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고전읽기 7회 모임 후기
이번 모임은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앞서 읽었던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은 대화편 중에서 그나마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고르기아스>부터는 말을 주고받으며 논전을 벌이는 부분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낯설거나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상과 비슷하게 참석율은 평소보다 낮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화가 너무 좋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썼던 '고전독서모임'이 필요한 이유에 썼던 대로, 저는 독서모임에서 대화를 나무며 <고르기아스>가 제가 생각한 것보다 좋은 책이라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제가 몰랐던 책의 장점과 다양성과 역동성이 대화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고 해야하나. 모임을 끝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래서 고전독서에는 독서모임이 필요하다고. 밑의 글은 그 대화의 일부분을 기록한 것입니다.
000: 어렵지 않게 쫙 읽어나갔다.
00: 수사학 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덮었는데 조금씩 읽다보니까 플라톤의 도덕적 인간에 대한 생각이 나와 비슷해서 읽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수사학에 대한 이야기.
000: 수사학에 빗대어 플라톤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데 말꼬리를 너무 잡고 늘어져 짜증이 나는 면은 있었다. 연설을 말장난처럼 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몸과 영혼에 필요한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공감이 갔다. 결론적으로 봤을 때 정의로운 삶에 대한 주장을 하는 것 같았다. 작년의 촛불혁명과 이어지는 구절이 있는 것 같아 살펴봤다.
00: 말의 기교 보다는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카페에 비유해보면, 인테리어나 데코가 좋은 카페보다는 커피의 맛이 중요한 것과 같다.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나 불의를 당하면 벌을 받은 것이 옳다는 말에 동의한다.
000: 정치에 수사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를 할 생각이라면 수사학이 필요하다. 수사학을 너무 비하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치가가 대중의 마음을 읽는 것에는 수사학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말이 옳다는 생각은 한다.
00: 수사학이 중요하지만, 플라톤식 FM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000: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상태에서 플라톤식 이상주의가 마음에 들지만, 현실에서의 실천은 어렵다. 실천을 위해서 수사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공감을 얻는 게 중요하다.
000: 칼리클레스의 반발하는 모습이 인간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감정에 상해 소크라테스에게 따지는 부분에 공감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 말에 마음이 안간다는 것을 이 책의 소크라테스를 보고 이해했다. 연극 한 편을 보는 기분으로 읽으면 된다.
00: 칼리클레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솔직하게 철학의 무용론을 부분을 주장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놓고 소크라테스가 화내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걸 보고 소크라테스가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가 마음에 들고 정이 간다.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고지식한 스타일이라서.
000: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찬성하지만, 칼리클레스의 말이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철학작의 이상이 실천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동의한다. 철학과 정치가 다른 것 같다.
00: 알맹이가 있고 수사학이 있어야 하는데 알맹이는 없고 수사학만 있는 것 같은 모습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소크라테스에게 더 끌린다.

