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름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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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7.노름꾼-도스토에프스키

내가 보기에는 도박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고 고루하다는 생각,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런 생각이 더 우스운 것 같다. 도박이 다른 다른 돈벌이 수단들보다, 예를 들어 장사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백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돈을 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25)

이문을 남기고 내기로 돈을 따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사람들은 룰렛판이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고 따내고 하는 셈이다.(26~27)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이겨야 한다는 것이고, 또 그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입니다.(54)

쾌락이나 희열은 언제나 유익하고, 야생적인 끝에는 권력조차 역시 일종의 독특한 향락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폭군이며 박해자가 되는 것을 좋아했어요.(61)

프랑스 인이 천성적으로 다정한 경우는 보기 드물다. 언제나 명령에 따르듯이, 그리고 계산 속에서 다정하게 구는 것이다.(80)

우리들 집에, 모스끄바에 없는 것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정원도 있고 꽃도 있고. 여긴 그런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향기가 가득하고 사과들이 익어가는 넓디넓은 그곳, 그런 것들이 이곳에는 없단 말입니다. 정말 꼭 외국으로 왔어야만 했을까요!(175)

당신의 말씀 속에서 전 과거의 현명하고 열광적이고 또 냉소적인 친구를 발견할 수 있어요. 그렇게 모순된 것들을 동시에 겸비할 수 있는 사람은 러시아인 뿐이지요.(251~252)

프랑스 인은 완성된 형식이고 아름다운 형식입니다. ... 파리 사람들의 민족적 형식은 아직 우리가 곰처럼 미련했을 때에 이미 우아한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이 귀족 정신을 계승했고, 그래서 이제는 아주 저속한 프랑스 인들까지도 매너와 태도와 표현들 그리고 생각에 아주 우아한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러한 형식에 관여하는 데에는 아무런 창의력도 없고 또 정신이나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유산에 의해서 손에 넣은 것뿐이지요. ... 러시아 아가씨는 그 형식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포장물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람 본래의 영혼이라고 인정하며, 또 그의 정신과 마음의 자연스러운 형식이라고 받아들입니다. ... 러시아 인들은 아름다움을 꽤 민감하게 구별할 줄 알고 또 그것을 갈망하지요.(256~257)

루이도어와 프리드흐스도어 그리고 탈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도박대, 타오르듯 번쩍이면서 심판의 삽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는 금화의 기둥들, 그리고 회전판 주위에 쌓여 있는, 길이가 1아르신이나 되는 은화의 기둥들, 나는 그것들을 너무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것이다. 방 두 개 정도의 거리를 남겨 놓고 도박장 가까이에 다가가기만 하면 나는 벌써부터 돈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거의 경련을 일으킬 지경까지 되고 만다.(287)

러시아 인들은 그 재능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자신에게 알맞는 형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거예요. 여기서 문제는 바로 형식에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 인들은 대부분 풍부한 재능을 갖추고 있기 대문에 적절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290)

예전에 고전 읽기 모임을 하면서, 모임을 리드하던 분이 소크라테스를 두고 '소선생'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소선생'이라는 표현의 어감이 좋았습니다. 저 멀리 이국에 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마치 우리 곁에서 우리한테 직접 말을 걸어 무언가 가르치는 친근감이 들어서요. 이번에 도스토예프스키 책을 작정하고 읽으려고 그의 책을 잔뜩 준비했습니다. 준비하면서 저도 모르게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도선생'이라고 불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도선생', 즉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극단적이고 격정적인 성향에 대한 심리묘사에 있어서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노름꾼>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도박장이 있는 외국의 도시 룰레텐베르크를 배경으로 두 개의 지옥에 빠진 남자 '나'와 그 주변인물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두 개의 지옥?'이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네, 맞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도박과 지옥이라는 두 개의 지옥에 빠져 헤매고 있습니다. 근데 도박은 이해하겠는데 사랑도 지옥이라고? 나에게는 두 개의 애착의 대상이 있습니다. 도박과 사랑. 도박은 그 자체로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지옥이겠죠.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소설을 통해 도박이라는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겠다 했고요. 그런데 또다른 애착의 대상인 사랑도 나에게 괴롭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의 대상인 뽈리나는 나의 사랑을 무시하는 듯 행동하며 프랑스 귀족인 드 그리외와 영국인 신사 에이즐리 사이를 맴돕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뽈리나를 증오하며, 그녀를 죽이고 싶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잠시 관심을 보이면 그녀의 어떤 말이라도 들을 노예가 되며 기뻐합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사랑이 지옥이라는 표현이 잘 들어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마지막까지 두 지옥 사이에서 헤매던 나는 뽈리나의 감정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도박이라는 지옥을 선택합니다.

