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2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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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43.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마종기

 

 

한문이라는 낯선 타자...

 

 

제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계속 이어지는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글을 쓰자는 의도로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계속 뭔가 이어지네요. <, 만들어진 위험>의 리뷰를 쓰는 척하며 제 안에 있던 이야기를 했던 게 계속 이어지니 신기하네요.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의 힘에 홀린 듯한, 나도 모르는 어떤 에너지의 끌림에 따라서 계속 글이 써지는 듯한...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계속 써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쓰게 됐네요. <, 만들어진 위험>에서 '유일신의 공백상태'로 지냈던 제 삶을 고백하고, <신을 옹호하다>에서 제게는 너무나 낯선 '유신론'을 만난 걸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낯선 타자는 '유신론'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만났던 낯선 타자 이야기를 이 글에서 한 번 해보려합니다.

 

 

시작은 시읽기였습니다. 한때 저는 시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창비,문지,문학동네,민음사,실천문학,문예중앙에서 나온 시들을 쭈욱 읽어왔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를 끊었습니다. 마치 뭔가에 중독된 사람이 자신을 중독시킨 물질을 끊는 것처럼. 제가 왜 시를 끊었는지, 시의 ''자도 쳐다보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흐름이 흘러갔다 지나가는 것처럼, 시를 읽는 흐름이 사라져간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중독이 뭔지 아시는 분들을 아실 건데요, 사실 진짜 중독 상태가 되면 중독을 불러일으킨 물질을 끊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독자에게 중독물질을 끊는 건, 단지 잠시 중독된 물질을 멀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시를 끊은 저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예 없이 잘 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가 그리워지는 거에요. 다시 시를 읽어야겠다, 언젠가는 읽어야겠다 하는 식으로. 말은 많이했습니다. 실행은 하지 못했죠.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다가 최근에야 시집을 펼쳤습니다. , 얼마나 좋던지. 어떤 만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책에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와 눈이 부시는 경험을 했다고 해야하나? 제가 읽은 시집에서 마법의 힘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새롭게 시집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 나름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집들을 한 번 순서대로 읽어보자 식으로. 그래서 저는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1번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1번 시집인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문제없이 잘 넘어갔습니다. 다음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2번 시집인 마종기 시인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펼쳤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펼칠 때부터 뭔가 불안했습니다. 글자 모양부터, 인쇄의 느낌이 확 예전 느낌이 나는 거에요. 고전적이라서 매력적인데 하는 생각으로 아무생각 없이 읽는데... 읽는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히도 제가 읽지 못하는 한문들이 눈앞에 마구 나타나기 시작한겁니다. 몇 글자가 나타난 건 괜찮았는데, 읽다보니 한문이 시야를 가득 채우더군요. 한문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도저히 어찌할 줄을 모르겠더군요. 추측해보건데, 저는 최근의 판본이 아니라 예전 판본을 저도 모르게 읽은 것 같습니다. 독자가 한문을 당연히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인이 써내려간 무수한 '한문의 바다'가 펼쳐지는데, '한문세대'도 아니고 한문과 친해져본 적이 없는 저는 그 한문의 바다 앞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난파선을 탄 기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시의 언어라는 형태로 나타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한문이라는 타자 앞에 선 상황.

 

 

<신을 옹호하다> 리뷰에서도 썼지만, 저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을 따라서, 타자라면 제가 이해할 수 없고 낯선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타자의 정의대로라면,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나타난 무수한 한문들의 더미는 타자가 맞습니다. 타자가 맞으니,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타자와 함께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물론 타자는 이해하기 쉽지 않고 낯선 존재이지만, 저는 소통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으니까요. 이해도 못했고 뭘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읽었습니다. 읽었긴 했는데, 책을 읽은 게 아니라 눈앞으로 종이가 스쳐 지나간 기분입니다. 분명히 눈앞에 글자가 보이는데 안 보이는 상황이라고 할까요. , 제목이 딱 맞네요. 시집 제목에 들어간 '안 보이는' 이라는 단어처럼 저는 시집을 봤지만 안 본 것이니까요.ㅎㅎㅎ 어쨌든 봤지만 안 보이는 시를 읽은 경험을 한 저는 이 시집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문더미가 아니라 한글이 많은 시로서. 그때서야 이 시집과의 제대로 된 만남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리고 역시 타자와의 만남은 너무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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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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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3.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3)

 

 

유신론과 만나다...

