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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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8.인생의 역사-신형철

 

다시 읽은 신형철의 책은 역시 신형철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문학과 글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특유의 독특한 감성으로 책을 써내려가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책은 읽을 때마다 저에게 깊은 감성을 남겼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에 관한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읽으며 생각해봅니다. 나라면 저 시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신형철 평론가의 시에 관한 글마다 저의 또다른 생각들이 더해집니다. 각 글마다 작은 서평들이 쌓일 정도로. 그걸 다 적을수는 없고 여기에 한 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공무도하가

 

그대 강을 건너지 마오

그대 끝내 건너 강을 건넜구려

물에 빠져 돌아가셨으니

그대여 어찌해야 하리오.

 

백수광부의 아내는 백수광부가 강에 몸을 던지지 못하게 하고 싶었으리라. 강에 몸을 던지지 못하게 하려는 백수광부 아내의 의지는 시의 첫 연에 절절히 담겨 있다. ‘그대 강을 건너지 마오라면서. 하지만 백수광부는 강에 몸을 던지고 아내는 예상치 못한 일에 절망하여 부르짖는다. ‘어찌해야 하리오라면서. 참사를 막으려는 자의 욕망과 그것이 벌어지고 나서의 당황스러움의 간극. 이 간극이 빚어내는 격차가 이 시의 특징이다, 문제는 이 시에는 백수광부와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만 담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참사를 목격한 곽리자고와 곽리자고의 이야기를 듣고 이 노래를 지어부르는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의 입장도 이 시에 담겨 있다. 곽리자고는 참사를 눈앞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백수광부가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 연의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은 곽리자고의 입장과 따라서 등치된다. 그리고 참사가 벌어지고 나서의 당황스러움도 곽리자고와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른 게 있다면 감정의 강도.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에서 삶을 함께 보낸 남편의 죽음은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곽리자고는 제3자의 입장에 있을 뿐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은 어떠한가. 여옥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여옥도 자신의 남편이 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여옥은 곽리자고의 이야기를 듣고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 노래를 지어 부른다. 자기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겪은 것처럼. 여기서 여옥은 제3자가 아닌, 당사자의 경험으로 향하는 발길을 내딛는다. 타인으로서 타인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건, 어쩌면 기적을 향한 발걸음과 다를 게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공무도하가>를 보고 문학은 타인이 되려는 기적을 이루려는 인간의 염원이 담긴 장르라고 할 수도 있다. 여옥의 발걸음이 놀라운 건, 자기 자신의 삶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옥의 발걸음은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도 전해진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뛰어 나에게도 전해진 여옥의 발걸음. 2023년을 사는 나도 여옥의 발걸음을 따라 백수광부와 백수광부 아내의 이야기로 가닿는다. 나도 곽리자고처럼 그들을 바라보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한다. 여기서 시간은 사라진다.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공무도하가>는 내게 시간을 넘는 기적을 선사하는 시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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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흑역사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톰 필립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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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7.인간의 흑역사-톰 필립스

 

책을 읽는 내내 계속 킥킥 웃음이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이 영국식 블랙 유머의 힘인가. 책을 다 읽고 덮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유머러스한 책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저는 왜 등골이 서늘해졌을까요?

 