잠시 보충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당하는 칼리클레스 같은 인물이나 대화를 주도해가는 소크라테스도 우리의 대화를 통해 다양한 면모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책 속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하던 인물들이 독서모임에서의 대화를 통해 생생히 살아 있는 인간이 된 것이죠.^^ 
정치와 수사에 관한 이야기도 중요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책에 적혀 있는 생각을 확장해서 우리 삶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걸 시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걸 실행을 한 것인데, 해놓고 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모임에 참여하신 분들은 열심히 자신의 생각, 자신이 마음속에 쌓아둔 걸 토해놓으며 집중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모두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대화를 나눈 시간이 내실이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걸. 독서모임의 시간이 하나의 의미있는 삶의 시간이 되었다는 걸. 이런 시간을 경험한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독서모임을 하러 나옵니다. 충만한 삶의 시간을 경험한 분들은 다시 그런 것을 경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모임은 <프로타고라스>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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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두고 고전독서모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독서모임의 후기를 써야 하는데(^^;;) 일단 독서모임을 하면서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어 이에 대해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제목은 '고전독서모임이 필요한 이유'. 뭔가 엄청나고 멋지고 논리적인 말을 해야할 것 같지만, 제 능력상 그렇게는 안됩니다.ㅎㅎㅎ 어쩔 수 없이 제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솔직하게 적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사실 <고르기아스>를 두고 고전독서모임을 하는데 걱정이 있었습니다. 앞에 읽은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에 비해 <고르기아스>는 플라톤의 중기작품답게 분량도 많고, 소크라테스 특유의 말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어 무너뜨리고 자신의 논리를 상대방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문답법이 핵심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말을 주고받으며 생겨나는 플라톤 대화편의 독특한 흐름을 수용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힘들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 걱정때문인지 몰라도 오늘 모임은 참여인원이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독서모임을 해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아~~ 이래서 고전 읽기에 독서모임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간단합니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제 혼자의 상상 속에 갇혀 있던 <고르기아스>가 우리의 말을 통해 생명력을 얻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고르기아스>의 의미가 독서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통해 충분한 힘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해볼께요.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더 재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더 의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어렵지 않은 책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과거에 갇힌 책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 숨쉬는 '현재의 책'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삶과 소통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독서모임이라는 공통의 말을 주고받는 시간을 통해 혼자서 할 수 없는 <고르기아스>에 대한 '공동비평'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읽은 <고르기아스>는 우리가 가진 독서모임 때문에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고전독서모임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고전에 대한 공동비평의 장이자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전의 공유를 이루어냅니다. 물론 혼자서도 고전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혼자서 하는 원맨쇼에 가깝겠죠. 그것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여러명이서 하는 비평은 혼자서 할 수 없는 다수가 모여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말을 토해내고, 토해낸 말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말과 언어의 울림이, 조화를 이루며 빚어내는 고전 공동비평을 한 번 겪고나면 깨닫게 됩니다. 고전 읽기가 얼마나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는지. 고전독서모임에 얼마나 힘이 있고 유의미한지. 더불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 어떤 책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이상 저만의 '고전독서모임'이 필요한 이유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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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 정치의 도구가 된 세계사, 그 비틀린 기록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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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승리이며,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다(158)
국민 만들기,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국민들은 결코 고정불변의 정치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의 정치 성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요동쳤으며, 권력자들은 힘들게 쌓아 올린 통합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근대의 권력이 안게 된 또 하나의 과제는 애써 만들어낸 충성스러운 국민의 변절과 변심을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권력자의 가치관 또는 비전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에 신성을 부여하면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협박했는데, 국민들이 패배주의에 젖어 있을수록 이 전략도 효과가 있었다.(7)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기억과 생각을 가진 사회는 권력자에게는 유토피아이나 국민들에게는 디스토피아다. 국민을 길들이려는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명분을 민족의 신성한 역사와 동일시하며 국민들의 동참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권력자들은 종종 역사 교과서를 고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는데, 이 역시 국민을 변하지 않는 지지층으로 만드는 데 방해되는 기억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8)
권력이 역사와 기억을 바꾸려 할 때마다 사회적 반발과 분열이라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과거에 대한 집단의 기억이 결코 모두 같을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늘 유혹에 빠진다. 보수주의자들은 기득권과 전통적 가치를 영원한 신화의 이름으로 지키고자 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개혁의 신화를 영속화하려 한다. 역사 논쟁은 필연 정치 논쟁이며, 한 사회과 과거 기억에 대한 갈등 앞에서 화해 또는 분열로 나아가는 갈림길이 된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며, 현재이자 미래가 되는 셈이다.(9)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얘기지만(^^;;) 과거에 저는 과격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고구려의 옛영토인 만주벌판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그러나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과격한 민족주의는 저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책을 읽으며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인식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으며 접한 인식과 다양한 관점,생각,사상,문화들이 저로 하여금 과격한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을 사그러뜨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저는 그 시절의 저를 황당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ㅎㅎㅎ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를 읽으며 과격한 민족주의에 빠져있던 과거의 나가 떠올랐습니다. 독재자들이나 독재권력이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악용하는 사례들속에서, 그 역사적 허구에 빠져 독재자와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이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과거의 나'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찬란한 과거의 민족주의적 신화에 매달리며 현재 권력을 용인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저는 이런 민족주의의 악용 사례들에 대해서 독서모임에서 종종 이야기해 왔습니다. 저만의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여기에 한 번 적어볼께요. 제가 보기에 인간은 집단동물 같아 보입니다. 고양이 같은 개체적 삶의 방식을 가진 동물들은 할 수 없는 행동을 인간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소수는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집단일 때 더 용감해지고 과격해집니다. 저는 이런 여러 모습들속에서 인간이 집단적인 행동에 익숙한 집단적 행동의 매커니즘을 가진 동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근대라는 서양에서 생겨난 독특한 시대적인 흐름은 집단보다는 개체를 강조하는 쪽으로 인간을 몰고갑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나'라는 존재를 강조하는 근대적 시대의 흐름과 집단동물로서의 본능의 괴리가 발생하는 삶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본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능은 시간의 틈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체제를 바꾸는 혁명이나 개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자신과 다른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구 죽이는 학살이나 전쟁, 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나타나든 집단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은 언제나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전체주의,파시즘,인종주의,민족주의나 아니면 진보과 혁명,개혁이라는 이름을 내건 사상과 철학과 함께.