사랑이 아닌, 도박이라는 지옥을 선택하며 수렁에 빠진 채로 소설의 결말이 나는 걸 보며, 저는 이 소설이 지극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성과 합리성보다는 감정의 격동, 격렬한 열정을 선호하고, 서양의 가치관과 성향보다는 러시아적인 사고와 문화를 좋게 보는 작가다운 결말이라서. 서구화에 반대화며 러시아적인 것의 부활을 꿈꾸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갑자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으로 변화하는 결말을 제시하지는 않겠죠? 그러니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는 것은 격정적이고 열정적이고 극단적인 그 무엇의 인간 성향이 만들어나가는 극단과 열정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도박을 하며 '도박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저는 앞으로 제가 읽을 '도선생'의 소설들이 더 극단적이고 격정적인 무엇을 펼쳐보일 것이라고 예감합니다. 어쩌면 그걸 알면서도 계속 읽어나가는 저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 빠진 도스토예프스키적 인간이겠죠. 그래서 '도선생'적 인간인 저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소설들을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흡사 도박이라는 지옥에 빠진 사람처럼, 저도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인간 심연의 세계를, 그 지옥을 탐사하는 기분으로. 이렇게 적고 보니 진짜 <노름꾼>의 '노름꾼'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와 제가 비슷하게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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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프로파일링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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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6.심리죄:프로파일링-레이미

어젯밤 그들이 또 나를 찾아왔다.

늘 그랬듯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내 침대 앞에 섰다. 늘 그랬듯 나도 몸이 굳은 채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까맣게 타버린, 머리 없는 몸뚱이들을 두 눈으로 마주했다. 이번에도 그는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너도 나와 같아.(9)

범인은 여성을 성폭행한 게 아니라 이 도시를 성폭행하고 있었던 겁니다!(18)

범인의 눈에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여성의 생식기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범행을 저지르는 그 순간, 범인은 이 도시를 정복했다는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21)

고개를 들어 보니 짙은 남색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이 있지. 그렇게 별이 되어 하늘에서 가족을 비추고 원수도 비추고 있겠지.(84)

공포는 끊임없이 비웃은 구렁이처럼 그들 사이를 오갔다. 그 구렁이는 혀를 날름거리고 독니를 드러내면서 두 사람의 공포와 무력감을 거만하게 감상하는 듯했다.(229)

넌 남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진 만큼 더 큰 책임도 있어. 피해도 소용없다고. 놈을 잡는 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266)

팡무와 괴물 사이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개 속에서 놈이 자신을 훔쳐보며 몰래 웃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놈이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지척에 있었지만, 놈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 같았다.(486)

