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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평점 :
8503.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3)
유신론과 만나다...
1.
칸트의 <학부들의 다툼>을 보면, 거의 끝 부분에 칸트 말년의 이상인 '영원한 평화'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노학자의 이상이었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영원한 평화'에의 제언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벼락처럼 이와 관련된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마치 무언가 계시가 내려온 것처럼. 이전에도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을 읽으면서, 칸트의 '영원한 평화' 이야기를 들었고, 얼핏 관심을 가진 채 그와 관련된 책들을 몇 개 읽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내가 언제나 그렇듯(^^;;) 사그라졌고, 관심에서 멀어졌다. 벼락처럼 찾아온 생각들을 무시할 생각이 없었던 현재의 나는 칸트와 가라타니 고진을 넘나들며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간>,<세계공화국으로>,<탐구1>,<탐구2>,<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비판기 이전 저작1(1749~1755)><비판기 이전 저작2(1755~1763)>,<비판기 이전 저작3(1763~1777>...
2.
<탐구1>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대화란 자기 자신이랑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하는 것이라고. 이 때의 타자는 자기 자신과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이다. 자기 자신과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대화에서의 타자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소통은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화의 가치는 더 빛난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존재와의 대화를 위해서는 놀라운 도약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빌려 그 도약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말한다. 나의 입장에서 바꿔 말한다면, 내가 유신론자들이 쓴 책을 읽는 게 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유신론의 공백 상태에서 지내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존재로서의 유신론을 만났기에. 당연하게도 이를 위해서는 내 나름의 사상적 도약이 필요하고.
3.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그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입장 차가 있다는 것이다. 아주 맹목적인 이들도 있고, 조금 더 유연한 이들도 있고, 유신론자이지만 아주 생각이 다른 이들도 있고. <신을 옹호하다>의 테리 이글턴은,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테리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당연하게도 유물론자이고, 또 당연하지 않게 유신론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 유물론자에 유신론자라. 이 조합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신을 옹호하다>를 통해 테리 이글턴은 자신의 모순적으로 보이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아주 소수파에 속하다는 자각을 분명히 하고 있는 테리 이글턴은, 소수파로서의 자신의 주장을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을 비판하면서 전개해나간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시종 일관 유머와 유쾌함을 잃지 않은 그의 태도를 따라가다보면 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내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완벽하지 않지만, 내가 타자와의 소통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대화를 위한 과정으로서의 웃음.
4.
영역의 차이. 무신론자들의 책과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내가 읽은 무신론자들의 책은 주로 과학의 영역에서 말한다. 반대로 내가 읽은 유신론자들의 책은 신학과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영역을 이용한다. 물론 고대,중세,근세,근대 초기만 해도 과학은 철학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철학에서 갈라져 나와 힘을 획득한 이후로는 과학은 철학이 속한 인문학과 다른 영역처럼 느껴지게 됐다. 그래서 나는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영역이 다르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둘 다 똑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영역이 다른 곳에서 말하는 식으로, 무언가 조금 어긋나 있는 느낌.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자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들이 현대 신학의 발전과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식으로.
5.
<신을 옹호하다>는 내가 거의 최초로 읽은 유신론 옹호 책이다. 그전에도 중세 관련 책이나 종교학,신화학, 문화사 관련 책을 읽은 적은 있다. 하지만 책 전체가 유신론 옹호에 쓰인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처음이었던 만큼 특별하고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테리 이글턴도, 다른 서양의 유신론자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풍기는 신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분위기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논리적으로 나름 설명하고 설득하려 하지만 유신론의 공백상태로 살아온 내게는 신이 당연히 있다는 듯한 느낌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나 같이 평생을 신이 없이 살아온 이들을 만난적이 없었겠지. 만난 적이 없으니 그런 독자들을 상대로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테고. 아마 그들은 상상하지 못하리라. 평생에 걸쳐 신의 ㅅ도 만나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 상상력의 결여가 그들과 나 사이에 강력한 진입 장벽을 만든다. 그리고 그 진입장벽은 다시금 일깨운다. 그들이 나에게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타자라는 사실을.
6.
다시 가라타니 고진으로 돌아간다. 가라타니 고진은 나 자신과 같은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는 이들과만 대화하는 건 독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대화가 의미가 있으려면,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대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그는 말한다. 나에게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는 건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대화에 가까운 행위다. 나는 그들이 자연스럽게 풍기는 신이 당연히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다. 도덕과 윤리의 근원으로서의 신을 말하며, 그런 근원적 존재로서의 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듯이 말하는 걸 나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읽어도 읽어도 그 부분은 쉽게 이해가 안 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삶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이다. 신이 당연히 있는 삶을 상상해보고, 그런 사고방식을 온몸에 체화한 채 사는 삶을 상상해보면서. 이것이 완벽한 건 아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의 삶을 상상으로 추체험하며 그들을 따라간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대화의 의미는 대화를 완벽하게 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향한 대화 참가자의 몸부림에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몸부림에서 타자를 향한 도약이 나오는 것이고. <신을 옹호하다>는 그 몸부림의 첫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니, 나는 앞으로도 종종 이 책을 읽을 것 같다. 유신론자들의 삶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