본능을 거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본능이 모습을 내밀 때 본능이 위험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본능의 발현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완벽한 해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 확률이 높은 방법은 있을 수 있겠죠. 교육과 사회 시스템, 문화와 관습의 힘을 이용하는 것 같은. 만약에 이런 것 없이 정치적 목적때문에 집단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을 악용하게 된다면, 저는 본능이 나쁜 길로 가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같은 책에서 나온 사례들이 본능을 어떻게 악용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미국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위대한 국가라는 미국 예외주의의 사고방식이나 중국 공산당의 과거의 과오를 묻어버리고 공산당의 뛰어남만 강조하는 중국의 애국주의적 역사교육,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과 과오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2차대전당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억만 강조하는 현대 러시아의 위대한 애국전쟁의 신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위조하고 위대한 힌두문명의 신화에 집착하여 과거의 정치시스템에 현대를 맞추려는 현재 인도 집권당인 인민당의 사고방식과 역사교육 등등. 이 사례들대로 나아가면 우리는 더 편협하고, 더 이기적이고, 더 폭력적인 사람이나 공동체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집단동물로서의 본능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죠.

위의 사례들을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떠오르는지를 이제부터 말해볼께요. 정신건강의 측면에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나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나 제대로된 자아인식도 아닌데다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면 우울증이고,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면 성격장애입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좋은면과 나쁜면을 포함해서 그 모두를 가감없이 바라봐야합니다. 이걸 공동체로 확대시켜 볼께요. 조금 더 건전하고 건강한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공동체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인식이 건강해야 할 겁니다.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자기자신을 있는대로 바라보는 인식을 통해. 공동체 인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공동체가 과거의 역사를 오직 긍정의 방식으로만 바라본다면 그건 건강하지 않은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에 나오는 사례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어떤 부정도 용납하지 않고 선하고 위해단 역사에 집착하여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권력자의 모습들이 건강하지 않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해답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다양한 해답이 있겠지만 책의 시각을 따라서 역사학과 역사교육 입장에서의 해답을 생각해본다면, 우리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완벽한 의미의 객관적인 역사는 있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좋은 것은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고, 나쁘면 나쁜 점을 고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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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 지음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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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으로 들어온 이상 철학은 문학의 텃세를 감수해야 합니다. 문학과 철학의 동거는 사이좋은 동거만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해야 하고 연기해야 하며 때로는 성격도 버려야 합니다.(8)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에 관한 진실일 뿐이에요.(419)

우리가 의식하든 안하든 한 시대의 철학이나 사상은 우리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돈을 최고로 여기든 안 여기든 우리는 로또 1등이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물질주의적이고 물신적인 경향이 우리 삶에 스며들었으니까요. 유럽의 중세라면 사람들이 우리 시대처럼 로또 1등이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탐욕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시절이니까요.