마지막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보다가 이 책의 주인공이자 '심리죄' 시리즈의 주인공인 팡무가 '중국 독자들에게 영웅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에 눈길이 갑니다. 영웅이라. 팡무가 영웅적인 인물인 건 맞습니다. 그는 천부적인 프로파일링 실력을 가지고서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범들을 힘겨운 여정 끝에 잡아냅니다. 아직 발매되지 않은 '심리죄' 시리즈의 다음 작품들을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심리죄' 시리즈의 첫 작품인 이 책만 읽어도 분명 영웅적인 면모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책에서 팡무는 영웅이라고 불리기에는 미흡한 존재입니다. 이 책에서의 팡무는 영웅이 아닌, 영웅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영웅이 되기 위한 길을 닦고 있는 듯한. 아니, 오히려 이 책의 팡무만 놓고 보면 어딘가 꺼려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꺼려지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 먼저 꺼려지는 부분보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볼께요. 이 소설은 재밌습니다. 엽기적인 연쇄살인마. 과거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미스테리한 탐정격의 인물. 그 인물이 보이는 천재성. 예측이 안 되는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과 그 살인의 진실을 밝혀 더 이상 피해자를 만들지 않으려는 탐정의 지적인 혈투. 예상 밖의 트릭과 서스펜스가 있는 액션. 마지막의 숨막히는 범인과의 승부까지. 이 책은 재미로 가득합니다. 추리소설을 읽어온 독자라면, 재미를 찾아 헤매는 독자라면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괜히 중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영화와 웹드라마로 제작된 시리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는 책의 재미보다는 팡무의 꺼려지는 부분에 더 꽂혀 있네요. 그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해보도록 할께요. 이 책의 팡무는 일본의 긴다이치 코스케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그게 누구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본 추리 소설을 대표하는 명탐정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손에서 창조되어 지금까지 일본 탐정소설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은 또다른 악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범인이 노리고 있는 인물이 대부분 다 죽고나서야 사건을 해결한다는 악명. 희생자가 다 죽고 나서야 사건을 해결하는 걸로 긴다이치 코스케가 유명한 것이죠. 그렇다면 이 책의 팡무도? 네, 맞습니다. 이 책에서 팡무는 범인이 자기가 노린 사람들을 대부분 다 죽일 때까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두명 정도만 겨우 구합니다. 아마도 그건 작가의 의도이겠죠. 긴장감과 재미와 스릴을 주기 위한 이야기의 구성.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면, 희생자가 대부분 다 죽고 나서야 해결하는 탐정 근처에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안 좋은 행동입니다. 그는 우리가 죽고 나서야 범인을 잡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책에 나오는 팡무가 현실에 있다면 일단 피하고 봅시다.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지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다행이 팡무는 현실에 없고 이야기의 공간에 갇혀 있네요. 휴, 다행입니다. 이야기에 있으니 이야기를 즐기면 되겠네요. 이게 뭔가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저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영웅이 되지 않는 팡무가 현실에 있다면 그를 꺼려해야 합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까요. 그가 영웅이 됐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럼 팡무가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 네, 그럴 겁니다. 기다리다 보면 영웅이 될 것이고 그러면 다가가면 됩니다. 물론 영웅이 되어 다가간다고 해도 죽을 확률이 줄어드는 것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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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2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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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5.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2-모옌

대담해진 고향 친지들 의연하게 일어나

손과 손을 바꾸어 들면서 관청 앞으로 달려드는구나

종 현장이 결코 천상에서 잠자는 별이 아니듯

백성들도 돼지나 개나 소나 양이 아닐진대(12)

인간과 인간은 목숨을 내놓고 경쟁하고, 물건과 물건도 내던져질 때까지 경쟁하죠. 우리는 거지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비교를 해도 아마 더 가난할 거예요.(73)

사람이 살아가는 데 오로지 돈만 필요할 리는 없을 텐데요?(121)

마음이 시커먼 그놈들은 애초부터 백성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던 것이다.(137)

애초에 당시들이 심으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필요없다고 하면 그건 우리 보고 죽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오?(142)

들의 공기는 신선했고 마늘 싹의 끝은 은빛으로 반짝였으며 밭고랑 사이를 흐르는 물은 은빛 뱀처럼 꿈틀거렸다.(159)

간부가 되면 뭐 하는데? 간부가 되려면 양심을 팔아야 해. 양심을 팔지 않으면 간부가 될 수 없어.(171)

보건소의 정원이 발그스름해졌으며 담장을 따라 심어 놓은 양귀비의 탐스럽게 활짝 핀 꽃송이들은 마치 하얀 나방이 줄줄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184)

현장 당신의 손이 아무리 커도 하늘을 움켜쥘 수는 없소

서기 당신의 권력이 아무리 무거워도 산보다 무거울 수는 없소

티엔탕 현의 잘못된 일들을 가릴 수는 없소

백성들 모두에게도 눈이 있단 말이오(199)

간부들은 매일같이 실컷 먹고 마시면서 그 비용을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채운 것이지요! 그런 간부들이야말로 사회주의하의 기생충입니다 ... 설마 탐관오리를 타도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관료주의를 반대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218)

하나의 정당이나 하나의 정부가 만약 국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곧 그 정당이나 정부를 전복시킬 권리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의 당을 책임지고 있는 간부나 한 정부의 관원이 곧 국민의 공복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오히려 국민의 주인 행세를 하고 국민들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사또 영감처럼 행세한다면 국민들은 그 사람을 타도할 권리가 있습니다!(221)