 

 

1.

 

칸트의 <학부들의 다툼>을 보면, 거의 끝 부분에 칸트 말년의 이상인 '영원한 평화'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노학자의 이상이었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영원한 평화'에의 제언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벼락처럼 이와 관련된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마치 무언가 계시가 내려온 것처럼. 이전에도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을 읽으면서, 칸트의 '영원한 평화' 이야기를 들었고, 얼핏 관심을 가진 채 그와 관련된 책들을 몇 개 읽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내가 언제나 그렇듯(^^;;) 사그라졌고, 관심에서 멀어졌다. 벼락처럼 찾아온 생각들을 무시할 생각이 없었던 현재의 나는 칸트와 가라타니 고진을 넘나들며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간>,<세계공화국으로>,<탐구1>,<탐구2>,<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비판기 이전 저작1(1749~1755)><비판기 이전 저작2(1755~1763)>,<비판기 이전 저작3(1763~1777>...

 

 

2.

 

<탐구1>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대화란 자기 자신이랑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하는 것이라고. 이 때의 타자는 자기 자신과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대화에서의 타자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소통은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화의 가치는 더 빛난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존재와의 대화를 위해서는 놀라운 도약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빌려 그 도약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말한다. 나의 입장에서 바꿔 말한다면, 내가 유신론자들이 쓴 책을 읽는 게 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유신론의 공백 상태에서 지내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존재로서의 유신론을 만났기에. 당연하게도 이를 위해서는 내 나름의 사상적 도약이 필요하고.

 

 

3.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그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입장 차가 있다는 것이다. 아주 맹목적인 이들도 있고, 조금 더 유연한 이들도 있고, 유신론자이지만 아주 생각이 다른 이들도 있고. <신을 옹호하다>의 테리 이글턴은,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테리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당연하게도 유물론자이고, 또 당연하지 않게 유신론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 유물론자에 유신론자라. 이 조합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신을 옹호하다>를 통해 테리 이글턴은 자신의 모순적으로 보이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아주 소수파에 속하다는 자각을 분명히 하고 있는 테리 이글턴은, 소수파로서의 자신의 주장을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을 비판하면서 전개해나간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시종 일관 유머와 유쾌함을 잃지 않은 그의 태도를 따라가다보면 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내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완벽하지 않지만, 내가 타자와의 소통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대화를 위한 과정으로서의 웃음.

 

 

4.

 

영역의 차이. 무신론자들의 책과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내가 읽은 무신론자들의 책은 주로 과학의 영역에서 말한다. 반대로 내가 읽은 유신론자들의 책은 신학과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영역을 이용한다. 물론 고대,중세,근세,근대 초기만 해도 과학은 철학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철학에서 갈라져 나와 힘을 획득한 이후로는 과학은 철학이 속한 인문학과 다른 영역처럼 느껴지게 됐다. 그래서 나는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영역이 다르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둘 다 똑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영역이 다른 곳에서 말하는 식으로, 무언가 조금 어긋나 있는 느낌.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자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들이 현대 신학의 발전과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식으로.

 

 

5.

 

<신을 옹호하다>는 내가 거의 최초로 읽은 유신론 옹호 책이다. 그전에도 중세 관련 책이나 종교학,신화학, 문화사 관련 책을 읽은 적은 있다. 하지만 책 전체가 유신론 옹호에 쓰인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었던 만큼 특별하고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테리 이글턴도, 다른 서양의 유신론자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풍기는 신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분위기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논리적으로 나름 설명하고 설득하려 하지만 유신론의 공백상태로 살아온 내게는 신이 당연히 있다는 듯한 느낌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나 같이 평생을 신이 없이 살아온 이들을 만난적이 없었겠지. 만난 적이 없으니 그런 독자들을 상대로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테고. 아마 그들은 상상하지 못하리라. 평생에 걸쳐 신의 도 만나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 상상력의 결여가 그들과 나 사이에 강력한 진입 장벽을 만든다. 그리고 그 진입장벽은 다시금 일깨운다. 그들이 나에게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타자라는 사실을.

 

 

6.

