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그런 배경을 가져야 정치적 행위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장기적 계획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교육과 세상을 바꾸는 장기적 계획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스피박 :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다. 욕망을 재배치하는 것이교육의 목적이다. 모든 교육은 억압을 없애는 문제다. 욕망을자유롭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이런 교육의 목적과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 괴리가 있다. 이런 까닭에 교육은강제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계획과 다른 것이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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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어떤 첨단의 발명품도 그 순간에 사람과 대상물 사이에 오가는 신성한 대화를 기록하거나 간직하게 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있으니, 그건 바로미국의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이 말한 ‘눈의 기쁨‘이다.
인간은 가슴을 울리는 진정한 경외감을 느꼈을 때나 아주 아름다운 것에 굴복했을 때 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려고 애쓰지만 잘되지 않는다. 너무나 찰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우리는 그 기억이 몸 어딘가에 깊이깊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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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내가 무사히 도쿄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무사히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지금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죽은 사람들의 모습도 머릿속에 떠올려가면서 양자를 비교해 보지 않으면 내가 살아 있다는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죽은 사람의가엾음 역시 알 수가 없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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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 노자의 길과 장자의 길 사이에서
강신주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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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장자 철학은 매개 제거를 위한 수양론, 그리고 조우한 타자와의 생생한 소통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이 점에서 장자 철학은, 비록 삶이 직접적인 타자와의 소통 속에서 정립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타자에 대한 경험과 새로운 주체 형식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는 침묵할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망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인전망 혹은 미래에 대한 전망에 속한다. 그렇다면 비록 장자 철학이 주체와 타자 간의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현실을 영원한 현실 혹은 영원한 순간으로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서 기술하고 있다 할지라도, 무매개적 소통의 진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경험할수 없는 그런 사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 소통의 즐거움은 오직 나만이, 혹은 잘해야 주체와 타자만이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즐거움에는 애초에 직접적인 주체와 타자를 제외한 다른 제3자가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러나 주체와 타자 간의 갈등이 과연 주체와 타자만의 문제일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런 갈등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층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장자가 기존의 모든 이념들에 대해 냉철한 비판의식을 유지했다고 할지라도,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에 대한 비판과 수양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과 질적으로 다른 주체및 타자 형식, 즉 주체와 타자를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체계를 우리에게 던져주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바로그때서야 이념을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철학의 진정한 역할이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장자에게서 배우게 되는 마지막 교훈일 것이다. 새로운 체계, 새로운 의미, 나아가 새로운 주체를 우리의 힘으로 구성하라는 것!
이제 장자로부터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언제 다시 우리가 장자에게 돌아올지 기약은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전혀 다른 주체로 변형되어 돌아와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를 가르쳐주었던 장자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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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 노자의 길과 장자의 길 사이에서
강신주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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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그래서 새롭게 정의해야만 한다.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서 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은 홀로 남겨져서 이리저리 몽상에 빠지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의미란 특정한 주체와 특정한 타자를 생산하는 선험적인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의미란 주체와 타자를 동시에 함축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주체 홀로 이러저러하게 새로운 의미를 구성할수는 없다.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 P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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