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자기 6번에서 83번으로 점프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
뭔가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글을 쓰기 싫다는 강력한 게으름의 여파로, 10번 책부터
82번 책에 연관된 내 후기는 사라지게 되었다.^^;;
원래는 이 책 후기도 안 쓰려고 했는데 인디고 수독 모임 후기를 내 마음대로 쓰고 나니,
이제부터는 읽은 책에 관해서는 다시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따라서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마음대로, 의식 가는 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전에도 마음대로 썼지만.

2.
11시. 아직 하루가 다 지나가지 않았다. 남은 건 1시간.
딱히 하루가 지나 가든 말든 신경쓰지 않지만, 책을 펴고 앉아 있으니
과거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시간이 갑자기 신경 쓰인다.
책을 읽다가 하루가 지나가버리면 그때 내가 읽은 책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책을 읽기 시작했던 과거? 책을 다 읽은 미래? 책을 읽었던 순간들인 현재?
아니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진 책과 연관된 모든 시간대?
아무 쓸모도 없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아직 책에 집중 안해서 그런 건가? 정신을 모아서 다시 책을 펴든다.
읽어야지 하면서.
역시 쉽게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다시 집중을 외치며 정신을 모아보려고 노력한다.
노력 끝에 나는 책속으로 빠져든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잊고.

처음에는 천천히 머리속을 스치던 글자들이,
존 리버스가 범인을 쫓아 달리는 순간에 이르자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마치 존 리버스를 따라 달리는 것처럼.
추격전 상황에서는 더더욱 빨리, 글자가 눈앞을 휘리릭 지나간다.
달리는 게 아니라 자동차나 기차,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한 듯이.
마침내 범인과 존 리버스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펼쳐지자,
글자들은 진정되었다는 듯, 두 사람의 대결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나는 글자의 지시에 따라 눈을 크게 뜨고 둘의 대결을 지켜본다.
영화속에서 한 장면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세부적인 것들까지
세세히 묘사하던 글자들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나를 이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시계를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1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잘 읽히는 가독성이 막강한 책들이 내게 행사하는 독서의 타임슬립 마법의 순간들을
다시한번 경험했음을 실감했다.
지나간 하루 전날, 시답지 않은 독서애호가로서 독서모임에 참가해서 주장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예술을 당위론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봐야한다고 했던 말들이.
특정한 당위의 논리로 본다면 <이빨 자국>이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이빨 자국>이라는 책은 충분히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있다.
나를 즐겁게 했고, 내가 시간을 잃고 빠져들게 했기 때문에.
역시, 쓰고 보니 괜히 썼다는 생각이 든다.
지우려고 보니 아깝다. 해서 남겨둘 것이다.
이것도 내 팔자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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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모임 시간을 착각하고 있었다. 오후 7시에 시작하는데 6시에 시작하는 걸로.
부랴부랴 집을 나서서 지하철을 타고 거의 다 도착할 즈음에야 그는 시간이 7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허탈함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시간이 더 남은만큼 더 여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모임 장소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 준비해둔 음악을 들었다. 음악속에서는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가 감성적인 목소리로 ‘엄마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에게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외치는 자식의 심정은 어떠한 것일까? 그리고 그 자신의 고백을 들은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결혼도 안하고 자식도 낳지 않은 내가 알 수 있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마음이 찢어지리라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음식 먹고 준비해둔 음악을 들었는데도 당연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하는 수 없어서 읽고 있던 책을 집어들었다. 현대에 생존한 철학자 중 가장 급진적인 회의주의자이자 근대의 인간중심적 시각을 가장 철저하게 비판하는 영국 철학자 존 그레이의 <꼭두각시의 영혼>. 책을 펼치자 존 그레이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브루노 슐츠, 자코모 레오파르디, 에드거 앨런 포, 메리 셸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스타니스와프 렘, 필립 K. 딕, 스트루가츠키 형제, 디어도어 포이스 같은 작가들의 문학작품과 아즈텍 문명, 중세 유럽, 데카르트 같은 근대 사상가들, 20세기 미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인간이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될 수 있다거나 인간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의 위험성을 다시한번 각인시키며 자유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파괴시켜버린다. 흠, 역시 존 그레이의 책들은 나의 사유를 깨부수는 도끼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군.

