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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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4.작가소설-아리스가와 아리스

다른 삼류 작가나 자칭 소설가들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눈물을 쏟아낼 작품을 쓰는 겁니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겁니다. 미친듯이 써서 기관총처럼 쉴 새 없이 서점에 콱 박아 넣는 거예요. 서점 책장을 당신 저서로 꽉꽉 채우는 겁니다. 할 수 있어요.(26~27)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을 쓰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작업일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

마감이 닥쳐오면 고작 한 가지 발상을 얻기 위해 여덟 시간 정도 서재에 틀어박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감이 그리 내 맘대로 쉽게 솟아날 리 없다. 산더미 같은 메모를 뒤지고,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고, 한숨을 쉬고,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을 걱정하여, 모방의 유혹과 싸우고, 아이디어를 몇 가지 메모해, 그 모든 것에 불만을 느끼고, 커피를 마시고, 재능이 바닥난 것 같다고 절마하여, 자포자기하고, 비누로 손을 씻고, 다시 메모를 읽어본다. 결코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91~92)

소설만 타인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야. 음악이나 미술 작품도 그렇잖아. 작품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지. 그건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가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으니까.(135)

이렇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그런 비결은 없어. 다만 포기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아.(139)

아무리 따뜻한 가정이 있어도 작가란 원고를 마주할 때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법이잖아. 누군가 이런 말을 했지. '작가란 집에 있으면서도 가출한 상태다'라고.(216)

"...그런 숭고하고 특권적인 순간이 우리 작가들에게 있어?"

"유감이지만 그건 없어. 비교적 잘 씌었네, 라고 생각하는 정도지."(226)

일단 써야지. 쓰고, 쓰고, 계속 써대는 인간만이 일류라 불리는 작가가 되는 거야.(245)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작가는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글을 쓰는지가 궁금했던 시절이 분명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저는 과거처럼 작가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작가들이 작가와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소설들을 지속적으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소설들을 읽으며 작가라는 존재가, 글이라는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걸, 직업인으로서 버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기에 작가의 삶에, 작가라는 직업에, 환상을 가질 수 없게 되었죠. 이렇게 작가들이 작가 자신의 삶을 토대로 쓰는 일종의 '작가소설'은, 외부자들이 관찰해서 쓰는 외부자들의 소설과는 달리, 내부자들만이 아는 내부자들의 진실을 알려주는 '내부자 소설'의 묘미를 보여줍니다. 그 묘미 때문에 제가 계속해서 '작가소설'을 읽는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쓴 <작가소설>도 작가들이 쓰는 내부자 소설의 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나카야마 시치리가 쓴 <작가탐정 부스지마>와 비교해서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양한 추리소설을 쓰며 '나카야마 시치리 월드'라는 특유의 세계관을 축조해가는 나카야마 시치리가 쓴 <작가탐정 부스지마>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이용해서 작가들의 삶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작가탐정 부스지마가 작가들이 얽힌 살인사건을 해결하며 작가들의 삶과 작가라는 직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형식. 그 책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작가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에 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로 작가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은 <작가탐정 부스지마>와 비슷하지만, 각 작품들간의 응집력은 약합니다. 마치 그때그때 저자가 작가들에 관한 소설을 써놓고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처럼. <작가탐정 부스지마>에 비해 일관성과 응집성은 약하지만 형식도 다양하고, 작가에 관해서 훨씬 더 넓은 영역을 다룬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서로 상이한 다양한 소설들이 모여 있는 작가소설집이라고 해야할까.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저는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 하나하나가 작가의 어떤 상황이나 모습에 대한 형상화라고 느껴졌습니다. 묶인 채로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써야 하는 '글 쓰는 기계'가 나오는 <글 쓰는 기계>는 글 쓰는 기계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 같았고, <죽이러 오는 자>에서는 자신이 쓴 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작가의 모습을 독자를 죽이는 작가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 같았고, <마감 이틀 전>에서는 마감 때문에 힘들어하다 환상에 빠지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마감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 같았고, <기쓰코 선생>에서는 고등학생의 인터뷰에 삐딱하게 대응하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힘겨운 작가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사인회의 우울>은 작가가 겪어야 할 사인회의 모습을 악몽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작가 만담>에서는 대화의 형식으로 작가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들만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쓰지 말아주시겠습니까>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설로 써낼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애환이 공포스런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꿈 이야기>에서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이 판타지적인 느낌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이렇다 보니 읽다보면 독자는 작가에 대해서 예전보다 더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뭐 제가 예전보다 작가에 대해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작가소설> 같은 작가에 관한 소설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라는 존재는 무엇이든 글로 써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자신들이 잘 알고 있고 잘 쓸 수 있는 작가에 관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내부자 소설로서의 묘미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런 책들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한다면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에 관한 소설을 읽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 소설들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작가와 그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작가소설'을 읽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작가소설>은 그런 우리의 준비를 위한 좋은 대응 교재가 될 것입니다. 작가소설이 앞으로도 어떻게 쓰여질지를 예측하는 대응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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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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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2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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