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셀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19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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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8.오셀로-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이제 내가 구원받는 길은 그녀를 미워하는 것뿐이다.

, 결혼의 저주여, 우린 이 섬세한 여인네들을

우리 것이라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성욕은 우리 것이 아니구나!

사랑하는 것을 한 켠에 두고 타인들이 사용하게 할 바에야

차라리 두꺼비가 되어 동굴의 수증기를 먹고 살아가련다.

허나 이는 지체 높은 자들이 걸리는 역병.

이런 운명에는 그들이 천한 자들보다 더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

이 갈라진 뿔을 이마에 지니는 운명을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니게 된다.(p.102)

 

너무나 글이 쓰기 싫었습니다. 글쓰기를 의무적으로 하게 만들어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쓰지 말고 포기해버릴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안 쓰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여기 앉아서 글을 쓰고 있네요.^^;; 앉아서 글을 쓰려고 하니 <오셀로>에 관해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내 마음이 쓰라네요. ㅎㅎㅎ

 

제 마음에 물어봤습니다. <오셀로>는 어떤 작품이냐고? 제 마음이 대답을 하네요. <오셀로>는 질투라는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라고. , 제가 보기에 <오셀로>는 질투라는 감정이 사람을 사로잡은 과정을 그린 비극이자 질투가 괴물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는 비극처럼 보였습니다. 그럼 질투라는 괴물은 누구를 잡아먹나요?’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질투가 잡아먹은 건 오셀로라고 생각합니다. 오셀로의 마음 속에서 생겨난 질투는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아내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오셀로 본인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과정을 보고나니 질투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질투가 그냥 생긴 건 아니겠죠. , 맞습니다. <오셀로>에서 오셀로의 질투를 키워내는 존재는 이아고라는 악역입니다. 현대 정신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이아고는 오셀로를 부추겨 질투를 불러 일으켜 아내를 죽이게 만들고, 오셀로 자신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셀로>라는 비극의 핵심적 인물입니다. 저는 이아고의 모습을 보면서 을 형상화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느낌이 나지 않고 오직 오셀로의 파멸에만 몰두하는 인물로서, 유혹하는 존재이자 유혹의 끝에 파멸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저에게 <오셀로>는 순수한 여인인 데스데모나라는 아내와 함께하는 선의 영역에서 이아고의 유혹에 넘어가 질투에 사로잡혀 이아고와 함께하는 악의 영역으로 진입한 오셀로가 파멸하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선에서 악으로의 변화, 선과 악의 대립에서 악의 승리를 그려내면서 인간에게 경고하는 비극. 제가 너무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는 걸까요? 그러나 이렇게 바라보면 <오셀로>가 더 흥미로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 제가 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셀로의 자아가 더 튼튼했다면, 아니 자아를 받치는 심리적인 부분에서 조금 더 확실한 자존감이 있었다면 이아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오셀로의 자아에는 그가 이룬 뛰어난 업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건 오셀로가 흑인이라는 점과 연관이 있습니다. 책에서 언뜻언뜻 드러나지만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흑인이라는 건 엄청난 불안감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라도 추락할 수 있다는, 언제라도 내쳐질 수 있다는, 나는 저들과 다르기 때문에 불완전하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내면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불안감이 있었기에 이아고의 유혹이 통했던 것이고, 데스데모나에 대한 믿음이 더 쉽게 무너질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저는 <오셀로>를 오셀로가 질투에 사로잡혀 선에서 악으로 건너가 파멸하는 비극이자 그 흐름의 근저에 인종주의가 맴돌고 있는 비극으로 바라봅니다. 정념의 비극에 인종주의가 더해진 비극. 그것이 제가 바라보는 <오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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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민음사 사서四書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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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7.논어-공자(민음사)

 

1-1 선생님꼐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에 막혀 나가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움을 품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겠는가?’ _ 학이(學而)

 

