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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자비 ㅣ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이곳에 있는 인간들이 저를 대하는 걸 보면, 저도 인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니지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과는 다른 종일뿐만 아니라 유의미하다는 점이 제 머릿속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368)
그것이 당신이 태어나기 3천 년 전부터 일이 돌아가는 정상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태였다는 점밖에 없습니다. 그 상태에 의문을 품을 이유가 전혀 없었겠지요. 아난더는 당신의 생사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졌고, 당신이 당신이 아끼는 누구와도 와무런 개인적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전부는 모두가 놀이판의 놀이패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우리를 희생시킬 수 있었고, 희생시켰지요.(378)
드라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승리 아니면 재앙으로 끝난다. 행복을 성취하든가, 아니면 희망까지 틀어막는 비극적인 패배뿐이다. 하지만 진짜 삶에는 끝난 뒤에도 언제나 뭔가가 있다. 늘 다음 날 아침이 있고, 또 다음이 있고, 늘 바뀌고, 잃고 얻는다. 늘 한 걸음 다음엔 다음 걸음이다.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한 번의 진짜 끝이 올 때까지. 하지만 우리를 압도할 듯 커 보이는, 어렴풋이 먼 그 끝조차도 하나의 작은 끝에 불과하다. 여전히 모두에게는 다음 날 아침이 있다. 우리를 뺀 우주의 엄청나게 많은 나머지 다수에게 그 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끝은 임의적일 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모든 끝은 아무 끝도 아니다.(382)
<사소한 자비>는 <사소한 정의>,<사소한 칼>과 이어지는 스페이스 오페라 앤 레키의 '라드츠 제국 3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사소한 자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라드츠 제국 3부작의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명사는 전부 그녀. 라드츠 제국 시리즈를 읽을 때 가장 낯선 것이 이 부분입니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모든 대명사는 '그녀'입니다. 계속해서 '그녀'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나오는 사람들이 전부 여자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성구분 자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대명사 그녀의 활용은 '남성이 이럴 것이야', '여성은 이럴 것이야' 하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라드츠 제국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킵니다.
2.종교의 중요성. 아난더 미아나이라는 황제가 이천년 간 다스려온 라드츠 제국은,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우주제국입니다. 하지만 이 우주제국은 종교도 중요시합니다. 라드츠 제국 자체도 제국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가 있고, 제국에 속한 행성들도 각자의 종교가 있고, 이것들이 엮여서 제국의 문화, 제국에 속한 행성 자체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외계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종교 이야기는 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종교에 중심을 두면서 라드츠 제국이라는 가상의 제국에 종교,문화의 양상을 보이며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인간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서 종교가 빠질 수 없는 요소이자 영향력이 강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3.분열하는 황제. 라드츠 제국을 이천년 간 다스려온 황제 아난더 미아나이는 몇십 개의 신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몇십 개의 신체를 가지고 각자가 개체로서 활동하지만, 아난더 미아나이라는 하나의 존재로서 정의되는 것이죠. 그런데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사소한 정의>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하나의 존재로서 활동해온 황제 신체들간의 반목이 극대화되면서 <사소한 정의>의 주인공인 인공지능 브렉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분열하여 제국의 내전이 발발합니다. 브렉을 옹호하는 황제의 신체들 편과 브렉의 행동에 반발하는 황제의 신체들 편으로 나뉘는 것이죠.(<사소한 자비>에 가면 제3의 세력까지 출현합니다.^^) 마치 인간 정신의 분열증적인 양상을 실재화한 것 같은 이 모습을 보면 라드츠 제국 시리즈가 얼마나 색다른 느낌의 소설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4.인공지능의 동시적 시각.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주인공인 인공지능 브렉은 함선의 인공지능으로서 살아왔다 나중에는 황제에 저항하며 개체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소설은 브렉이라는 인공지능이 어떤 시각을 가지는지 보여줍니다. 함선을 관장하는 인공지능의 시각에서는 함선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동시적으로 볼 수 있기에 소설은 그것을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두 볼 수 있는 인공지능의 시각은 인과관계 없이 각각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저 나열하며 보여줄 뿐입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나 SF가 인간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보면, 라드츠 제국 시리즈는 인공지능의 시각이기 때문에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정도면 라드츠 제국 3부작의 특징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사소한 자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께요. <사소한 자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전작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3부작의 첫번째 작품 <사소한 정의>는 인공지능인 브렉이 명령받는 수동적 존재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 느낌의 SF입니다. 황제에 명령을 따르다 여러 사건이 겹치며 황제에 저항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두번째 작품인 <사소한 칼>은 자기 편 황제와 손잡은 브렉이 자신이 사랑했지만 죽여야 했던 함장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아소엑 행성계로 가서 아소엑 행성계의 실상을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린 문화인류학적인 보고서 느낌의 SF입니다. 아소엑 행성 내부의 인종차별과 불평등, 기득권층의 부조리와 체제의 모순을 세밀하게 그리며 브렉이 자신의 힘으로 그 부조리, 모순들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줍니다.
