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로르의 노래 민음사 세계시인선 2
로트레아몽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197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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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4.말도로르의 노래-로트레아몽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지금 누가 이런 책을 읽을까?’라는. 책 안 읽는 제 주변인들은 당연히 읽지 않겠죠. 그런데 제가 나가는 독서모임의 사람들도 이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언급조차 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분들은 이 책의 존재 자체도 모를 겁니다. 그나마 온라인 공간 상에 존재하는 책 읽는 분들 중에는 간혹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수를 따져보면 많지는 않겠죠.^^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아주 소수의 행위가 됩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책을 꾸준히 읽는 분들도 다수라고 보기 힘든데, 그중에서도 소수파에 속하니까요. 소수 중에서도 소수가 읽는 책이니까요.

 

위의 생각은 또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쩌면 이게 특권이 아닐까. 사실 특권이라는 말을 여기에 붙이는 건 이상합니다. 보통 특권이라 하면 특권층이라고 불리는 어떤 상위 계층의 특수한 권리를 의미하죠.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하지만 이 행위를 특권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말이라는 건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특권을 어떤 우월성의 표현으로 말하지 않고, 다수가 행하지 않는 소수의 행동 패턴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정의하면 제가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는 행위도 특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다수는 행하지 않는, 그 다수에 속하지 않는 독서층이라는 소수 중에서도 소수가 행하는, 그 소수마저도 의지를 가져야 할 수 있는 이상한 특권 행위.

 

특권이라는 말을 붙이고 나서 제 행동을 바라보니 이상한 건 맞습니다. 이 특권에는 이득이 없습니다.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는 게 저한테 무슨 물질적 이득이 될까요? 물질적 이득이라는 속물적인 생각을 제외하면 남는 건 정신적인 이득입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남는 건 정신적인 이득인데, 이 책은 그마저도 희박합니다. 어떻게? 이 책을 읽으며 저는 고통을 느꼈으니까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어떤 고통을 느꼈을까요? 그건 악마적 낭만주의나 데카당스 문학을 읽으면 제가 종종 느끼는 감정에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감정이나 행위를 문학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는 악마적 낭만주의나 데카당스 문학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들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탐감이 주는 쾌감을 벗어나다 못해 더욱 더 어둠이나 수렁으로 파고듭니다. 어둠이나 수렁으로 떨어지는 이 행위들을 들여다보면 저는 고통을 느낍니다. 왜 저렇게 하는 거지? 왜 살인을 예술이라고 하는거지? 내가 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거지? 이 생각들은 결국 이런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왜 이런 책을 읽는 것일까? 독서를 하다가 독서 행위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면 독서 행위 자체를 이어가는 게 너무 힘들어집니다. 여기서 저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말도로르의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말도로르라는 가상의 화자를 내세워 세상에 대한 화자의 저주와 혐오를 노래합니다. 저주와 혐오로 가득한 화자는 세상에 폭력을 행사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범죄라고 부르는 행위를 하고 싶어 합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부르주아 가정의 행복을 박살내고 싶어하고,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독교식의 정상적이고 안락학 삶을 부정하려 합니다. 이 노래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현실의 의지를 노래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내면 세계 속에 구축된 어떤 환상을 노래로 옮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겁니다. 왜 이런 책을 읽냐는. ...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저주와 혐오를 노래하는 시이지만, 내용과 상관없이 시의 언어로만 놓고 본다면 분명 어떤 문학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미의 역사>와 대비되는 <추의 역사>를 통해서 이 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제가 말한 추함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는 추함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가 담겨 있죠. 보들레르를 따라서 생겨난 문학 유파들은 추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들을 짓게 되고요.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이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인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내용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준 겁니다. 아름다움은 생득적인 게 아니고, 사회화 과정과 교육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겨난 겁니다. 미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사회와 국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추함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과정은 또다른 아름다움을 알아가면서, 내면에 또하나의 아름다움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 또한 책들을 읽으며 이 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로서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에게 <말도로르의 노래>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저 시의 언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진짜 아름답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거죠. 여전히 저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에 물들어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굳이 벗어날 필요를 못 느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세상의 일반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벗어날 가능성도 포기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꾸준히 이런 책을 읽으며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 책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라는. 이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 가능성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 아마도 이게 제가 생각하는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으면서 떠올린 저만의 특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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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07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추하고 역겨운 내용들이 가득해서 아무도 안 읽는 책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

짜라투스트라 2023-05-07 19:0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진짜 딱 맞는 말인 듯 합니다.
 