저는 고전을 읽을 때 원전을 바로 읽지 않습니다. 먼저 원전을 설명하는 해설서를 읽고 어느 정도의 이해의 틀을 만들어놓습니다. 그 다음 단계로 저는 원전 읽기를 시도합니다. 몇 년 전 동양 고전을 열심히 읽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설서들을 읽고 나서 원전 읽기로 가는 건. 동양 고전에서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논어>였고, <논어>도 해설서들을 원전보다 먼저 읽었습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해설서들을 읽으면서 저는 공자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첫사랑이라서, 첫경험이라서 그런 걸까요? 사랑에 빠지니 공자의 모든 것이 좋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불꽃같은 사랑이란 게 영원하지는 않잖아요? 불꽃 같은 사랑의 시기가 지나면, 불꽃같은 열정이 식고 조금 더 현실화된 사랑의 시기가 도래해죠. <논어>와 공자에 대한 제 사랑도 똑같았습니다. 불꽃처럼 모든 걸 사랑하는 시기가 지나가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기가 도래하더군요. 그 때의 공자는 뛰어난 인물이지만 시대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논어>도 모순적이고, 시대의 흔적을 담은 텍스트로 바라보게 되었죠. 저는 이런 냉정함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열정적인 옹호는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니까요.

 

지금 저에게 공자는 만고의 스승이라거나 사상의 대종사 같은 느낌은 아닙니다. 저에게 공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로서 이후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정도로서 생각됩니다. <논어>에 대한 평가도 동양고전 최강의 텍스트라거나 영원불멸의 진리를 담은 책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읽다보면 좋은 구절이 많은 동양고전 정도로만 생각됩니다. (사실 저는 <노자><장자>를 성향상 더 좋아합니다.^^;;) 찬성과 긍정으로만 가득한 평가도 아니고, 부정으로만 가득한 평가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서 왔다갔다하는 사상가이자 텍스트로서 공자와 <논어>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긍정과 부정을 왔다갔다하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논어> 관련 해설서들과 원전의 다양한 판본들을 읽었습니다. 민음사 판본의 <논어>도 민음사 번역본의 <대학>,<중용> 다음에 읽었죠. 번역이 다른 고전들을 읽다보면 작은 차이들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들이 책의 차별점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보기에 민음사 버전 <논어>의 번역은 초보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바로 이해되는 번역은 아닙니다. 번역 언어 자체의 정확성에 더 치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상세한 해설이 덧붙여 있어서 읽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논어>를 지속적으로 읽는다는 건, 텍스트를 통해서 공자의 음성을 계속 듣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제 마음에 들려오는 공자의 목소리는, 혼돈의 시대에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주나라의 예법을 되살리는 것이자 인을 강조하는 것이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가르침을 주는 것이고 사람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주는 것이자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의 음성입니다. <논어> 읽기가 계속될 예정이니 이 음성은 앞으로도 제 마음 속에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이어질 겁니다.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목소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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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이! 문학의 비명 제안들 32
엘렌 식수 지음, 이혜인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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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6.아야이문학의 비명-엘런 식수

 

여러분은 엘런 식수를 읽을 수 있나요?”(p.99)

 

서평을 쓰다보니 느끼는 건데요, 제가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의 서평이 있습니다. 어렵다, 이해 안 된다, 이번에 이해 못 했으니 다음번에 또 도전해 보겠다... 번명은 아닌데 책 읽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런 식의 서평을 지속적으로 쓰는 건 제가 진짜 읽기 어려운 책들을 읽기 때문입니다. 일단 읽긴 했는데 뭘 읽었는지 모르니까 서평도 이해 안 된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네요.^^;; 아니 그러면 그런 책을 안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아니 이게 안 읽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려운 책을 읽겠다고 다짐했고 그걸 지속적으로 해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그런 책을 읽으면 서평을 안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 그렇긴 한데요, 서평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가 읽은 책이 어렵다고 어려운 책 서평을 쓰지 않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이런 류의 책들 서평 쓰기를 포기하면 제가 읽은 책들 일부 만 서평을 써야 하고, 그렇게 글쓰기에 제한을 두면 저는 제한된 책의 서평만 써야 하는 반쪽짜리가 되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간단합니다. 이제 어려운 책을 읽어도 전과는 다른 서평을 쓰면 됩니다. 다르게 말해 어려운 책을 읽고 어렵다고 말하는 서평을 쓰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어려운 책을 읽고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어렵다고 말하지 않는 게 말이 되냐요? . 어려운 책을 읽지만 어렵지 않아요. 이제 저는 이런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어요. 저한테는 이게 다 거짓말이거든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거짓말 하면서 뭔가 있는 것처럼 글을 쓸 능력도 안 되고 실력도 안 되거든요. , 고민이 되네요.