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의식하든 안하든 그들의 삶에 그들이 살다간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이 스며들어 있을 수밖에 없고, 작품을 쓸 때 그것이 작품에 영향을 미쳐 작품이 완성됐을 때는 문인 자신의 삶에 스며든 사상이나 철학이 작품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문인 자신이 의식을 하고 사상이나 철학을 작품에 담으려 했다면 더 그런 경향이 강하겠죠. 그래서 저는 사상이나 철학이 없는 문학작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상이나 철학은 작품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작품에 스며든 사상이나 철학이 잘 드러나나 아니면 잘 드러나지 않냐 하는 차이가 있겠죠.(작품의 완성도 얘기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알라딘 인문학 독서 블로거로 유명하고 문학과 인문학을 주제로 활발히 글을 쓰고 강연도 하는 '로쟈' 이현우 씨가 쓴 <문학 속의 철학>은, 저자 자신이 '문학 속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했던 강의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제가 위에 썼던 것을 로쟈 이현우 씨가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강의도 하고 책도 낸 것이죠. 저자는 자신이 과거부터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박이문 선생이 비슷한 주제로 썼던 다른 책인 <문학 속의 과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머리말에 쓰고 있습니다. 저도 이 주제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어서 박이문 선생의 책을 저자가 주의 깊게 읽어나간 것과 유사하게, 저자의 책을 주의 깊게 읽어나갔습니다. 어떤 부분은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깨어져 나가는 경험을 했고요, 어떤 부분은 저와 생각이 상당히 비슷해서 공감을 했고, 어떤 부분은 모르는 걸 알아나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다양한 생각의 흔적들을 다 글로 쓰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일정 부분의 흔적들만 글로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밑에 적은 글들이 그 흔적들입니다.

안티고네. 누군가의 말대로 해석을 하나의 권력이라고 본다면,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헤겔의 해석이 가장 큰 권력으로서 작용해왔다. <문학 속의 철학>에서 저자인 이현우는 헤겔의 해석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이 해석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해석의 권력에서 벗어하는 하나의 방법을 배우는 셈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현우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해석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자신만의 자세가 되기 때문에.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신을 변호하는 의도로 선과 악의 문제를 논하다 결론적으로 여기가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세상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말한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의 이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데 추가적으로 내가 의문을 품는 것은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부분이다. 선과 악이라는 게 절대적인 기준이었던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닌가? 선과 악의 개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인간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만들어나가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이 개념이 신의 선과 악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은 신에게 속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신에게 속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없다면, 그에 대해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더 좋은 게 아닐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 대한 이현우의 해석을 따라가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들에 의하면, 주류경제학이 기본적으로 정의하는 합리적 인간이란 옳은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확률이 높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인간은 충분히 자기 이익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이득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에만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담긴 건, 합리적 인간 개념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식 반론일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죽음은 한 번 경험하면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과정을 차분하게 훑어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독자를 죽음의 길로 서서히 안내하며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이 경험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죽음을 간접체험하며 삶의 힘, 삶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간접체험으로 한 번 죽으며 우리는 다시 살아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 예술이 진리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을까? 조이스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이 주장에 회의적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다, 진리가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있는지도알 수 없는데 예술이 진리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진리가 있다고 쳐도 예술이 그 진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거기에도 나는 회의적이다. '나는 예술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어요'라거나 '나는 예술을 진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로 만들 수 있어요'가 가능한 일일까?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교적 믿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진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기반한 종교.

싯다르타. 삶의 진실을 꿰뚫는 지혜를 말로서 전달할 수 있을까? 지혜를 말로서 전달하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서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지혜의 전달방식 중 하나라면, 문학도 거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싯다르타>가 지혜를 전달할 수 있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만 나는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문학의 몸부림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처절한 몸부림이 빚어내는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교감의 힘을 보니 지혜를 전달할 수 있냐 없냐를 떠나서 시도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이 문학적인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교감의 힘을 포함한 총체적인 그 무엇인가를 '지혜'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일부로서의 지혜.