이 책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번거롭지만 위에 적어 놓았던 책의 구절을 다시 한번 옮겨 적어볼께요. 간부들은 매일같이 실컷 먹고 마시면서 그 비용을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채운 것이지요! 그런 간부들이야말로 사회주의하의 기생충입니다 ... 설마 탐관오리를 타도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관료주의를 반대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218) 한 구절을 더 적어볼께요. 하나의 정당이나 하나의 정부가 만약 국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곧 그 정당이나 정부를 전복시킬 권리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의 당을 책임지고 있는 간부나 한 정부의 관원이 곧 국민의 공복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오히려 국민의 주인 행세를 하고 국민들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사또 영감처럼 행세한다면 국민들은 그 사람을 타도할 권리가 있습니다!(221) 엥? 정부를 전복?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 국민들이 타도할 권리?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저는 읽으면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이 일당 독재의 권위주의 정부라는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통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중국에서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다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뒷 부분을 읽어보면 이 책에 어떻게 출판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옌은 현실을 잘 파악하는 작가답게 저런 구절 뒷부분에 앞부분을 중화시킬 만한 구절들과 내용들을 채워 넣으며 중국에서 문제가 되지 않게 소설을 잘 써내려갑니다.(^^;;) 위화의 소설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저는 중국의 현실이 중국 소설가들의 문학성을 잘 키워준다고 생각합니다.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사회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 소설가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회하고 풍자와 해학 속에 잘 녹여내야 합니다. 현실의 토양이 중국 소설가들의 문학성을 키워주는 역설적인 틀이 되는 것이죠.

어쨌든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2권도 1권의 유지를 이어갑니다. 개혁개방이라는 현실을 겪은 사람들은 돈돈 노래를 부르며 현실을 돈으로 재단합니다. 죽은 아버지를 눈앞에도 두고도 형제들은 돈을 따지고, 유산은 철저하게 분배합니다. 형제들은 돈 때문에 어머니를 돌보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가난한 현실 때문에 자살한 여동생의 영혼을 돈을 받고 여동생과 결혼하지 못해 자살한 남자와의 영혼결혼식에 팔아넘깁니다. 마늘 봉기에 참여했다 감옥에 갇힌 그들의 어미니는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자살합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부는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고, 가난한 농민들의 현실을 파악못해 수매를 제대로 못해서 농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현정부는 분노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불법은 용서할 수 없다며 봉기에 가담한 아무나 잡아가두고 형을 때려버립니다. 감옥에서는 선배 죄수가 후배 죄수를 마구 구타하고, 얻어맞는 후배 죄수는 살아남기 위해 선배 죄수의 명에 따라 자신의 오줌을 들이마십니다. 구타 당하는 현실이 괴로운 후배 죄수는 자신의 과거로 도피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그는 현실의 부조리 때문에 두 번이나 오줌을 들이마신 경험이 있습니다. 죽은 형제의 아버지는 죽기전에 현정부에 마늘을 팔러 갔다 계속해서 돈을 노리는 관료들의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는 수매를 거부당하고 돌아가다가 현정부 서기의 차에 치여 죽습니다. 현정부는 그의 친척을 내세워 가족의 아우성을 틀어막습니다. 자살한 여동생이 사랑한 남자는 돈만 밝히는 가족에게 그렇지 살지 말라고 따졌다가 오히려 여동생을 죽인 범인으로 몰립니다. 봉기를 주도한 인물 중 한명인 그는 당당하게 잡혀가서 현정부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죠. 봉기 때문에 잡혀간 이들을 변호하는 젊은 군관은 현정부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큰 호응을 얻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대로 형을 받죠. 그나마 군관의 비판이 알려지며 몇몇의 현정부 관료가 벌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은 더 큰 직위를 얻고 관직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돈 때문에 영혼결혼식에 팔려가고, 여인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남자는 정신이 이상해져 감옥 밖으로 나오려고 하다 총살당합니다. 봉기를 주도한 맹인은 현정부를 비판하는 노래를 계속 부르다 얼어 죽고요..

여기까지 적어놓고보면 이 책의 이야기는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모옌은 이 암울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희극적이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풀어내며 결코 암울하지 않게 표현합니다. 바뀌지 않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정부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관료들, 한번 봉기했지만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농민들, 개혁개방의 분위기 속에서 이기적이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사람들 같은 어두운 이야기를 생기 있고 유머러스하며 가독성 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모옌의 이야기의 재능은 정말 뛰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모옌은 중국의 기나긴 역사 앞에서 이어져내려온 농민들의 생명력을 믿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힘겨운 현실 앞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내고 버텨내면서 현실을 극복해온 농민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모옌은 중간중간 농민들과 자연의 모습을 생명력 넘치게 그려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옌의 의도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도 같이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도 견디고 버티면 그 현실은 지나갈 것이기에. 추가한다면 그 현실이 지나가고 새롭게 다가오는 현실이 이전보다는 더 좋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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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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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4.작가소설-아리스가와 아리스

