애플 아이폰을 중심으로 논쟁이 커지고 있지만근본적으로는 세계화가 불러온 노동자들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는 것.

 

기업의 윤리 프로필은 하나의 기업 두 장 반-세장의 분량을 차지한다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이 일부를 독자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윤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애플과 폭스콘자살 사건 모두 오늘 알게 된 일이다책으로 말미암아화려하고 달콤하고 편리함에 가려진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기를보이는 것에 가려지는 눈을 뜨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소비를 바꾸는 것은 생활을물건으로 연계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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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기린과숲 e시선
김언 / 기린과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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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시간 모르게-김언,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기린과숲.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세계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세계내가 아무리 들어가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킨다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죽어있기 때문이다. 189쪽의 24번째 줄은 천 년후에 펼쳐도 189쪽 24번째 줄이다책은 형태를 갖추면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움직이지 않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아무리 읽어도 변하지 않는다변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음흉한 미소경주를 하기로 했는데달리지 않는다영원히.



 

전자책을 처음 읽는다행간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경악금치 못했다움직이는 글자로 어지러웠다글자 크기에 따라 밑으로 떨어지는 글자의 수가 다르다원형을 알 수 없다책이 사진이라면이것은 영상이다행갈이가 달라지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시를 읽을 수 있다전자책의 특성 때문이었을까한 행이 한 연이다.


솔직한 감정이 그랬다무엇이든 처음 보면 놀라기 마련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책의 처음도 그랬겠지 싶다오감으로 읽히던 이야기를 오직 시각으로 감지 할 수 있는 잉크로 엮어야 했을 때의 충격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처음에 저런걸 누가 보냐고 했겠지전자책의 처음도 그랬다면시작이 나쁘지는 않다나는 책을 쥔 적도 없이 불러내서 보고 다시 꺼트린다메신저로 이뤄지는 하루의 조용한 대화가 그렇듯이창을 키면 나타나고 끄면 사라진다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그것은 이제 일상이니까.

 

그렇다면 시집으로써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는 어땠을까아버지와어떤 세계그리고 그 안에서 분투하는 나로 정리하면 너무 성글려나우선자화상에서 나타난 그림은 제목을 배신하고 '아빠'이때 아빠는 두 사람으로 존재하는데, '아빠가 된 나'와 '화자의 아빠'가 그것이다이 시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자화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는데, 자화상은 내가 나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나를 그린다는 핑계로 자신을 학대하는 그림이라는 생각.

 '첫 줄을 읽어보면 알지 이 얼굴이 얼마나 못생긴 그림인지//가장 친한 친구들도 모르고 이웃집에 사는 개도 못 알아보는강렬한 조소낯선 것은 문장을 그림이 아니라 문장으로 그렸을 뿐이다이후 계속되는 '아빠가 된 나대한 관찰을 살펴보자. '이 표정을 네 살배기 우리 딸애는 단번에 알아 차렸지 이건 아빠//이건 못생긴 이건 집에는 없는 물건이라는 걸신랄하다집에 없는 물건이 아빠의 큰 특징이라는 걸그러나 이것은 '나의 특징'이 아니다아빠가 된 나네 살배기 딸애의 존재로 하여금 '되어 버린아빠가 짓는 표정이다.

'이건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걸//너도 알고 나도 아는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면//신기하게도 다시 튀어나와서 짖는다 옆집의 개처럼//대문 밖에만 나서면여기옆집의 개처럼 짖는 물건대문 밖에만 나서면 큰 소리를 내는 물건그러나 그것은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슬그머니 떨어지는 한 장의 아빠화자의 아버지가 보이는 대목이다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던 아빠의 속성을그 지저분한 속을 다 들어내지 않고도 두 집 안의 역사풍경냄새를 훑는다불안정한 고요가 흐른다모두 '자화상'에서 생겨난 일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있을까. '아빠가 된 나'를 내가 이해하면서 '자신의 아빠'를 이해하게 되는. 시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이것을 읽는 이에게서는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점친다


