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기린과숲 e시선
김언 / 기린과숲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라지는 시간 모르게-김언,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기린과숲.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세계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세계내가 아무리 들어가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킨다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죽어있기 때문이다. 189쪽의 24번째 줄은 천 년후에 펼쳐도 189쪽 24번째 줄이다책은 형태를 갖추면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움직이지 않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아무리 읽어도 변하지 않는다변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음흉한 미소경주를 하기로 했는데달리지 않는다영원히.



 

전자책을 처음 읽는다행간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경악금치 못했다움직이는 글자로 어지러웠다글자 크기에 따라 밑으로 떨어지는 글자의 수가 다르다원형을 알 수 없다책이 사진이라면이것은 영상이다행갈이가 달라지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시를 읽을 수 있다전자책의 특성 때문이었을까한 행이 한 연이다.


솔직한 감정이 그랬다무엇이든 처음 보면 놀라기 마련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책의 처음도 그랬겠지 싶다오감으로 읽히던 이야기를 오직 시각으로 감지 할 수 있는 잉크로 엮어야 했을 때의 충격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처음에 저런걸 누가 보냐고 했겠지전자책의 처음도 그랬다면시작이 나쁘지는 않다나는 책을 쥔 적도 없이 불러내서 보고 다시 꺼트린다메신저로 이뤄지는 하루의 조용한 대화가 그렇듯이창을 키면 나타나고 끄면 사라진다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그것은 이제 일상이니까.

 

그렇다면 시집으로써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는 어땠을까아버지와어떤 세계그리고 그 안에서 분투하는 나로 정리하면 너무 성글려나우선자화상에서 나타난 그림은 제목을 배신하고 '아빠'이때 아빠는 두 사람으로 존재하는데, '아빠가 된 나'와 '화자의 아빠'가 그것이다이 시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자화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는데, 자화상은 내가 나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나를 그린다는 핑계로 자신을 학대하는 그림이라는 생각.

 '첫 줄을 읽어보면 알지 이 얼굴이 얼마나 못생긴 그림인지//가장 친한 친구들도 모르고 이웃집에 사는 개도 못 알아보는강렬한 조소낯선 것은 문장을 그림이 아니라 문장으로 그렸을 뿐이다이후 계속되는 '아빠가 된 나대한 관찰을 살펴보자. '이 표정을 네 살배기 우리 딸애는 단번에 알아 차렸지 이건 아빠//이건 못생긴 이건 집에는 없는 물건이라는 걸신랄하다집에 없는 물건이 아빠의 큰 특징이라는 걸그러나 이것은 '나의 특징'이 아니다아빠가 된 나네 살배기 딸애의 존재로 하여금 '되어 버린아빠가 짓는 표정이다.

'이건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걸//너도 알고 나도 아는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면//신기하게도 다시 튀어나와서 짖는다 옆집의 개처럼//대문 밖에만 나서면여기옆집의 개처럼 짖는 물건대문 밖에만 나서면 큰 소리를 내는 물건그러나 그것은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슬그머니 떨어지는 한 장의 아빠화자의 아버지가 보이는 대목이다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던 아빠의 속성을그 지저분한 속을 다 들어내지 않고도 두 집 안의 역사풍경냄새를 훑는다불안정한 고요가 흐른다모두 '자화상'에서 생겨난 일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있을까. '아빠가 된 나'를 내가 이해하면서 '자신의 아빠'를 이해하게 되는. 시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이것을 읽는 이에게서는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점친다


자화상으로 슬몃 보였던 화자의 아버지는탄생의 비밀에서 구체화된다그러나 주머니를 쓰고 있어 형체는 보이지 않고 무게와 질감으로만 느껴진다.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새벽에 깨어서 들었던 이웃집의 부부싸움 소리를 들려'준다아마도 태내에서 들었을 소리를 꺼내 주었다는 것 같다그리고 후에는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드는 옆집의 부부를 향해서//어서 주무세요벽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협박'하는데불구하고 '소리는 더 커졌다.//벽이 얇아진 것이다소리는 더 커졌다벽이 투명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마지막에는 급기야 '여자는 젖을 물리며 내가 태어날 날짜를 곰곰이 따져'본 것으로 끝난다젖을 물리며 태어날 날짜를 따져보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 눈밭에 눈이 쌓여 있었', '그걸 본 아버지가 한여름 날의 늦은 오후로 옮겨놓았다육개월빈 공백그래서 탄생의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

 

그런것은 비밀로 남겨둔다는 듯 나간다이해가 부족한가그러나 어떤 것은 다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라는 물음표만 가져도 좋지 않을까희한하게 교차한 시간의 모습을 감지 할 수 있다면, 혹은 '눈밭에는 눈이 내리'는 당연한 현상같은 것을 알아챌 수 있다면.