 

다시 가라타니 고진으로 돌아간다. 가라타니 고진은 나 자신과 같은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는 이들과만 대화하는 건 독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대화가 의미가 있으려면,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대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그는 말한다. 나에게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는 건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대화에 가까운 행위다. 나는 그들이 자연스럽게 풍기는 신이 당연히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다. 도덕과 윤리의 근원으로서의 신을 말하며, 그런 근원적 존재로서의 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듯이 말하는 걸 나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읽어도 읽어도 그 부분은 쉽게 이해가 안 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삶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이다. 신이 당연히 있는 삶을 상상해보고, 그런 사고방식을 온몸에 체화한 채 사는 삶을 상상해보면서. 이것이 완벽한 건 아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의 삶을 상상으로 추체험하며 그들을 따라간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대화의 의미는 대화를 완벽하게 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향한 대화 참가자의 몸부림에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몸부림에서 타자를 향한 도약이 나오는 것이고. <신을 옹호하다>는 그 몸부림의 첫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니, 나는 앞으로도 종종 이 책을 읽을 것 같다. 유신론자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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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만들어진 위험 -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당신에게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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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1., 만들어진 위험-리처드 도킨스

 

 

제목: 나는 기독교를 왜 믿지 않는가....

 

 

서양의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이 쓴 책을 번갈아 읽으면서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서양 사람들이야 기독교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니까 기독교를 믿냐 안 믿냐 혹은 신을 믿냐 안 믿냐가 중요한데, 저한테는 사실 ''이나 '기독교'라는 단어나 개념이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왜 그런지...

 

 

제 삶을 한 번 곰곰히 되돌아봅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린시절을 돌아보니 ''조차 제 삶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 교회는 등장하네요. 하지만 교회는 교회일 뿐, 그건 신이 아닙니다. 누가 일요일에 오라고 하는데 귀찮아서 교회를 안 갑니다. 그때뿐 학창시절에 신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학교에 가니 한 친구가 열성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 하도 오라고 해서 한 번 가봤습니다. 그런데 한 번 갔는데,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막 우는 거에요. , 너무 무서웠습니다. 무섭고 이상하고 그래서 가기 싫었습니다. 그 친구랑 친해서 몇 번 더 가기는 했는데, 지속적으로 다니지는 못합니다. 기도할 때 마다 사람들이 하도 열성적인 분위기라, 저도 뭔가 해야 할 거 같아서, 슬픈 생각을 하며서 우는 척을 했는데, 우는 척을 올 때마다 하는 게 힘들 것 같아서요.^^;; 그 때도 신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뭐라고 하는데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모르겠고, 잠오고, 사실 힘들었습니다. 제 기억에 신은 없고, 교회와 사람들의 열띤 기도, 친구와의 우정만 있네요. ㅎㅎㅎ

 

 

제 삶에 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건, 20대 후반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제가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거든요. 책을 읽으면서 신을 본격적으로 접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의 신은 종교로서의 신이 아닙니다. 사상과 문화, 철학, 역사에 등장하는 신입니다. 종교로서의 신을 제가 생각하게 된 건, 고전을 열심히 읽게 되면서 유럽 중세 책들을 읽으면서입니다. 그때서야 저는 신을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신으로서 생각하게 됩니다.

 

 

더 자세하게 써 볼께요. 제 어머니도, 아버지도, 친척들도, 제가 지속적으로 만나는 친구들도 기독교인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기독교인 친구들을 만나거나, 사회 나가서 기독교인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들과의 친분은 깊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은 제 삶에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진짜 단 한 번도. 저는 신없이 살아왔고, 제 주변의 사람들도 저처럼 신 없이 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무신론이나 유신론과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으니까요. 신이라는 단어가 삶에 등장하지 않는데, 왜 유신론과 무신론을 따지나요. 저는 신을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신이 있냐 없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제 삶에 얼마나 많은데, 2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싸우고도 답이 안 나오는 논쟁에 제가 왜 끼어드나요. 저는 그런 문제에 관심없습니다. 저한테 신은 무관심 그 자체입니다. 아니 등장하지 않으니까 공백이자 무네요. 신이 있냐 없냐는 신이 등장하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따질 일입니다. 제가 책을 열심히 읽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신과 상관없이 살다 죽었을 겁니다.