자화상으로 슬몃 보였던 화자의 아버지는탄생의 비밀에서 구체화된다그러나 주머니를 쓰고 있어 형체는 보이지 않고 무게와 질감으로만 느껴진다.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새벽에 깨어서 들었던 이웃집의 부부싸움 소리를 들려'준다아마도 태내에서 들었을 소리를 꺼내 주었다는 것 같다그리고 후에는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드는 옆집의 부부를 향해서//어서 주무세요벽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협박'하는데불구하고 '소리는 더 커졌다.//벽이 얇아진 것이다소리는 더 커졌다벽이 투명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마지막에는 급기야 '여자는 젖을 물리며 내가 태어날 날짜를 곰곰이 따져'본 것으로 끝난다젖을 물리며 태어날 날짜를 따져보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 눈밭에 눈이 쌓여 있었', '그걸 본 아버지가 한여름 날의 늦은 오후로 옮겨놓았다육개월빈 공백그래서 탄생의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

 

그런것은 비밀로 남겨둔다는 듯 나간다이해가 부족한가그러나 어떤 것은 다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라는 물음표만 가져도 좋지 않을까희한하게 교차한 시간의 모습을 감지 할 수 있다면, 혹은 '눈밭에는 눈이 내리'는 당연한 현상같은 것을 알아챌 수 있다면.


다음에 도착한 곳은, '어떤 세계'그곳은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시의 첫 구절,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과 포즈를 취한다김언은 짧게 쓴 시만 모았다며 바람도기대도 없는 시집이라고 했으나독자의 기대는 다르다. 여기 가장 단순한 언어로 세계의 포즈를 잡아채는 모습을 부려 놓았으니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고층보다 더 높은//고층에서 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를//위로하고 어떻게 변명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부분.왜 궁금하지 않을까. '우리는 만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한 시간씩 거리가 없어지고//우리는 드디어 엇갈렸다아주 멀리서.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부분.바랐다는 것처럼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졌지만 그것은 우리의 세계가 가까워지려는 것이 아니라완전히 엇갈리기 위한 준비였다엇갈림은 만남을 전제하지 않는가? 그러나 엇갈림은 아주 멀리서 일어난다.한 시간씩 거리가 없어지고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저 이상한 세계를 대하는 김언의 태도는 엇갈리는 포즈를 그려내는 것 뿐일까시집 말미그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인생은 시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우리들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 또한 완강히 거부하니까//뿌리도 없고 하늘도 없는 나무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백 년 동안의 근황부분희망찬 전복물론 이것의 전제는 실현 '불가능'하다. '거북이처럼 명랑한 동물을 만들어낸다면//사람 대신 물건이나 팔까 싶어요이 시처럼//행동하지 않는 역사를 언젠가는 증명해낼 겁니다.//아무리 귀에 가까이 갖다 대어도 빗나가는 총알을. 「백 년 동안의 근황부분.총성을저 시끄러운 폭음을 잠재울 방법은 '모든 구멍은 결국 악기가 되는 법을 거부'하는 것 이라고 예언한다모든 구멍혹시 당신의 입까지 말하는 것일까봐 두렵다그렇다면 그곳은 시 마저 숨통을 끊은 곳일 테니까.

 

소시집은 이토록 위험한 경고위험한 상상위험한 협박으로 시를 닫는다그렇다면 다음은더 무시무시한 경고일까. 지금까지백 년 동안의 근황이었으니이제 그의 '근황'을 채근해 볼 차례우리는 만날 시간이 없지만실은 아주 가까이서 만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사라지는 시간 모르게 말이다. 한순간, 우리가 동일한 시간 동일한 포즈를 취했던 것을 상상해 본다. 멀어지는 것으로 사라지고, 엇갈림 밖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드디어 만났다'는 것을 기억해본다. 그것은 '눈밭에 눈이 날리는' 것처럼 당연한 풍경이었을텐데, 왜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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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1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이었군요. 전 소설집인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행간이 변하는 전자책이라...
후훗, 저도 몇 번 읽어보려고 시도를 했는데 죽어도 전 못 읽겠더라고요.
사실 제 독서 버릇은 종이 질을 느끼는 행위에 가까웠어요. 손끝으로 종이 결을 만지고 밑줄을
긋고,,,, 그런 손 감촉들이 좋아서 책을 읽은 것 같기도 해요....

봄밤 2014-03-14 17:25   좋아요 0 | URL
곰발님과 제 이야기를 종합하면, 책을 읽는 것은 '안심'에 있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여기 있다는 느낌. 전 사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접는 것을 불과 일년 전에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 전에는 그 상태 그대로 두었어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요. 이제는 활발하게(?) 밑줄과 접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집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불과 12점 밖에 안되는 시가 아니었더라면 저 역시 전자책을 읽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다른 것은 몰라도 시가 전자책으로 독자와 소통을 잘 할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읽기에 도전 할 생각입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