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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0년 9월
평점 :
8543.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마종기
한문이라는 낯선 타자...
제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계속 이어지는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글을 쓰자는 의도로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계속 뭔가 이어지네요. <신, 만들어진 위험>의 리뷰를 쓰는 척하며 제 안에 있던 이야기를 했던 게 계속 이어지니 신기하네요.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의 힘에 홀린 듯한, 나도 모르는 어떤 에너지의 끌림에 따라서 계속 글이 써지는 듯한...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계속 써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쓰게 됐네요. <신, 만들어진 위험>에서 '유일신의 공백상태'로 지냈던 제 삶을 고백하고, <신을 옹호하다>에서 제게는 너무나 낯선 '유신론'을 만난 걸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낯선 타자는 '유신론'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만났던 낯선 타자 이야기를 이 글에서 한 번 해보려합니다.
시작은 시읽기였습니다. 한때 저는 시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창비,문지,문학동네,민음사,실천문학,문예중앙에서 나온 시들을 쭈욱 읽어왔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시'를 끊었습니다. 마치 뭔가에 중독된 사람이 자신을 중독시킨 물질을 끊는 것처럼. 제가 왜 시를 끊었는지, 시의 '시'자도 쳐다보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흐름이 흘러갔다 지나가는 것처럼, 시를 읽는 흐름이 사라져간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중독이 뭔지 아시는 분들을 아실 건데요, 사실 진짜 중독 상태가 되면 중독을 불러일으킨 물질을 끊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독자에게 중독물질을 끊는 건, 단지 잠시 중독된 물질을 멀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시를 끊은 저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예 없이 잘 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시'가 그리워지는 거에요. 다시 시를 읽어야겠다, 언젠가는 읽어야겠다 하는 식으로. 말은 많이했습니다. 실행은 하지 못했죠.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다가 최근에야 시집을 펼쳤습니다. 아, 얼마나 좋던지. 어떤 만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책에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와 눈이 부시는 경험을 했다고 해야하나? 제가 읽은 시집에서 마법의 힘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새롭게 시집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 나름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집들을 한 번 순서대로 읽어보자 식으로. 그래서 저는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1번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1번 시집인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문제없이 잘 넘어갔습니다. 다음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2번 시집인 마종기 시인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펼쳤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펼칠 때부터 뭔가 불안했습니다. 글자 모양부터, 인쇄의 느낌이 확 예전 느낌이 나는 거에요. 고전적이라서 매력적인데 하는 생각으로 아무생각 없이 읽는데... 읽는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히도 제가 읽지 못하는 한문들이 눈앞에 마구 나타나기 시작한겁니다. 몇 글자가 나타난 건 괜찮았는데, 읽다보니 한문이 시야를 가득 채우더군요. 한문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도저히 어찌할 줄을 모르겠더군요. 추측해보건데, 저는 최근의 판본이 아니라 예전 판본을 저도 모르게 읽은 것 같습니다. 독자가 한문을 당연히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인이 써내려간 무수한 '한문의 바다'가 펼쳐지는데, '한문세대'도 아니고 한문과 친해져본 적이 없는 저는 그 한문의 바다 앞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난파선을 탄 기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시의 언어라는 형태로 나타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한문이라는 타자 앞에 선 상황.
<신을 옹호하다> 리뷰에서도 썼지만, 저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을 따라서, 타자라면 제가 이해할 수 없고 낯선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타자의 정의대로라면,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나타난 무수한 한문들의 더미는 타자가 맞습니다. 타자가 맞으니,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타자와 함께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물론 타자는 이해하기 쉽지 않고 낯선 존재이지만, 저는 소통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으니까요. 이해도 못했고 뭘 읽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읽었습니다. 읽었긴 했는데, 책을 읽은 게 아니라 눈앞으로 종이가 스쳐 지나간 기분입니다. 분명히 눈앞에 글자가 보이는데 안 보이는 상황이라고 할까요. 아, 제목이 딱 맞네요. 시집 제목에 들어간 '안 보이는' 이라는 단어처럼 저는 시집을 봤지만 안 본 것이니까요.ㅎㅎㅎ 어쨌든 봤지만 안 보이는 시를 읽은 경험을 한 저는 이 시집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문더미가 아니라 한글이 많은 시로서. 그때서야 이 시집과의 제대로 된 만남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리고 역시 타자와의 만남은 너무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