사랑에 빠진 여인들. 분명히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현우의 이 소설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내가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야겠다. 조금 더 자세히, 조금 더 꼼꼼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D. H. 로렌스의 다른 소설들도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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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자비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이곳에 있는 인간들이 저를 대하는 걸 보면, 저도 인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니지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과는 다른 종일뿐만 아니라 유의미하다는 점이 제 머릿속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368)
그것이 당신이 태어나기 3천 년 전부터 일이 돌아가는 정상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태였다는 점밖에 없습니다. 그 상태에 의문을 품을 이유가 전혀 없었겠지요. 아난더는 당신의 생사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졌고, 당신이 당신이 아끼는 누구와도 와무런 개인적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전부는 모두가 놀이판의 놀이패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우리를 희생시킬 수 있었고, 희생시켰지요.(378)
드라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승리 아니면 재앙으로 끝난다. 행복을 성취하든가, 아니면 희망까지 틀어막는 비극적인 패배뿐이다. 하지만 진짜 삶에는 끝난 뒤에도 언제나 뭔가가 있다. 늘 다음 날 아침이 있고, 또 다음이 있고, 늘 바뀌고, 잃고 얻는다. 늘 한 걸음 다음엔 다음 걸음이다.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한 번의 진짜 끝이 올 때까지. 하지만 우리를 압도할 듯 커 보이는, 어렴풋이 먼 그 끝조차도 하나의 작은 끝에 불과하다. 여전히 모두에게는 다음 날 아침이 있다. 우리를 뺀 우주의 엄청나게 많은 나머지 다수에게 그 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끝은 임의적일 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모든 끝은 아무 끝도 아니다.(382)

<사소한 자비>는 <사소한 정의>,<사소한 칼>과 이어지는 스페이스 오페라 앤 레키의 '라드츠 제국 3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사소한 자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라드츠 제국 3부작의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명사는 전부 그녀. 라드츠 제국 시리즈를 읽을 때 가장 낯선 것이 이 부분입니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모든 대명사는 '그녀'입니다. 계속해서 '그녀'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나오는 사람들이 전부 여자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성구분 자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대명사 그녀의 활용은 '남성이 이럴 것이야', '여성은 이럴 것이야' 하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라드츠 제국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킵니다.

2.종교의 중요성. 아난더 미아나이라는 황제가 이천년 간 다스려온 라드츠 제국은,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우주제국입니다. 하지만 이 우주제국은 종교도 중요시합니다. 라드츠 제국 자체도 제국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가 있고, 제국에 속한 행성들도 각자의 종교가 있고, 이것들이 엮여서 제국의 문화, 제국에 속한 행성 자체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외계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종교 이야기는 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종교에 중심을 두면서 라드츠 제국이라는 가상의 제국에 종교,문화의 양상을 보이며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인간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서 종교가 빠질 수 없는 요소이자 영향력이 강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3.분열하는 황제. 라드츠 제국을 이천년 간 다스려온 황제 아난더 미아나이는 몇십 개의 신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몇십 개의 신체를 가지고 각자가 개체로서 활동하지만, 아난더 미아나이라는 하나의 존재로서 정의되는 것이죠. 그런데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사소한 정의>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하나의 존재로서 활동해온 황제 신체들간의 반목이 극대화되면서 <사소한 정의>의 주인공인 인공지능 브렉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분열하여 제국의 내전이 발발합니다. 브렉을 옹호하는 황제의 신체들 편과 브렉의 행동에 반발하는 황제의 신체들 편으로 나뉘는 것이죠.(<사소한 자비>에 가면 제3의 세력까지 출현합니다.^^) 마치 인간 정신의 분열증적인 양상을 실재화한 것 같은 이 모습을 보면 라드츠 제국 시리즈가 얼마나 색다른 느낌의 소설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4.인공지능의 동시적 시각.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주인공인 인공지능 브렉은 함선의 인공지능으로서 살아왔다 나중에는 황제에 저항하며 개체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소설은 브렉이라는 인공지능이 어떤 시각을 가지는지 보여줍니다. 함선을 관장하는 인공지능의 시각에서는 함선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동시적으로  볼 수 있기에 소설은 그것을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두 볼 수 있는 인공지능의 시각은 인과관계 없이 각각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저 나열하며 보여줄 뿐입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나 SF가 인간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보면, 라드츠 제국 시리즈는 인공지능의 시각이기 때문에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정도면 라드츠 제국 3부작의 특징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사소한 자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께요. <사소한 자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전작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3부작의 첫번째 작품 <사소한 정의>는 인공지능인 브렉이 명령받는 수동적 존재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 느낌의 SF입니다. 황제에 명령을 따르다 여러 사건이 겹치며 황제에 저항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두번째 작품인 <사소한 칼>은 자기 편 황제와 손잡은 브렉이 자신이 사랑했지만 죽여야 했던 함장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아소엑 행성계로 가서 아소엑 행성계의 실상을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린 문화인류학적인 보고서 느낌의 SF입니다. 아소엑 행성 내부의 인종차별과 불평등, 기득권층의 부조리와 체제의 모순을 세밀하게 그리며 브렉이 자신의 힘으로 그 부조리, 모순들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줍니다.