마지막 작품인 <사소한 자비>는 아소엑 행성계의 주도권을 쥔 브렉과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의 최후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첫작품이 성장소설의 느낌, 두번째 작품이 문화인류학적 리포터 느낌을 줬다면, 세번째 작품에서는 정치적인 대결이 주를 이루는 정치소설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사소한 칼>을 거치며 아소엑 행성계에 자신과 연관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아소엑 행성계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된 인공지능 브렉은 반대편 아난더 미아니아와 모든 것을 건 전면전을 벌이는 걸 꺼리게 됩니다. 전면전이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브렉은 그래서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을 하려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함선을 타고 있는 군인들을 활용해서 아난더 미아나이를 죽이는 암살 작전을 짭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브렉은 최후의 수단으로 정치적인 작전을 이용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이지만 제대로 활용하면 최악의 피해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정치인 것이죠. 브렉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라드츠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수수께끼의 외계인 프레즈거의 통역관과 2000년 전에 아난더에게 패배하고 밀려나서 아난더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는 노타이 문명의 함선에 있는 인공지능입니다. 라드츠 제국을 능가하는 과학기술을 가지고 제국에게 패배를 안긴데다 쉽사리 파악이 안되는 행동을 하는 외계인 프레즈거는 아난더에게 무엇보다 위협적인 존재이고 협정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여러모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거기에다 아난더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브렉과 아난더과 싸운다면 브렉을 지지할 것이 확실한 노타이의 인공지능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가 독재자의 폭압적인 행동으로 아소엑 행성계 주민들과 관료들의 신임을 잃은 것도 브렉에게 이득입니다. 브렉이 같은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신뢰를 보여줘서 브렉을 믿고 있는 아소엑 정거장의 인공지능이나 아소엑에 머물고 있는 함선들의 인공지능들도 반대편 아난더의 폭압적인 행동,불신,자신들에 대한 무시로 반대편 아난더보다는 브렉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브렉은 이 모든 요소의 힘을 빌어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와 정치적인 대결을 이끌고 나갑니다. 어떻게 될지는 책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직 상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낯설고 독특한 가상의 우주제국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읽는다는 게 좋았거든요. 라드츠 제국 시리즈 특유의 독특한 문체도 좋았구요. 중간중간 나오는 지적인 대화들도 읽는 맛을 더합니다. 인공지능을 존중하고 인간과 같은 존재로서 대하는 브렉과 브렉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인간들의 모습과 반대로 인공지능을 인간과 존재로서 대하는 걸 거부하고 무시하는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브렉이 아소엑 행성계 주민들과 인공지능을 대하는 모습에서 책 제목인 '사소한 자비'와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할께요. 앞으로도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맛을 살린 앤 레키의 다른 SF들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