서쪽 바람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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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3.서쪽 바람-메리 올리버

 

대체적으로 시는 서정의 장르이고, 소설은 서사의 장르라고 합니다. 물론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로 자처하는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이는 소설이 서사의 장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제 말은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시는 서정의 장르이기에, 시인이 느낌 감정을 서술하게 됩니다. 소설은 서사의 장르답게 소설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서술합니다.

 

서정 장르라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시가 독자에게 시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시키는 건 아닙니다. 소위 모더니즘이라든가 포스트모더니즘, 실험적인 시들을 쓴다는 시인의 시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읽어본 경험으로는 이런 류의 시들에서 시인의 감정은 쉽게 파악이 안 됩니다. 실험적이고 난해하게 표현된 언어들 속에서 시인의 진의는 감추어진 채 독자는 언어의 미로를 헤매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운 시들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시를 더 좋아합니다.

 

메리 올리버의 시는 제가 좋아하는 서정 장르로서의 시에 해당합니다. 어려운 단어도 없고, 시인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거나 감정이입하기 쉽기에. 주로 자신이 자연을 거닐고 바라본, 자연에서 파악한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메리 올리버의 시들을 읽다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할께요. 시인이 마주친 자연의 아름다움은 모두 순간적입니다. 이 때의 순간이란 오직 현재뿐이라는 말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오직 현재뿐이란 의미에서의 현재. 하지만 이 현재의 아름다움은 시인에게 영원합니다. 모순적인 말이긴 한데(^^;;) 시인에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합니다. 한 순간의 아름다움이 시인에게 영원히 뇌리에 남는다는 말입니다. 그건 지나가면 사라지지만, 시인의 뇌리에 영원히 남아서 시로 구현됩니다. 순간적인 영원의 아름다움으로. 시인은 순간에서 영원을 보는 겁니다.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러나 이 영원의 아름다움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해보죠. 메리 올리버라는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봅니다. 현재로 존재하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하지만 거기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저는 <서쪽 바람>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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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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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2.젊은 남자-아니 에르노

 

<젊은 남자>에서 여전히 아니 에르노는 솔직합니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는 여전히 자신의 심리와 삶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봅니다. 과거 자신의 삶을 솔직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글로 써내는 아니 에르노의 스타일은 이 작품에서 여전합니다.

 

, <젊은 남자> 이야기도 안 하고 바로 아니 에르노 스타일을 말해버렸네요.^^;; 늦었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젊은 남자>50대의 여성인 20대 대학생인 젊은 남자의 연애 이야기를 50대 여성의 시각에서 그려낸 소설입니다. 아니 에르노 특유의 오토픽션으로서, 저자가 과거에 실제로 겪었던 연애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50대 여성의 연애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 더 젊었던 시절의 연애 경험을 다룬 <단순한 열정>과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단순한 열정>에서 아니 에르노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사랑의 열정을 보여주면서, 열정으로 가득한 연애의 현장을 독자에게 전합니다. 그에 비해 <젊은 남자><단순한 열정>보다는 차분하고 조금 더 정제된 느낌의 연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다가옵니다. ‘20대의 나와 함께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체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시 사는 기분으로서의 연애. 그에 비해 나는 젊은 남자에게 미래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젊은 남자는 나에게 과거의 삶을 나타내고, 젊은 남자에게 나는 미래를 표현하는 셈이죠.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 책을 쓰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던 는 자신의 임신중절수술의 경험을 다룬 <사건>이라는 소설을 쓰게 되면서 젊은 남자와 헤어지게 됩니다. 자연럽게 이별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서른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연애의 생성소멸을 짧은 내용에 밀도감 있게 담아낸 <젊은 남자>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작가 경력을 이어가는 아니 에르노의 작가로서의 삶은 지속되기에 그녀의 글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로서의 저의 삶도 계속되고 있기에 아니 에르노와의 저와의 만남은 계속해서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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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장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5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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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1.K의 장례-천희란

