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 정치의 도구가 된 세계사, 그 비틀린 기록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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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승리이며,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다(158)
국민 만들기,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국민들은 결코 고정불변의 정치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의 정치 성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요동쳤으며, 권력자들은 힘들게 쌓아 올린 통합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근대의 권력이 안게 된 또 하나의 과제는 애써 만들어낸 충성스러운 국민의 변절과 변심을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권력자의 가치관 또는 비전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에 신성을 부여하면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협박했는데, 국민들이 패배주의에 젖어 있을수록 이 전략도 효과가 있었다.(7)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기억과 생각을 가진 사회는 권력자에게는 유토피아이나 국민들에게는 디스토피아다. 국민을 길들이려는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명분을 민족의 신성한 역사와 동일시하며 국민들의 동참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권력자들은 종종 역사 교과서를 고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는데, 이 역시 국민을 변하지 않는 지지층으로 만드는 데 방해되는 기억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8)
권력이 역사와 기억을 바꾸려 할 때마다 사회적 반발과 분열이라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과거에 대한 집단의 기억이 결코 모두 같을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늘 유혹에 빠진다. 보수주의자들은 기득권과 전통적 가치를 영원한 신화의 이름으로 지키고자 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개혁의 신화를 영속화하려 한다. 역사 논쟁은 필연 정치 논쟁이며, 한 사회과 과거 기억에 대한 갈등 앞에서 화해 또는 분열로 나아가는 갈림길이 된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며, 현재이자 미래가 되는 셈이다.(9)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얘기지만(^^;;) 과거에 저는 과격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고구려의 옛영토인 만주벌판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그러나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과격한 민족주의는 저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책을 읽으며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인식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으며 접한 인식과 다양한 관점,생각,사상,문화들이 저로 하여금 과격한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을 사그러뜨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저는 그 시절의 저를 황당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ㅎㅎㅎ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를 읽으며 과격한 민족주의에 빠져있던 과거의 나가 떠올랐습니다. 독재자들이나 독재권력이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악용하는 사례들속에서, 그 역사적 허구에 빠져 독재자와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이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과거의 나'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찬란한 과거의 민족주의적 신화에 매달리며 현재 권력을 용인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저는 이런 민족주의의 악용 사례들에 대해서 독서모임에서 종종 이야기해 왔습니다. 저만의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여기에 한 번 적어볼께요. 제가 보기에 인간은 집단동물 같아 보입니다. 고양이 같은 개체적 삶의 방식을 가진 동물들은 할 수 없는 행동을 인간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소수는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집단일 때 더 용감해지고 과격해집니다. 저는 이런 여러 모습들속에서 인간이 집단적인 행동에 익숙한 집단적 행동의 매커니즘을 가진 동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근대라는 서양에서 생겨난 독특한 시대적인 흐름은 집단보다는 개체를 강조하는 쪽으로 인간을 몰고갑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나'라는 존재를 강조하는 근대적 시대의 흐름과 집단동물로서의 본능의 괴리가 발생하는 삶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본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능은 시간의 틈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체제를 바꾸는 혁명이나 개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자신과 다른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구 죽이는 학살이나 전쟁, 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나타나든 집단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은 언제나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전체주의,파시즘,인종주의,민족주의나 아니면 진보과 혁명,개혁이라는 이름을 내건 사상과 철학과 함께.

본능을 거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본능이 모습을 내밀 때 본능이 위험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본능의 발현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완벽한 해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 확률이 높은 방법은 있을 수 있겠죠. 교육과 사회 시스템, 문화와 관습의 힘을 이용하는 것 같은. 만약에 이런 것 없이 정치적 목적때문에 집단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을 악용하게 된다면, 저는 본능이 나쁜 길로 가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같은 책에서 나온 사례들이 본능을 어떻게 악용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미국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위대한 국가라는 미국 예외주의의 사고방식이나 중국 공산당의 과거의 과오를 묻어버리고 공산당의 뛰어남만 강조하는 중국의 애국주의적 역사교육,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과 과오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2차대전당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억만 강조하는 현대 러시아의 위대한 애국전쟁의 신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위조하고 위대한 힌두문명의 신화에 집착하여 과거의 정치시스템에 현대를 맞추려는 현재 인도 집권당인 인민당의 사고방식과 역사교육 등등. 이 사례들대로 나아가면 우리는 더 편협하고, 더 이기적이고, 더 폭력적인 사람이나 공동체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집단동물로서의 본능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죠.

위의 사례들을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떠오르는지를 이제부터 말해볼께요. 정신건강의 측면에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나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나 제대로된 자아인식도 아닌데다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면 우울증이고,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면 성격장애입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좋은면과 나쁜면을 포함해서 그 모두를 가감없이 바라봐야합니다. 이걸 공동체로 확대시켜 볼께요. 조금 더 건전하고 건강한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공동체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인식이 건강해야 할 겁니다.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자기자신을 있는대로 바라보는 인식을 통해. 공동체 인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공동체가 과거의 역사를 오직 긍정의 방식으로만 바라본다면 그건 건강하지 않은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에 나오는 사례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어떤 부정도 용납하지 않고 선하고 위해단 역사에 집착하여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권력자의 모습들이 건강하지 않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해답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다양한 해답이 있겠지만 책의 시각을 따라서 역사학과 역사교육 입장에서의 해답을 생각해본다면, 우리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완벽한 의미의 객관적인 역사는 있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좋은 것은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고, 나쁘면 나쁜 점을 고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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