마지막 작품인 <사소한 자비>는 아소엑 행성계의 주도권을 쥔 브렉과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의 최후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첫작품이 성장소설의 느낌, 두번째 작품이 문화인류학적 리포터 느낌을 줬다면, 세번째 작품에서는 정치적인 대결이 주를 이루는 정치소설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사소한 칼>을 거치며 아소엑 행성계에 자신과 연관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아소엑 행성계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된 인공지능 브렉은 반대편 아난더 미아니아와 모든 것을 건 전면전을 벌이는 걸 꺼리게 됩니다. 전면전이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브렉은 그래서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을 하려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함선을 타고 있는 군인들을 활용해서 아난더 미아나이를 죽이는 암살 작전을 짭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브렉은 최후의 수단으로 정치적인 작전을 이용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이지만 제대로 활용하면 최악의 피해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정치인 것이죠. 브렉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라드츠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수수께끼의 외계인 프레즈거의 통역관과 2000년 전에 아난더에게 패배하고 밀려나서 아난더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는 노타이 문명의 함선에 있는 인공지능입니다. 라드츠 제국을 능가하는 과학기술을 가지고 제국에게 패배를 안긴데다 쉽사리 파악이 안되는 행동을 하는 외계인 프레즈거는 아난더에게 무엇보다 위협적인 존재이고 협정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여러모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거기에다 아난더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브렉과 아난더과 싸운다면 브렉을 지지할 것이 확실한 노타이의 인공지능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가 독재자의 폭압적인 행동으로 아소엑 행성계 주민들과 관료들의 신임을 잃은 것도 브렉에게 이득입니다. 브렉이 같은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신뢰를 보여줘서 브렉을 믿고 있는 아소엑 정거장의 인공지능이나 아소엑에 머물고 있는 함선들의 인공지능들도 반대편 아난더의 폭압적인 행동,불신,자신들에 대한 무시로 반대편 아난더보다는 브렉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브렉은 이 모든 요소의 힘을 빌어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와 정치적인 대결을 이끌고 나갑니다. 어떻게 될지는 책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직 상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낯설고 독특한 가상의 우주제국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읽는다는 게 좋았거든요. 라드츠 제국 시리즈 특유의 독특한 문체도 좋았구요. 중간중간 나오는 지적인 대화들도 읽는 맛을 더합니다. 인공지능을 존중하고 인간과 같은 존재로서 대하는 브렉과 브렉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인간들의 모습과 반대로 인공지능을 인간과 존재로서 대하는 걸 거부하고 무시하는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브렉이 아소엑 행성계 주민들과 인공지능을 대하는 모습에서 책 제목인 '사소한 자비'와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할께요. 앞으로도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맛을 살린 앤 레키의 다른 SF들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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