<꼭두각시의 영혼>을 읽다가 불안한 마음에 <침묵을 삼킨 소년>을 펼쳐서 훑어본다. 읽은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책인데도, 감당할 수 없는 정념의 파토스가 밀려온다.
“마음을 살해한 건 용서받는데 몸을 죽인 건 왜 안 되지?”
“마음이랑 몸이랑 어느 쪽을 죽인 게 더 나쁘냐고?”
“만약 두 번 다시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널 만질 수도 없게 된다면, 내가 얼마나 괴로울까... 병이나 사고로 네가 사라진대도 견딜 수가 없어. 하물며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면...”
“나는 유토만이 아니라, 유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죽인 거네...”
“계속 생각해야지. 앞으로도 꾸준하게 계속. 그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기 위해서 뭘 해야 할지, 무엇이 가능한지. 아빠도 같이 고민하겠지만, 아빠도 언젠가는 죽어. 엄마도 마찬가지야. 너 혼자 남더라도 계속 생각해야 해.”
‘요시나가가 일어서서 닫힌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더 이상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아.‘
쉽게 읽히고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줄 수 있는 책이라고 판단해서 추천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함과 더불어 불안감이 나를 찾아왔다. ‘모든 건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속에 들어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기다리며 나는 시간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2번 생략

3.
내 것이 되지 못한 경험은 완벽하게 체화할 수 없다. 하지만 무수하게 많은 간접경험들을 한다면 비록 그것을 완벽하게 체화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근처에 가닿거나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이 비록 책 읽는 자의 변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이 말에 일만의 진실, 일말의 진리,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지 못했지만, 우리가 겪은 것처럼 경험을 하고, 공감을 하며, 자신의 감정의 파고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가 진짜 그런 일을 겪을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예전보다는 더 그들에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이렇게 된다면 과거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것이 아닐까. 여기에 인문학 모임을 하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측면에서. 나는 2월 2주 인디고 수독 모임에 참여한 이들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문학과 삶의 가능성을 엿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나 자신이 그랬기에. 부디 그들이 지속적으로 인문학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며 좋은 삶, 좋은 앎을 위한 발걸음을 계속 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나와 함께하며 자신만의 좋은 말들을 내게 전해준 시간의 벗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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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 두번째 작품
2.읽은 기간:2017년 1월5일~1월6일
3.
십대 시절. 누군가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무엇도 쉽게 하지 못하고, 공부라는 틀안에 갇힌채로 자기 내면의 욕구와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 시절이 지금보다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그 시절에 대한 어떤 낭만성을 간직하고 있거나 그 시절로 돌아가면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시절의 리얼리티를 망각한 채로 현재의 자기 상황을 과거에 낭만적으로 투영한 생각이 아닐까? 낭만적인 과거에 대한 투영은 진실한 그 시절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고전부' 시리즈와 '소시민' 시리즈를 쓰며 십대 시절에 대한 자신만의 리얼리티를 형상화한 요네자와 호노부라면 당당하게 십대 시절에 대한 낭만적 회고를 거부할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라면서.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십대다. 십대로서 그들은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며 아직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고전부' 시리즈 주인공들은 소설의 주요 무대인 학교에서. '소시민'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학교가 거의 나오지 않기에 자신들이 사는 도시에서. 그들은 십대 특유의 활력과 이상한 열정을 보여주며 십대 시절의 낭만을 부추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현실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씁쓸합과 슬픔도 동시에 보여주며 작가 특유의 리얼리티를 형성한다. 활력과 열정, 씁쓸함과 슬픔, 좌절감이 얽히고 섥혀 만들어내는 삶의 리얼리티. 그 맛은 결코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맛은 때로 씁쓸하며 슬픔을 맴돌게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십대를 되돌아 볼 수밖에 없다. 우리도 십대라는 한 시절을 거쳐 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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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금지하니까 가지 않는 것이 소시민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멀었다. 진정한 소시민이라면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다!'하고 으스대며 축제의 밤거리에 뛰어들었다가 선생님이나 선도 위원의 모습을 보고 몰래 도중다니는 법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야간 노점 사이를 어슬렁거리고 있다.(10)