다른 삼류 작가나 자칭 소설가들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눈물을 쏟아낼 작품을 쓰는 겁니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겁니다. 미친듯이 써서 기관총처럼 쉴 새 없이 서점에 콱 박아 넣는 거예요. 서점 책장을 당신 저서로 꽉꽉 채우는 겁니다. 할 수 있어요.(26~27)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을 쓰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작업일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

마감이 닥쳐오면 고작 한 가지 발상을 얻기 위해 여덟 시간 정도 서재에 틀어박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감이 그리 내 맘대로 쉽게 솟아날 리 없다. 산더미 같은 메모를 뒤지고,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고, 한숨을 쉬고,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을 걱정하여, 모방의 유혹과 싸우고, 아이디어를 몇 가지 메모해, 그 모든 것에 불만을 느끼고, 커피를 마시고, 재능이 바닥난 것 같다고 절마하여, 자포자기하고, 비누로 손을 씻고, 다시 메모를 읽어본다. 결코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91~92)

소설만 타인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야. 음악이나 미술 작품도 그렇잖아. 작품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지. 그건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가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으니까.(135)

이렇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그런 비결은 없어. 다만 포기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아.(139)

아무리 따뜻한 가정이 있어도 작가란 원고를 마주할 때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법이잖아. 누군가 이런 말을 했지. '작가란 집에 있으면서도 가출한 상태다'라고.(216)

"...그런 숭고하고 특권적인 순간이 우리 작가들에게 있어?"

"유감이지만 그건 없어. 비교적 잘 씌었네, 라고 생각하는 정도지."(226)

일단 써야지. 쓰고, 쓰고, 계속 써대는 인간만이 일류라 불리는 작가가 되는 거야.(245)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작가는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글을 쓰는지가 궁금했던 시절이 분명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저는 과거처럼 작가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작가들이 작가와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소설들을 지속적으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소설들을 읽으며 작가라는 존재가, 글이라는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걸, 직업인으로서 버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기에 작가의 삶에, 작가라는 직업에, 환상을 가질 수 없게 되었죠. 이렇게 작가들이 작가 자신의 삶을 토대로 쓰는 일종의 '작가소설'은, 외부자들이 관찰해서 쓰는 외부자들의 소설과는 달리, 내부자들만이 아는 내부자들의 진실을 알려주는 '내부자 소설'의 묘미를 보여줍니다. 그 묘미 때문에 제가 계속해서 '작가소설'을 읽는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쓴 <작가소설>도 작가들이 쓰는 내부자 소설의 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나카야마 시치리가 쓴 <작가탐정 부스지마>와 비교해서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양한 추리소설을 쓰며 '나카야마 시치리 월드'라는 특유의 세계관을 축조해가는 나카야마 시치리가 쓴 <작가탐정 부스지마>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이용해서 작가들의 삶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작가탐정 부스지마가 작가들이 얽힌 살인사건을 해결하며 작가들의 삶과 작가라는 직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형식. 그 책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작가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에 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로 작가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은 <작가탐정 부스지마>와 비슷하지만, 각 작품들간의 응집력은 약합니다. 마치 그때그때 저자가 작가들에 관한 소설을 써놓고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처럼. <작가탐정 부스지마>에 비해 일관성과 응집성은 약하지만 형식도 다양하고, 작가에 관해서 훨씬 더 넓은 영역을 다룬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서로 상이한 다양한 소설들이 모여 있는 작가소설집이라고 해야할까.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저는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 하나하나가 작가의 어떤 상황이나 모습에 대한 형상화라고 느껴졌습니다. 묶인 채로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써야 하는 '글 쓰는 기계'가 나오는 <글 쓰는 기계>는 글 쓰는 기계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 같았고, <죽이러 오는 자>에서는 자신이 쓴 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작가의 모습을 독자를 죽이는 작가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 같았고, <마감 이틀 전>에서는 마감 때문에 힘들어하다 환상에 빠지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마감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 같았고, <기쓰코 선생>에서는 고등학생의 인터뷰에 삐딱하게 대응하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힘겨운 작가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사인회의 우울>은 작가가 겪어야 할 사인회의 모습을 악몽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작가 만담>에서는 대화의 형식으로 작가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들만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쓰지 말아주시겠습니까>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설로 써낼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애환이 공포스런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꿈 이야기>에서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이 판타지적인 느낌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이렇다 보니 읽다보면 독자는 작가에 대해서 예전보다 더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뭐 제가 예전보다 작가에 대해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작가소설> 같은 작가에 관한 소설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라는 존재는 무엇이든 글로 써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자신들이 잘 알고 있고 잘 쓸 수 있는 작가에 관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내부자 소설로서의 묘미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런 책들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한다면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에 관한 소설을 읽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 소설들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작가와 그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작가소설'을 읽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작가소설>은 그런 우리의 준비를 위한 좋은 대응 교재가 될 것입니다. 작가소설이 앞으로도 어떻게 쓰여질지를 예측하는 대응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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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5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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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3.미겔 스트리트-V.S. 나이폴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그 소녀를 버렸을까?"