 

이별이라는 행위는 우리가 이별이라고 외친다고 이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외칠뿐, 내 몸과 삶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진정한 이별이 아닙니다. 진정한 이별은 몸과 삶이 이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람이 떠나간 흔적, 자리가 내 몸에 스며들고, 그것이 삶이 되어 더 이상 그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제대로 된 이별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왜 이별 이야기를 하냐고요? 그건 <K의 장례>가 이별에 관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소설가 K라는 인물을 떠나보낸 두 여인의 삶의 방식을 그리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이별을 하는 두 가지 방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의 이별 방식이 있습니다. ‘는 직업 없이 부모와 함께 지내며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연히 기차에서 마주친 소설가 K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고 놀라죠.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K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그와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사회적으로 없는 사람인 K는 자신이 쓴 소설을 나를 통해 세상에 내보냅니다. 나는 K의 소설을 자신이 쓴 것처럼 하며 소설가로 살아갑니다. 전희정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있어 전희정으로서의 삶은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닙니다. K가 쓴 소설의 대리인이자 자살해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소설가 K의 새로운 삶의 보조원 정도 되죠. 그런데 15년 만에 K가 방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나는 홀로서기에 나서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전희정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희정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갑니다, 가서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으로 삽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름입니다. 나는 K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면서 이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소설 내내 나의 본명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소설 마지막 줄에 나의 본명이 등장합니다. K를 완벽하게 떠나보내고 자기 자신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의미겠죠.

 

두 번째는 강재인이라는 인물의 이별 방식입니다. 강재인은 K의 딸입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헌신 속에 문학에만 집중하며 가정에 무관심했던 아버지가 싫습니다. 아버지의 자살도 아버지 스스로가 문학적 한계에 부딪쳐서 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녀는 소설가로 데뷔하며 자신의 본명이 아닌 손승미라는 이름을 씁니다. 마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다고 아버지의 그림자가 없어지지는 않죠. 손승미라는 필명을 쓰는 강재인은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영향력 속에서 평가받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아버지의 흔적을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하죠. 그런데 아버지 사후 15년만에 아버지의 숨겨둔 원고를 전희정을 통해서 받게 됩니다. 거기서 아버지가 자신을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후 15년을 맞아 쓰게 된 원고에서 그녀는 문단에 데뷔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적습니다. 글을 통해 아버지의 영향력과 빈자리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거부만 하던 강박적인 이별 방식에서,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영향력과 빈자리를 인정한 채 떠나보내는 방식으로의 변화. 이게 강재인만의 진정한 이별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은 끝났죠. 하지만 이별 방식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아닙니다. 세 번재 이별 방식이 있습니다. 이건 소설가 천희란의 이별 방식입니다. 소설가 천희란은 <K의 장례>라는 작품상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오랜 기간 머리 속에 두었다가 드디어 책으로 펴냅니다. 그리고 작품을 마치는 순간 천희란의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K의 장례>라는 작품상과 이별하는 것이 됩니다. 소설을 씀으로서 머리 속의 작품상이 사라졌으니까요, 이제 공은 독자에게 넘어왔습니다.

 

아직 이별 방식에 관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의 이별방식이 있으니까요. 독자는 소설가가 써낸 작품을 읽습니다. 읽어나가는 동안은 소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하지만 책과의 동행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책을 덮는 순간 소설은 끝나니까요. 여기서 독자는 다양한 이별의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저만의 서평을 쓰는 걸로서 이 소설과 이별하려 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소설과의 이별 방식이라고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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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간빙기 - 서윤후의 제4 간빙기 다시 쓰기 FoP Classic
아베 코보 지음, 이홍이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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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0.4간빙기-아베 고보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 바람.