 

우리는 하루하루 평온하게 보내는 생활 태도를 몸에 익히길 갈망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일들을 완강히 회피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고 트러블 혹은 문제의 싹에서 빠르게 손을 떼기 위해 서로의 존재를 이용하는 것이다.(18)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거품이 사르르 녹는 듯한 매끄러운 식감에 있는 듯 없는 듯 아련한 단맛. 스펀지케이크 안쪽은 크림치즈 풍미의 바바루아였다. 튀지 않는 부드러운 치즈 맛을 지긋이 음미하고 있으면 안쪽에 숨은 마멀레이드 같은 소스가 대번에 입안을 깔끔하게 마무리해준다.(46)

 

나는 탐정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아무래도 뛰어난 범인이 될 소질은 없나 보다.(72)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비약의 한계가 사라진대.(99)

 

내 경험상 모르는 문제를 풀 때 집중하면 안 된다. 물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려면 집중해야 한다. 사고를 점차 좁혀 초점을 맞춰간다. 마침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집중을 풀어야만 한다. 물론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긴장감은 유지하되 사고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는 행위와 흡사하다. 인간의 눈은 중심 부분이 어둠에 약하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때는 주변시를 쓴다.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사고를 확산시켜야 한다. 핵심을 감싸고 있는 전체상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답이다.(110)

 

재주도 호적수가 있어야 부각되는 법. 재능을 시험하려면 그에 합당한 무대와 소재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했는데 이렇게 멋진 사건을 만나다니, 지금까지 참아왔던 지루함을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다. 유괴 만세!(160)

 

범죄는 과자가 아니야,오사나이.(256)

 

사실은 여우가 아닌데 자신을 여우로 착각하고 소시민이 되겠노라 선언했다면, 그마저도 거짓말이라면.그것은 마치 솜사탕. 달콤한 거짓말을 부풀린 것은 작은 한줌의 설탕.무엇이 남는지 물론 알아, 오사나이. 오사나이의 입술이 움직였다."남는 건 그저 오만한 고등학생 두 사람뿐이야..."(26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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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1.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세계를 마무리하는,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완성한 소설.

2.독서 기간:2017년 1월5일

3.

책은 삼중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시각적 경험과 묘사. 두번째는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의미를 찾고 언어,의미,상징을 포함한 이야기 형식의 글. 마지막은, 한층 더 사색적인 경험을 고려하여 궁극적이고 보편적이고 총제적인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 성찰의 장. 이 세 부분이 뭉쳐 하나의 부분을 이루며 그 부분은 다시 세 부분이 뭉쳐 한 편의 글이 되고, 그 세 편이 뭉쳐 <팔로마르>라는 하나의 소설을 이룬다. 3x3x3형식. 총 27개의 짤막한 글들 속에서, 작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며 예술적인 필치로 그려나간다. 다양하기 그지없는 시각과 사색과 철학의 향연 같은 이 소설 같지 않은,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에세이같은 소설을 읽다보면 다시 한번 칼비노의 실험성에 감탄하게 된다. 역시 칼비노의 소설은 세상에 다시 없는 유일무이한 그만의 소설일 수밖에 없다며.

 

천문대가 있는 캘리포니아의 팔로마 산에서 따온 '팔로마르'라는 이름을 쓰는 책의 주인공은 세상 모든 것을 자신만의 진지한 시각으로 관찰하며, 거기에서 자신만의 사고를 어떤 형태로든 구현해낸다. 파도에서, 기린이 달리는 모습에서, 알비노 고릴라가 타이어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에서, 짝짝이 슬리퍼에서, 거북이들의 짝짓기 행위에서, 지빠귀의 휘파람 소리에서, 잔디밭의 잡초 속에서, 팔로마르는 세상과 삶과 시간과 인간 존재와 소통과 언어와 세대 갈등과 서구 문명과 상상력 들과 같은 세상의 온갖 것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사고화해서 그것을 문학이라는 형식 속에 녹여낸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방황하는 칼비노의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묻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란, 소설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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