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 지음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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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으로 들어온 이상 철학은 문학의 텃세를 감수해야 합니다. 문학과 철학의 동거는 사이좋은 동거만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해야 하고 연기해야 하며 때로는 성격도 버려야 합니다.(8)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에 관한 진실일 뿐이에요.(419)

우리가 의식하든 안하든 한 시대의 철학이나 사상은 우리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돈을 최고로 여기든 안 여기든 우리는 로또 1등이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물질주의적이고 물신적인 경향이 우리 삶에 스며들었으니까요. 유럽의 중세라면 사람들이 우리 시대처럼 로또 1등이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탐욕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시절이니까요.

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의식하든 안하든 그들의 삶에 그들이 살다간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이 스며들어 있을 수밖에 없고, 작품을 쓸 때 그것이 작품에 영향을 미쳐 작품이 완성됐을 때는 문인 자신의 삶에 스며든 사상이나 철학이 작품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문인 자신이 의식을 하고 사상이나 철학을 작품에 담으려 했다면 더 그런 경향이 강하겠죠. 그래서 저는 사상이나 철학이 없는 문학작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상이나 철학은 작품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작품에 스며든 사상이나 철학이 잘 드러나나 아니면 잘 드러나지 않냐 하는 차이가 있겠죠.(작품의 완성도 얘기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알라딘 인문학 독서 블로거로 유명하고 문학과 인문학을 주제로 활발히 글을 쓰고 강연도 하는 '로쟈' 이현우 씨가 쓴 <문학 속의 철학>은, 저자 자신이 '문학 속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했던 강의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제가 위에 썼던 것을 로쟈 이현우 씨가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강의도 하고 책도 낸 것이죠. 저자는 자신이 과거부터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박이문 선생이 비슷한 주제로 썼던 다른 책인 <문학 속의 과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머리말에 쓰고 있습니다. 저도 이 주제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어서 박이문 선생의 책을 저자가 주의 깊게 읽어나간 것과 유사하게, 저자의 책을 주의 깊게 읽어나갔습니다. 어떤 부분은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깨어져 나가는 경험을 했고요, 어떤 부분은 저와 생각이 상당히 비슷해서 공감을 했고, 어떤 부분은 모르는 걸 알아나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다양한 생각의 흔적들을 다 글로 쓰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일정 부분의 흔적들만 글로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밑에 적은 글들이 그 흔적들입니다.

안티고네. 누군가의 말대로 해석을 하나의 권력이라고 본다면,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헤겔의 해석이 가장 큰 권력으로서 작용해왔다. <문학 속의 철학>에서 저자인 이현우는 헤겔의 해석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이 해석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해석의 권력에서 벗어하는 하나의 방법을 배우는 셈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현우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해석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자신만의 자세가 되기 때문에.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신을 변호하는 의도로 선과 악의 문제를 논하다 결론적으로 여기가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세상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말한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의 이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데 추가적으로 내가 의문을 품는 것은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부분이다. 선과 악이라는 게 절대적인 기준이었던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닌가? 선과 악의 개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인간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만들어나가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이 개념이 신의 선과 악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은 신에게 속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신에게 속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없다면, 그에 대해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더 좋은 게 아닐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 대한 이현우의 해석을 따라가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들에 의하면, 주류경제학이 기본적으로 정의하는 합리적 인간이란 옳은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확률이 높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인간은 충분히 자기 이익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이득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에만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담긴 건, 합리적 인간 개념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식 반론일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죽음은 한 번 경험하면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과정을 차분하게 훑어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독자를 죽음의 길로 서서히 안내하며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이 경험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죽음을 간접체험하며 삶의 힘, 삶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간접체험으로 한 번 죽으며 우리는 다시 살아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 예술이 진리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을까? 조이스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이 주장에 회의적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다, 진리가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있는지도알 수 없는데 예술이 진리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진리가 있다고 쳐도 예술이 그 진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거기에도 나는 회의적이다. '나는 예술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어요'라거나 '나는 예술을 진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로 만들 수 있어요'가 가능한 일일까?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교적 믿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진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기반한 종교.

싯다르타. 삶의 진실을 꿰뚫는 지혜를 말로서 전달할 수 있을까? 지혜를 말로서 전달하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서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지혜의 전달방식 중 하나라면, 문학도 거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싯다르타>가 지혜를 전달할 수 있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만 나는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문학의 몸부림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처절한 몸부림이 빚어내는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교감의 힘을 보니 지혜를 전달할 수 있냐 없냐를 떠나서 시도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이 문학적인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교감의 힘을 포함한 총체적인 그 무엇인가를 '지혜'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일부로서의 지혜.

사랑에 빠진 여인들. 분명히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현우의 이 소설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내가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야겠다. 조금 더 자세히, 조금 더 꼼꼼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D. H. 로렌스의 다른 소설들도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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