먼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언론인이자 작가인 저자 톰 필립스는 <인간의 흑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인간 실패의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저자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는 한,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한, 실패를 반복하고,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해서 저지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반복적으로 실패를 반복하는가? 저자는 책을 통해 그것이 진화의 결과로서 빚어진 우리 몸의 메커니즘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진화가 단기적인 생존은 이루어내지만, 장기적인 삶의 틀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 살아남은 방식이 반드시 미래에도 생존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거시적인 틀에서의 삶의 틀을 좋게 만든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진화는 우리에게 그때그때 살아남은 것들을 전해주지만, 큰 틀에서 삶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저자는 우리 뇌가 그때그때 살아남은 진화과정이 전해져 합해진 것으로서 얼마나 많은 오류를 저지르는지 알려줍니다. 우선 우리 뇌는 세상 곳곳에서 패턴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패턴들을 찾아냅니다. 달에서 인간의 모습을 닮은 형상을 보고, 바위나 산의 모습을 자신이 아는 형상으로 인식하듯이. 뿐만 아니라 인간의 뇌는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결정을 내리거나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뇌는 우리 자신의 오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 자체를 거부합니다. 확증 편향에 빠져 남들의 올바른 지적이나 눈앞에 있는 명확한 오류 제시에도 자신의 사고 방식을 바꾸지 않구요. 집단으로서 사고할 때는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도 인간의 특성입니다.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담아서 미래를 보기도 하고, 탐욕과 이기심과 편견에 물든 채 행동을 하는 게 또 인간입니다. 이 모든 게 모여서 인간 삶을 형성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속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제 저의 등골이 서늘한 이유가 나옵니다. 저는 책에 나오는 유머러스한 내용을 웃으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무언가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책에 나오는 인간들의 실수를 재미있다고 웃었죠. 하지만 저들과 저는 얼마나 다른 존재일까요? 저도 인간이고, 책에 나오는 저자의 말대로라면 진화 과정에서 생겨난 뇌의 오류 메커니즘을 저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저라도 실수를 안 하는 게 가능할까요? 책에 나오는 이들처럼 거대한 규모나 역사에 기록된 실수를 하는 건 아닐지라도, 저도 저 나름의 작은 실수들을 반복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웃었지만, 저의 웃음은 저 자신에게 행해진 웃음이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책 속 인물들과 저는, 실수를 반복한다는 측면에서 다를 게 없는 존재였던 것이니까요. 이걸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했던 악의 평범성개념에 빗대어 어리석음의 평범성이라는 말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니까요. 그래서 <인간의 흑역사>는 저에게 인간이라면 어리석음의 평범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머러스하고 재밌으면서 가슴 서늘한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가 저 자신을 보고 웃게 만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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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윌리엄!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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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7.,윌리엄-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을 읽고 나서인지 일단 이 소설은 잘 읽힙니다. 색다르거나 어렵거나 예술적인 묘사로 가득한 문장들은 별로 없어서 읽어 나가는데 막힘이 없이 술술 읽혀집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생생히 살아 있는 입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신들만의 복잡한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은 쉽게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모순적인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아이 같으면서도 어른이고, 저마다의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람 같은 나쁜 일을 벌이다가도 사람들을 위로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인간들의 생생히 살아 있는 이야기. 그게 제가 읽은 <, 윌리엄>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구요? <, 윌리엄><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루시 바턴이 화자로 나와서 자신의 전남편인 윌리엄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입니다. 현재의 남편인 데이비드를 병으로 잃은 루시는 전남편인 윌리엄에게 닥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더합니다. 가난하고 사랑받지 못한 유년기를 보낸 루시 바턴은 도망치듯 대학으로 가서 당시 대학원생이던 윌리엄을 만나서 사랑을 느끼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루시가 윌리엄에게 사랑을 느낀 건, 자신과는 다른 안정감이 윌리엄에게 있다고 느껴서입니다. 그리고 윌리엄의 어머니인 캐서린은 그녀와는 다른 부유한 도시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윌리엄의 바람기로 둘은 헤어지게 되고, 루시는 자신과 비슷한 불안함을 가진 데이비드와 만나서 재혼을 합니다. 윌리엄은 윌리엄대로 결혼을 하고 삶을 이어가죠. 윌리엄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까지 두 사람의 삶에 위치하며 둘 사이에 중요한 매개가 되어주구요.