 

 

책을 읽고 나서야 저는 신의 개념을 머리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근데 이건, 믿음의 존재로서의 신이 아닙니다. 이 신의 개념은 사상과 철학, 문화의 개념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에게 신은 컬트적인 개념입니다. 너무 낯설고 특이해서 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생각하고 보면 신기하고 특별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저는 유신론자들의 책이 흥미롭습니다. 아 이런 삶의 방식이 있구나. 아 이런 생각과 사고방식이 있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저한테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다니엘 데닛은 전투적인 무신론자이면서 역설적으로 신에 얽매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신이 없어'라는 외침을 너무 강하게 외치니까요. 너무 강한 외침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신 개념과 그들이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기독교 문화권인 서양 사람들이라 더 강하게 외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 문화의 기반이 되는 걸 부정하려면 그런 강한 외침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다릅니다. 저의 삶에 신은 공백입니다. 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기에, 언급할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제 친구들처럼 신이라는 개념 없이 잘 살아갔을 겁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저는 책을 통해 신이라는 개념을 만났습니다.^^;; 신이라는 개념을 만났지만 믿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건 개념이지 삶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제가 왜 신을 안 믿냐구요? 삶에 등장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신의 ''도 접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냐요. 그걸 믿는다면 그야말로 기적이죠. 저는 기적이 있어야 신을 믿을 것 같습니다. 기적 없이는 아마도 힘들 듯.^^;; 다 쓰고 보니 이거 서평 맞나요? ㅋㅋㅋ 책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제 이야기만 잔뜩 했네요. 그래도 이 책을 읽고 떠오른 생각이라 써보긴 했습니다. 뭐 서평의 정확한 형식이 없으니까 이런 것도 서평이라고 우기면 서평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어쨌든 말도 안 되지만 이 글도 서평이라고 우기면서 이상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인생에 확신이 힘들기에, 제가 나중에 신을 믿는 기독교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면 그 확률이 무지 낮은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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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21-11-10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투적인 무신론자...입니다만.^^

짜라투스트라 2021-11-10 19:32   좋아요 0 | URL
누구나 다 삶의 맥락과 이야기가 있죠.
아마 뒷북소녀님도 전투적인 무신론자가 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저 위에 적힌 글은 제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대한 저만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이왕 댓글을 다셨으니 조금 더 보충해서 글을 써볼께요. 글이 길더라도 이해바랍니다.^^;;

살아 생전 단 한번도 신이 삶에 등장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신을 믿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공부를 하면서 봤던 유럽의 중세는 시험문제로만 존재했고, 대학교 때 친구 따라 교회 가면서 들은 이야기들은 관심이 없어서 한 귀로 흘려버렸죠. 역설적으로 제가 종교적 실체로서의 신을 만난 건 책에서 만난 서양의 무신론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무신론을 통해서 종교적 실체로서의 유신론을 만났기 때문에 저한테는 서양의 무신론과 유신론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엮여 있는 것처럽 보입니다. 기독교 중심의 서양의 문화권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들이 무신론자로 살려면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주장하고 증명해야 자신의 존재증명이 되는 것처럼 보여서요.

반면에 저한테는 무신론은 삶 그 자체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신이 존재했던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제 삶은 ‘유신론의 공백 상태‘죠, 가만히 있어도 그냥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주변인들도 다 저랑 같아서 저랑 제 주변인들은 굳이 ‘나 무신론자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 안해도 다 신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우리는 무신론자로서의 자신의 존재증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 무신론자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게 좀 특별하긴 했습니다. 말 안해도 아는 걸 주장하고, 그걸 논증하는 셈이니까요. 물론 위에서도 적었지만 그들이 사는 문화권에서 그들이 상대하는 유신론 진영의 힘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강력한 주장이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긴 합니다.