 

엘런 식수의 <아야이문학의 비명>을 다 읽고 역시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책을 어떻게 서평을 써야 하나. 다행히 저만 고민한 게 아니더군요. 일단 위에 처음으로 적은 문장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한 질문입니다. 어려운 책을 쓰기로 소문난 자크 데리다도 엘런 식수의 책을 어렵다고 말하며 저런 질문을 하더군요. 뿐만 아닙니다. 이 책 뒷부분의 옮긴이의 글을 보면 엘런 식수의 책이 왜 어려운지 나옵니다. 식수의 글이 갖는 힘은 시적 언어의 중의성과 변화무쌍함에 있을 것이다. 식수는 프랑스어뿐 아니라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표를 토대로 어휘를 비틀고, 한 단어에 무수한 의미를 녹여 낸다. 그녀을 글은 낯설고, 더욱더 재빠르다. 문장 하나하나에 문학적,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래퍼런스가 켜켜이 쌓여 있지만, 식수는 멈춰 서서 설명하는 법이 거의 없다.’(p.101) 그러니까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표를 토대로 어휘를 비틀고, 한 단어에 무수한 의미를 녹여내며,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 래퍼런스가 켜켜이 쌓인 글을 읽고 어떻게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정확한 의미에 고정되는 걸 거부하고 이해 가능성의 끝자리를 맴돌며 끊임없이 유동하는 엘런 식수의 문장들을 읽고 나서 제가 무슨 말을 해야할까요?

 

아 생각해보니 간단한 답이 있네요. 이런 책을 안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건 답이 안 됩니다. 위에도 적었듯이 저는 어려운 책을 계속해서 읽을 예정이거든요. 순환논법같지만(^^;;) 저는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어려운 책을 읽고 어려운 거에 쾌감을 느끼는 지적 변태거나 지적인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인간은 아닙니다. 그저 저는 어떤 책이든지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겁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읽는 책의 범위도 제한되고 그러면 책을 읽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어쨌든 포기할 생각이 없어서 <아야이문학의 비명>을 읽긴 했는데, 읽고 나니 포기할 걸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제가 평범한 인간이라서 그런 거겠죠.^^;; 삶과 죽음의 경계와 언어의 경계가 맞닿은 지점에서 토해내는 알 수 없는 문학의 비명들이 담긴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아야이!’라는 비명이 토해지는 건 제가 어려운 책을 읽기 어려운 인간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엘런 식수의 비명은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있는 거지만, 저는 그냥 읽기가 어려워서 저도 모르게 내뱉은 거니까요. 엘런 식수의 글 속 분신인 아이아스가 내뱉은 비명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지는 기적의 마법. 저와 엘런 식수는 그렇게 읽기의 어려움 때문에 전혀 다른 의미의 일체화가 되었습니다. 아 적다 보니 역시 이번에도 어렵다고 한탄하는 글이 되었네요. 다음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다르게 적을 것임을 다짐해봅니다. 그런데 이거 무한 반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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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3-04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전정신에 화이팅을 보냅니다. 그래봤자 책인데 언젠가는 이해될 날이 오겠지요라고 우겨보고싶네요. ㅎㅎ

짜라투스트라 2023-03-05 11: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어려운 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을 예정입니다. 바람돌이님 말대로 언젠가 이해될 날이 오겠죠.ㅎㅎㅎ
 
바게트 소년병
오한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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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5.바게트 소년병-오한기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제가 농담을 던지는 상황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고, 듣는 상대방은 말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그 농담이 현실이 되는 거에요. 지금 들어도 말이 안 되죠?^^;; 제가 만난 오한기의 소설들이 딱 이 상황에 들어맞습니다. 말이 안 되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그게 갑자가 현실이 되면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 되는 소설들. 현실에 있는 듯하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서 환상과 현실이 겹쳐지는 소설들. 농담 같은 소설, 소설 같은 농담. 저는 오한기의 소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한기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인 <바게트 소년병>에 나오는 소설들도 제가 생각하는 오한기 소설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첫작품인 바게트 소년병부터 두 번째 작품인 ‘25’. 세 번째 작품인 팽 사부와 거북이 진진까지는 현실과 가상,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소설인 사랑하는 토끼 머리에게에 오면 달라집니다. 우선 이 소설은 현실과 가상의 교차가 아닙니다. 이 소설은 환상이 현실을 잡아먹어버립니다. 현실을 장악한 환상. 저는 이런 류의 소설을 보면 언제가 카프카가 생각납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에는 현실을 장악한 환상이 가득하거든요. 이런 소설들은 환상이 가득하다보니 상징으로 가득하고 우화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소설들은 환상이 많이 나오지만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작가의 개인적인 불안이나 고독 같은 심리가 환상들에 투영되어 있는 생각이 들고 동시에 이런 환상들이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져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배제하고 혐오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건 우리 현실의 모습들이거든요.