...

"그야 우리들 사이에서 사내답게 살기 위해서였지."(19)

우리 거리에서는 아무도 포포가 파렴치한 행위 때문에 감옥게 가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30)

엘리아스의 입에서 나온 그 '문핵'이란 말은 내가 들어본 말 중 가장 아름다운 낱말이었다. 그 말은 먹을 수 있는 것, 그것도 초콜릿처럼 맛이 아주 풍성한 그 어떤 것으로 들렸다.(52)

너 또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 그런데 너도 시인이라면 모든 것을 보고 울게 된단다.(72)

삶이란 참으로 끔찍스러운 것이라고. 불운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그저 앉아서 그 불운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니.(148~149)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딸이

양키의 돈을 벌러 일하고 있네.

온 나라에 양키의 돈!

오, 양키의 돈이여!(239)

트리니다드에서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고도 처벌을 면한 적이 있어? 트리니다드에서는 사람들이 결백하면 결백할수록 감옥살이를 더 많이 해야 하고 뇌물도 더 많이 먹여야 해.(265)

저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에 푹 빠져 지냈고, 이야기를 모아놓은 이야기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이야기에 홀려 있다고 해야할까요? 이야기에 홀린 사람이 현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을 그저 지나칠 수는 없겠죠. 맞습니다. 저는 이야기에 홀린 사람답게 현대의 이야기인 소설을 즐겨 읽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연속적으로 써 온 서평중에 90프로 이상이 소설에 관한 서평이니 말 다 했죠. 물론 저라고 소설만 읽는 것은 아닙니다. 올해 초부터 5월까지는 소설은 거의 안 읽고 동양고전,서양고전에 엄청 빠져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5월말 쯤에 칸트의 책 중에 <실천이성비판>인가 <판단력비판>인가 하는 책을 읽는데(정확하게 어떤 책인지 기억이 안 납니다^^;;) 갑자기 구토가 나올려고 하더군요. 책 읽다가 구토가 나올려고 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서 당황했습니다. 제가 사르트르의 <구토> 속 주인공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이런 이해도 안 되는 어려운 책을 왜 읽냐'하는 회의감도 들고, 읽으려고 책을 펴면 머리 아프고 도저히 못 읽겠고. 그래서 저는 책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완벽한 올스톱. 책읽다가 체한 셈치고 책읽기를 포기하고 두 달동안 지냈습니다. 책 말고 다른 걸로 취미생활을 하면서. 두 달의 휴식기간을 거치고 한 권씩 읽어보니 이제 읽을만 하겠더군요. 아직 완벽한 회복은 안 됐다고 생각해서 요새에는 제 전공분야인 이야기쪽으로만 파고들어 읽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홀린 사람이 자기 본분을 회복했다고 해야할까요?