 

A: 저는 아베 고보만 생각하면 항상 일본의 카프카라는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무엇보다도 카프카라는 단어에 꽂혀요. 저에게 카프카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작가거든요. 그러면 카프카가 저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느냐? 카프카의 작품을 읽다보면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진 느낌이 들어요. 미로에 갇힌 것은 아는데 출구가 없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느낌. <변신>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에요.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된 주인공이 어떻게 자신이 처한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나요? 거기에 출구는 없습니다. 소설은 벌레가 된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죠. 저는 카프카의 작품들을 거의 이런 느낌으로 읽어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조리의 느낌을 많이 받아요, 말도 안되고 빠져나올 수 없는 어떤 사건에 처한 이들이 겪는 부조리의 사건을 다룬 소설로서.

 

B: 아베 고보가 카프카와 비슷한가요?

 

A: 물론 카프카와 아베 고보가 똑같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차이점이 있거든요. 하지만 유사점도 많아요. 아베 고보도 카프카처럼 부조리한 상황들을 잘 그립니다. 아베 고보의 대표작인 <모래의 여자>를 볼까요. 소설의 주인공은 곤충채집을 하러 어느 해안의 사구 마을에 갔다 모래에 갇혀 버립니다.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상황인데, 주인공은 몸부림치지만 모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위에서 말한 카프카와 비슷하죠?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히 느낌의 부조리한 상황. 아마도 그래서 아베 고보를 일본의 카프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B: <4간빙기>는 어떤가요?

 

A: 일본 최초의 SF라고 불리는 아베 고보의 <4간빙기>도 카프카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스포일러 느낌이라서 조금 꺼려지지만 이것에 대해서 말해볼께요, 일단 여기서는 이 작품을 저만의 방식으로 간략화하겠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를 죽이는 작품으로 봅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이 작품은 미래의 흐름을 따라가는 프로그램화된 가 미래의 흐름을 거부하는 현재의 를 죽이는 작품입니다. 나가 나를 죽이는 상황 자체가 말도 안되는 부조리한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도 카프카적인 부조리가 살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B: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A: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제4간빙기(빙하기와 빙하기의 사이에 얼지 않는 기온이 따뜻한 시기를 간빙기라고 합니다. 소설은 우리가 네 번째 간빙기인 제4간빙기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의 기후가 바뀌면서 해수면이 상승한다고 말합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땅이 바닷물에 뒤덮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면적이 줄어들죠. 소설에서는 일군의 사람들이 그 변화에 맞추어서 수중인간과 수중동물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 기계를 통해서 미래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예언 기계를 만든 프로그래머 . 그들이 파악하기에 는 예언 기계의 예언도 믿지 않고 미래의 변화의 흐름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의 정신적 데이터를 통해 프로그램화된 나를 만들어내죠. 이 미래의 흐름을 받아들인 미래적인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나가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미래의 흐름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위협이 되기에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움직이죠. 나를 죽이는 방향으로. 그래서 이 작품은 나가 나를 죽이는 작품이 되는 겁니다.

 

B: 부조리한 상황이 맞군요.

 

A: , 부조리한 상황이 맞습니다. 미래의 나가 현재의 나를 너무나 잘 알기에 반드시 죽이려 하고, 거기서 벋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부조리가 아니라면 무엇을 부조리라고 해야할까요? 이건 미래가 현재를 죽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와는 단절된 미래의 출현 속에서, 미래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유지하려는 성향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미래의 흐름에 탄 는 현재를 유지하려는 를 죽여야만 미래라는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부조리하고 잔혹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 하지만 이 부조리는 카프카적인 부조리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카프카의 부조리는 부조리한 상황 설정만 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4간빙기>의 부조리는 부조리한 상황 설정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줍니다. 죽기 전에 나는 기계가 전해주는 미래의 영상을 봅니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대지가 물에 잠기면서 수중인간들이 점점 더 미래의 대세가 되어가는 영상. 거기서 지상의 인간들은 설자리를 잃어가다 과거의 화석이 되어버립니다. 미래의 주역이 된 수중인간들은 과거의 환상으로서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죠. 그 영상을 보고 나면 부조리는 단순한 부조리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부조리가 됩니다.

 

B: 분명히 차이점이 있군요.

 

A: <4간빙기>에 그려진 부조리는 카프카적인 부조리와는 다릅니다. 그건 아베 고보식 부조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4간빙기>SF라는 형식을 통해서 아베 고보식 부조리를 펼쳐낸 소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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