 

 

다섯 번째 작품인 곰 사냥으로 가면 사랑하는 토끼 머리에게의 느낌을 벗어나 내가 아는 오한기 소설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펜팔세일즈맨은 오한기의 소설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점들이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바로 유머라는 장점. 저는 두 소설을 읽으며 계속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펜팔은 감옥에 있는 MB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펜팔 친구가 된다는 기상천외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세일즈맨은 엉덩이에 관한 집착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네 번째 작품 빼고는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면서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오한기의 소설은 저에게 참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마지막의 대담 같은 걸 보면 오한기 작가가 최근에 유머러스하게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변화도 참 마음에 드네요. 잘 읽었다는 말을 남기며 다음에도 이렇게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고 유머러스한 소설들을 읽고 싶다는 말로 글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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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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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4.쇼샤-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결말을 알고 책을 읽으면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요? 뻔히 결말을 아는데 책이 재미있을 수가 있을까요? <쇼샤>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배경이고 20세기 초반이 무대라면 그러면 결말이 정해진 거 아닌가. 여기 나오는 유대인들은 모두 다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거나 그전에 비참하게 죽거나 아니면 운좋게 여기를 빠져나가겠지. 읽기도 전에 저런 생각을 하니 책을 읽는 흥미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읽었습니다. 제가 읽기로 결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쇼샤>는 예상밖이었습니다. 이 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우선 이 소설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역사적 사료나 통계자로에 나오는 단순한 희생자로서의 유대인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희생자이기 이전에,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들로 나옵니다. 사진 속 시체이거나 참사나 폭력의 희생자로서 물화되기 이전의 인간 그 자체로서의 모습으로서. 이들은 울고, 웃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즐거워하고, 어떤 때는 악하고, 어떤 때는 순수하고, 서로를 위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 하고, 다가오는 나치의 그림자 앞에서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서 무언가를 이루려 하고, 유대인이라는 틈바구니 안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하고, 패거리를 이루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증명하려 하고, 삶을 살아나가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이들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이후에 겪는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희생자 이전에 인간으로서 살았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 얼마나 처참하게 죽는지 알기에, 이들의 삶을 이후에 다가오는 참사의 예비과정으로서 인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후에 무슨 일을 겪었든, 이들에게 중요한 건 현재의 삶입니다. 현재를 사는 것, 현재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사는 것, 이것이 아직 나치가 다가오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겁니다. <쇼샤>가 보여주는 게 그겁니다. 나치 이전의 바르샤바 유대인 사회를 살았던 작가인 나와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여인 쇼샤의 사랑 이야기와 그 주변 유대인들의 삶을 그려낸 <쇼샤>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게.

 

작가가 나치가 다가오기 이전에 소설을 끝내고, 에필로그에 전쟁 이후의 모습을 잠시 보여주는 건, 참사 이전에 유대인들이 인간으로서 살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건 소설의 어딘가 경쾌하고 아이러니하며 풍자적이며 지적이며 신비하며 어딘가 슬픈 분위기와 일치하기도 합니다. 학살을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역사의 무게감을 부각시키는 대신에 인간 삶의 모습에 집중하면서 유대인들도 유대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인간의 삶을 그리는 데 집중하면서 형상화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나치의 그림자를 예고하는 혐오의 만연과 언뜻언뜻 드러나는 위협은 이들의 삶이 역사와 어쩔 수 없이 이어져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것마저 뺄 수는 없었겠죠. 그 모든 것들도 삶과 이어져 있으니까요. , 분명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들도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그 속삭임 속에서 저는 명심 또 명심합니다. 역사 속 희생자들 이전에 그들의 삶이 먼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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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3-13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짜라투스트라 2023-03-13 17:5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