무신론을 통해서 종교적 실체로서의 유신론을 처음 만났고, 나중에 중세철학이나 종교학, 기독교 신학 책을 읽으며 바라본, 유신론은 저한테 아주 이상하고 특별한 문화적 현상에 가깝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삶의 양상이자 형식이고 그들한테는 너무나 소중한 종교적 믿음이기에, 저는 그런 삶을 하나의 사상이자 철학, 문화형식으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이상을 넘어서기에는 유신론의 백지상태로 지냈던 저한테는 힘든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라는 말은 서양의 번역어이고 서양의 상황을 나타내는 말처럼 보입니다. 신이 있냐 없냐를 두고 싸우는 서양의 철학적 논쟁이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맹위를 떨치고 나서야 있었다고 보면, 한국 역사는 대부분 ‘유신교의 공백상태에 있는 것처럽 여겨집니다. 저 역시도 유신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고요. 그래서 저는 저와 저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이들을 위한,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한 단어나 개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서양인들의 번역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맥락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나 개념.

아이고 적다보니 너무 말이 길어졌네요. 미안합니다.^^;; 이젠 말을 그만하겠습니다. ㅎㅎㅎㅎ
 
신인간지성론 1 - 로크의 『인간지성론』에 대한 비판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626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지음, 이상명 옮김 / 아카넷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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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1.신인간지성론1-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독서노트

 

 

존 로크는 <인간지성론>에서 말한다. 인간은 '타불라 라사'(빈 서판)이며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여자신의 삶을 채워나간다고. <인간지성론>을 읽은 동시대 대륙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존 로크의 주장을 참을 수 없었나보다. 그는 <신인간지성론>이라는 책을 써서 존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을 비판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진 대화편의 대화 형식을 이용해서, 그는 인간은 결코 빈 서판이 아니며, 인간 안에는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명석하고도 판명하게 떠오르는 본유관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존 로크의 분신 같은 존재인 필라레테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테오필루스의 입을 빌려 전개되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처음에 등장하는 '본유관념'의 파트를 넘어서면, 그 이후로는 자신의 주장을 세세하고 지난하게 논증하는 과정을 통해 펼쳐진다. 나 또한 본유관념 파트 이후로는 물처럼 술술술 읽어 나갔다. 그 주장이 딱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한자한자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하지만 이 '술술술 읽어나간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먼저 이 말을 말하기 위해서는 나의 과거 경험을 말할 수 밖에 없다.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실행한 서양 인문 고전 독서 경험을 통해서 나는 나만의 고전 독서 방법을 익혀나갔다. 그건 '익숙함'이라는 단어와 이어진다.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어서 고전했던 초반의 경험이 지속되는 하드 트레이닝(^^;;)으로 인해서 점차 익숙해지는 식으로. 익숙해진다는 말은 한자한자 읽기 힘들어서 한장도 제대로 넘기기 힘들었던 내가 책 한 권을 그래도 어려움 없이 뚝딱 읽어내는 식으로 변했다는 말과 같다. 어려움 없이 뚝딱 읽어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서양고전이 두렵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쉽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서양 인문 고전 독서는 내게 '어렵지 않을 뿐'이지 쉬운 게 아니다. 여전히 내게 서양 인문 고전은 어렵고 힘든 책이다. 하지만 독서를 하면서 그 어려움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 내야 하는지를 나만의 방식으로 익혔기에 예전처럼 어렵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어렵지 않다''쉽다'의 엄청난 간극을 나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기에 ,나는 서양 인문 고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내지 쉽게 읽어내지는 못한다. <신인간지성론1>도 마찬가지로 나는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쉬운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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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교화장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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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0.심리죄:교화장-레이미

 

 

독서노트

 

 

비극의 연쇄고리. 비극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비극이 계속되다보니 희극이 틈입할 틈이 책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극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비극이 비극으로 보이지 않고 '운명'처럼 느껴진다. 흥미로운 건 책의 가장 첫 부분에 '운명이라는 건 없다. 모든 것은 시험, 징벌, 혹은 보상일 뿐.'이라는 볼테르의 말이 적혀 있었다는 점. 작가는 비극이 계속되면 운명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걸 알고서 이 책에 나오는 비극의 연쇄가 운명처럼 보이지 않게 미리 막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이런 비극의 연쇄가 운명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고서 아닌척 하는 문학적 제스처를 취한 것일까?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던간에 책에 가득한 비극과 비극이 불러일으킨 어둡고 부정적인 기운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빠져들어가는 오이디푸스의 삶처럼. 여기까지 쓰고 보니 책의 첫문장을 내식대로 다시 쓰게 된다. '운명이라는 건 있다. 이 책에서처럼 모든 것이 비극으로 귀결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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