 

데이비드의 죽음 이후로는 평온한 삶을 살던 나와 달리 윌리엄의 삶은 큰 파국을 겪습니다. 20살 어린 젊은 아내의 도주, 어머니가 자기를 낳기 전에 아버지 다른 누나를 낳고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충격까지. 폭풍처럼 몰아친 삶의 변화 속에 루시와 두 딸은 윌리엄을 위로하고 힘이 되어줍니다. 루시는 윌리엄과 더불어 숨겨진 윌리엄 어머니의 비밀과 또다른 윌리엄 가족의 삶의 진실을 찾아나서고 그 끝에서 윌리엄과 자신의 삶이 예전과는 완전하게 달라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소설 속에서 설득력 있고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물들의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고, 그들의 삶이 어우려져 빚어내는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그 흥미의 끝에서 독자가 만나는 건 인간의 불가해성입니다. 타자로서의 인간을 쉽게 알 수 없다는, 그 뻔하면서도 새로운 진리를 흥미롭고 복잡한 인간 이야기의 끝에서 만난다는 게 이 소설의 아름다운 점입니다. 뻔한 삶의 진리를 재미이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펼쳐내니까요. 그런 점에서 <, 윌리엄>은 재미있고 좋은 소설입니다. 다른 말로 아름다운 이야기이자 소설이죠. 이야기의 측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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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1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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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6.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페터 한트케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페터 한트케가 생각하는 모험은 제가 생각하는 모험과 다르다고. 저에게 모험은 낭만적이고 열정 가득하고 무언가 색다른 느낌의 단어입니다. 어쩌면 제가 어릴 때 봤던 <원피스>라는 일본 만화의 영향이 아직도 저에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원피스> 속 모험은 낭만적이고 열정적이고 화려하며 일상과 다른 삶의 방식이니까요.

 

그에 비해 페터 한트케에게 모험은 <원피스>에서 말하는 모험과 의미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을 보면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탁스함이라는 도시의 약사가 겪은 모험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기서 탁스함의 약사가 겪는 모험은 제가 생각하는 원피스식 모험과 다릅니다. 그건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로서 기록된 자의식 가득한 내면으로의 모험이자 낯선 이들과 낯선 장소를 만나면서 변화를 겪는 이의 여정이 담긴 모험입니다. 이런 모험을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작가가 자신만의 문장과 표현으로서 써내려간 아름다운 문학적인 모험.

 

분명 페터 한트케식 모험은 현대의 다양한 동영상 컨텐츠에서 나오는 모험과는 그 궤를 달리합니다. 그건 스펙타클하거나 리드미컬하나 스피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강렬한 액션이나 일상을 초월하는 환상은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대신 자신의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예술가의 고백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낯선 장소와 낯선 이들을 꼼꼼하게 세밀하고 관찰하고 묘사하는 작가의 시선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빠르지 않지만 변화를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을 바꾸려는 한 인간의 의지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상적이지 않지만 예술적이고 문학적이며 색다른 표현과 문장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더해져 페트케식 모험이 하나의 소설로서 탄생하고, 독자는 그 소설을 페터 한트케식 모험으로 받아들인 채 읽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자는 책을 펼치고 읽었기 때문이죠.

 

도둑질하는 아들을 내쫓고, 버섯에 미쳐서 아내와 멀어진 채 고립된 삶을 살다 모험을 한 탁스함의 약사는 변화를 겪고 고립에서 탈피합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갇혀 살아가던 그는 일상으로 돌아와서, 다른 이들의 삶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삶에 자신을 적응해가면서 살아갑니다. 모험이 준 변화가 자기 자신을 바꾼 것이죠. 어쩌면 그 변화는 독자들에게 영향을 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탁스함의 약사가 겪는 모험은, 책을 읽은 독자가 독서를 통해 경험한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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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올가 그레벤니크 지음, 정소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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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5.전쟁일기-올가 그레벤니크

 

전쟁 첫째 날 내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팔에도 적었다.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

무서운 사실이지만 그 생각으로 미리 적어두었다.(p.96)

 