현대판 이야기인 소설을 계속 읽다보니 저 나름다로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고대와 중세의 이야기꾼들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현대판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읽을 때면 저는 즐겁고 너무 기쁩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파고들어가서 이야기해보죠. 어떤 면에서 본다면, 현대의 소설가들은 모두 이야기꾼들의 후계자들입니다. 하지만 전통적 서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소설가들을 굳이 이야기꾼의 범주에 넣을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소설을 이야기꾼의 소설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소설은 그들 나름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취향의 측면에서 저는 그들의 소설보다는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더 즐겁게 봅니다. 취향의 문제라서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저를 즐겁게 하고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 좋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서사를 거부하는 소설가들의 소설을 안 읽는 건 아닙니다. 그런 소설들을 읽을 때는 이야기꾼들의 소설과는 다르게,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읽어나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들의 소설을 읽을 때는 아이처럼 기뻐한다는 건 사실이라서, <미겔 스트리트>가 좋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네요. ㅎㅎㅎ <미겔 스트리트> 서평을 쓰면서 <미겔 스트리트> 이야기가 이제야 나온다니 해도해도 너무하네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이번은 앞의 말들이 너무 많네요^^;; 앞으로는 서두 부분의 말을 줄이고 본문의 말을 늘이도록 하겠습니다.(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가죠. <미겔 스트리트>를 읽으며 다른 작가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중국의 모옌. 나이폴처럼 모옌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죠. 이야기꾼에 속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비슷하게 여겼던 건 작품에서 드러나는 '어떤 느낌'입니다. 모옌은 평범한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며 인간 삶의 복잡미묘한 부분을 복잡미묘하게 잘 드러내는 작가입니다. 어딘가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유머러스한 삶의 진실을 이야기로서 잘 풀어낸다는 말입니다. <미겔 스트리트>는 저한테는 모옌의 소설과 같은 느낌을 전해주었습니다.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의 수도인 '포트 오브 스페인'의 하층민 거주지인 미겔 스트리트 사람들의 삶을 어린 '나'의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나'의 눈앞에 포착된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우습고 권태롭고 그러면서도 슬픕니다. 비극과 희극인 기묘하게 섞여들어간 그들의 삶을 어려운 말 쓰지 않고 이야기로서 술술 풀어내며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닌 '삶의 극'으로 묘사해내는 게 '모옌'과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잘 쓰여진 이야기들은 비극과 희극을 넘나든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분명히 있는 거 같습니다.

차이점도 분명합니다. 모옌이 격동의 20세기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의 수도인 포트 오브 스페인에서 살아가는 식민지를 경험한 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거든요. 격동의 흐름 속에서 엄청난 파고를 겪었지만 모옌의 중국인들은 공통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고, 실제 현실이 어떻든 자기 삶을 살아나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나이폴의 식민지인들은 다릅니다. 노예로서 아프리카에서 강제로서 건너온 흑인들과 식민지 시절 식민지 경영을 위해 식민지 종주국이 강제로 이주시킨 인도계 사람들이 대다수인 트리니다드 섬은 모옌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 개개의 사람들로서 존재합니다. 강제로 '이식된 삶'을 가진 식민지 거주민들이 단일한 국가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을 가질리는 없는 것이죠. 단일한 공동체적 정체성이 없으니 그들은 '주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종주국에 사회적,문화적,의식적으로 종속된 채 그들은 백인들의 삶과 문화를 동경하며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끊임없이 평가절하합니다. 공동체적 정체성이라는 뿌리 없이 식민지 종주죽에 종속된 객체로서의 삶이 트리니다드 섬 사람들의 삶입니다. 개개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부패와 부도덕이 널리 퍼진 건 말할 것도 없겠죠.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성공적인 삶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공된 삶을 살지 못하니 허무하며 권태롭죠. 허무와 권태, 부패, 부도덕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성공하지 못한 삶. 그게 나이폴이 <미겔 스트리트>에서 그려내는 트리니다스 섬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섬을 빠져나가는 걸로 끝납니다. 마치 나이폴이 식민지를 빠져나가 영국에 가서야 자기 정체성을 자각한 것처럼, 소설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도 최후의 출구로서 식민지를 빠져나가는 걸 선택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생각할 일이죠.

그렇다고 해서 소설에서 그려내는 식민지인들의 삶이 지옥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 몸부림치고, 나름 서로간에 온정을 간직하고, 서로를 돕기 위해 노력합니다. 온기와 온정, 연대의 몸부림, 동정 등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바탕인 거죠. 그곳은 지옥이 아니라 힘겹고 고달픈 삶이 사는 이들이 가득한 곳일 뿐입니다. 나이폴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로 그들의 삶을 우리가 쉽게 읽을 수 있게 풀어냅니다. 이야기꾼의 재능으로 너무나 먼 곳의 삶을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나이폴의 손 끝에서 빚어내는 이야기의 힘을 통해 독자의 삶에 그들의 삶이 다가온 순간 이야기의 마법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이 놈의 마법 때문에 제가 이야기를 끊을 수 없나 봅니다. 그리고 저 놈의 마법 때문에 앞으로도 나이폴 같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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