다음에 도착한 곳은, '어떤 세계'그곳은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시의 첫 구절,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과 포즈를 취한다김언은 짧게 쓴 시만 모았다며 바람도기대도 없는 시집이라고 했으나독자의 기대는 다르다. 여기 가장 단순한 언어로 세계의 포즈를 잡아채는 모습을 부려 놓았으니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고층보다 더 높은//고층에서 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를//위로하고 어떻게 변명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부분.왜 궁금하지 않을까. '우리는 만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한 시간씩 거리가 없어지고//우리는 드디어 엇갈렸다아주 멀리서.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부분.바랐다는 것처럼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졌지만 그것은 우리의 세계가 가까워지려는 것이 아니라완전히 엇갈리기 위한 준비였다엇갈림은 만남을 전제하지 않는가? 그러나 엇갈림은 아주 멀리서 일어난다.한 시간씩 거리가 없어지고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저 이상한 세계를 대하는 김언의 태도는 엇갈리는 포즈를 그려내는 것 뿐일까시집 말미그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인생은 시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우리들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 또한 완강히 거부하니까//뿌리도 없고 하늘도 없는 나무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백 년 동안의 근황부분희망찬 전복물론 이것의 전제는 실현 '불가능'하다. '거북이처럼 명랑한 동물을 만들어낸다면//사람 대신 물건이나 팔까 싶어요이 시처럼//행동하지 않는 역사를 언젠가는 증명해낼 겁니다.//아무리 귀에 가까이 갖다 대어도 빗나가는 총알을. 「백 년 동안의 근황부분.총성을저 시끄러운 폭음을 잠재울 방법은 '모든 구멍은 결국 악기가 되는 법을 거부'하는 것 이라고 예언한다모든 구멍혹시 당신의 입까지 말하는 것일까봐 두렵다그렇다면 그곳은 시 마저 숨통을 끊은 곳일 테니까.

 

소시집은 이토록 위험한 경고위험한 상상위험한 협박으로 시를 닫는다그렇다면 다음은더 무시무시한 경고일까. 지금까지백 년 동안의 근황이었으니이제 그의 '근황'을 채근해 볼 차례우리는 만날 시간이 없지만실은 아주 가까이서 만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사라지는 시간 모르게 말이다. 한순간, 우리가 동일한 시간 동일한 포즈를 취했던 것을 상상해 본다. 멀어지는 것으로 사라지고, 엇갈림 밖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드디어 만났다'는 것을 기억해본다. 그것은 '눈밭에 눈이 날리는' 것처럼 당연한 풍경이었을텐데, 왜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3-1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이었군요. 전 소설집인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행간이 변하는 전자책이라...
후훗, 저도 몇 번 읽어보려고 시도를 했는데 죽어도 전 못 읽겠더라고요.
사실 제 독서 버릇은 종이 질을 느끼는 행위에 가까웠어요. 손끝으로 종이 결을 만지고 밑줄을
긋고,,,, 그런 손 감촉들이 좋아서 책을 읽은 것 같기도 해요....

봄밤 2014-03-14 17:25   좋아요 0 | URL
곰발님과 제 이야기를 종합하면, 책을 읽는 것은 '안심'에 있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여기 있다는 느낌. 전 사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접는 것을 불과 일년 전에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 전에는 그 상태 그대로 두었어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요. 이제는 활발하게(?) 밑줄과 접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집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불과 12점 밖에 안되는 시가 아니었더라면 저 역시 전자책을 읽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다른 것은 몰라도 시가 전자책으로 독자와 소통을 잘 할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읽기에 도전 할 생각입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