바로 앞에 쓴 서평에서 저는 앞에 읽은 책에 대한 최악의 평가를 했습니다. 그 책을 읽은 내가 잘못이라고. 그 책을 선택한 내가 바보라고. 별점 평가에서 별 한 개를 주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별 한 개도 아까운 책이었다고. 너무 뻔한 내용에 뻔한 주장인데, 마치 자신은 뻔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듯이, 무언가 대단한 주장을 한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인터넷 공간을 조금만 뒤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메시지에다, 정치학이나 정치철학, 정치이론 다루는 책을 읽으면 자주 나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무언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너무너무 별로였다고. 내가 비판하는 사람의 주장은 진부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주장의 진부함은 깨닫지 못하는 한국 지식인의 오만함이 너무 잘 드러내는 책이었다고.

 

어휴~~ 쓰다보니 너무 많은 독설이 나오네요.^^;; 참아야지. 쉼호흡 한 번 하고. 휴우~~ 제가 전에 서평을 쓰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말하며 우크라이나 인들의 실존의 무게감을 말하는데, 이 책으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실존의 무게감을 느낄 수 없다고. 그런 뒤에 저는 덧붙였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실존의 무게감을 알려면 우크라이나인들이 쓴 책을 읽어봐야 한다고. 여기서 저는 <전쟁일기> 서평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일기>는 우크라이나인이 겪은 전쟁의 경험이 생생하게 남겨진 책이기 때문이니까요.

 

먼저 전쟁이라는 말의 무게감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제가 쓴 전쟁이라는 말은 참 피상적입니다. 이 때의 전쟁이라는 말은 뉴스 보도에 나오는, 인터넷의 동영상에 나오는, 책의 문장 속에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등장하는, 게임 속에서 가상의 게임 캐릭터가 경험하는, 딱 그 정도의 무게감 밖에 없습니다. 그건 제가 전쟁을 실제 삶으로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쓰는 전쟁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실제 삶의 무게는 없는, 가상의 간접경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까요.

 

그에 비해 <전쟁일기> 전쟁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무겁고도 무겁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그림책 작가였던 저자 올가 그레벤니크는 35년간 평화롭게 지내던 삶에서, 하룻밤 사이에 폭격 소리를 들으며 전쟁이라는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삶의 안전함이 사라진, 남편과 아이들, 함께 지내는 개, 자기 자신의 목숨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으로의 급전직하. 평온함이 아닌 불안이 지배하는 삶. 눈앞에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나날을 저자는 단순하고도 인상 깊은 그림과 짧은 글들로 생생하게 남깁니다. 마치 생생한 전쟁의 호흡을 전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 우크라이나를 떠나서 폴란드를 거쳐 불가리아로 가서 정착하게 된 저자. 성인 남자는 국경을 넘을 수 없어서 남편을 우크라이나에 두고 온 저자의 불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의 나날 속에서 그림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의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은 이렇게 머나먼 이국의 저라는 사람에게도 와 닿았습니다. 전쟁이 평범한 이의 삶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생생하게 전하며.

 

<전쟁일기>를 읽으며 위에서 적은 것처럼 제가 말하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게감 없고, 피상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실제 겪은 것은 사람만이 전쟁을 말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실제 전쟁을 겪은 사람이 느끼는 전쟁이라는 단어의 무게감과 전쟁을 겪지 못하는 이가 말하는 전쟁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의 차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이 서평 이전에 혹평을 했던 책을 쓴 저자가 과연 우크라이나인의 실존의 무게감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 말의 무게감을 얼마나 생각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진부하기 그지 없는 주장을 하면서 마치 자신은 진부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 그 저자는 진짜 우크라이나인에게 닥친 전쟁이라는 삶의 무게감을 파악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위해서 아무 생각없이 말을 했을까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자기 주장의 진부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걸 보며 아마도 자기가 말하는 단어의 무게없음을 깨닫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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