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묘한 일이다. 책을 다 읽었는데 책은 끝나지 않았다. 엔딩은 열려 있고, 작가는 소설의 결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채 책을 끝맺는다. 두 가지 결말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마지막에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독자에게 맡긴다는 늬앙스를 띄운다. 처음부터 어딘가 이상했다. 폭풍우로 난파된 배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한 청년이 다프네라는 배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 배, 어딘가 이상하다. 거대한 배안에, 온갖 기계에, 온갖 물건들, 새들과 식물들이 가득한데 아무도 없다. 여기는 새로운 노아의 방주인가? 아니면 죽은 자들이 찾아가는 고독한 낙원인가? 아니면 고독한 자들의 지옥인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배 안에서 주인공은 낮의 햇빛을 피한 채 밤에만 술에 취한 채 배안을 떠돌아 다닌다. 배안을 떠돌아 다닌 뒤에는 방안에 앉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여인에게 낭만적인 어조로 사랑의 편지를 쓴다. 주인공의 행적을 묘사하던 소설의 화자는 급작스럽게 주인공의 과거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자신의 이런 이야기 전환을 이해해달라면서.^^ 실험적인 소설들이 많이 쓰이면서 문학의 방향성을 모색하던 18세기 유럽의 소설들도 아닌, 20세기에 쓰여진 소설이 이런 식이라면 분명 무언가 작가의 의도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탈리아 지방의 소영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주인공은 아버지를 따라서 급작스럽게 한 성의 수비전에 참가한다. 전쟁의 근황과 상황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주인공이 살아가는 17세기의 과학지식이 또 갑자기 등장한다.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과학도 아닌 거의 미신에 가까운 이론들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당당하게 그게 과학이라고 말한다. 당대의 지식과 우주관, 과학관이 묘사되고, 소설은 다시 전쟁과 배 안을 헤매 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한다. 두 장면의 교차는 이 소설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가 그랬던 것처럼.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읽어온 독자라면 <전날의 섬>의 이런 전개가 어쩌면 익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만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읽은 나는 새삼 ‘아, 이게 움베르토 에코지’라는 말을 내뱉을 뿐이다. 아버지의 용감한 무용담으로 목숨을 구한 주인공은, 자신의 비겁한 행동이 부끄러워 더 과거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어린 시절 부끄러운 행동을 저지른 주인공은,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자기 자신에게 정당화하기 위해 가상의 쌍둥이 동생인 페란테라는 인물을 만들어 가상의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마지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이 가상의 쌍둥이 동생인 페란테 때문인 듯. 이 가상의 쌍둥이 동생 이야기는 지금도 어김없이 이어지며 주인공의 부끄럽고, 잘못된 행동을 자기 자신에게 정당화는 데 이용된다. 아버지는 너무나 용감해서 전쟁 중에 허망하게 죽고, 주인공은 아버지의 용맹함으로 이득을 얻은 뒤에 전쟁은 휴전으로 막을 내린다. 고향으로 돌아가나 주인공은 고향의 생활에 적응 못해 파리로 간다. 소설의 화자는 과거와 현재를 마음대로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 17세기의 많은 것들이 소설 속에서 살아 숨쉬게 만든다. 생활사, 세계관, 사회상, 사상, 과학, 기술, 예술, 종교... 파리의 사교계에 입문하고 사랑을 느낀 여인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는 주인공은 말도 안되는 공명약에 대한 이론을 습득하고, 그걸로 장광설을 펼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기운이라느니, 상처 부위와의 공명이라느니, 지금 들으면 사이비 의학에 불과한 이론을 거침없이 전개하며 사람들에게 공명약이 진정한 과학으로 인정받게 만든 교설을 전개한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을 느낀 여인의 행동을 보고 그녀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거침없는 착각을 전개한다. 그 착각의 끝에 그는 새롭게 프랑스의 권력을 잡은 마자랭에 의해 반역 혐의로 체포된다. 마자랭은 그를 불러내어 기회를 주겠다며 임무를 의뢰한다. 대항해시대 속에서 치열하게 식민지를 둘러싼 싸움을 전개하던 당시 유럽 국가들에게 정확한 경도의 일자 변경선을 찾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마자랭은 당시 부정확한 해도 문제로 고생을 하던 프랑스의 입장에서, 해도에서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이던 영국의 전문가 바드 박사의 항해를 따라가서 정보를 얻어내라는 말을 한다. 죄를 벗기 위해 주인공은 그 말에 따라 바드 박사가 탄 아마릴리스 호로 향한다.
휴... 무언가 말을 많이 한 거 같은데 아직 이야기는 많이 남았다.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어서 소설 속 화자처럼 내 맘대로 대충 적어본다. 다른 사람인 척 바드 박사 염탐, 다시 등장하는 당대의 과학 기술, 말도 안되는 과학에 설득된 사람들과 그걸 믿는 이들의 행동, 난파, 다프네에 등장한 살아 있는 사람, 신부인 그와의 논쟁, 성서를 옹호한 신부의 거침없는 노아의 대홍수 옹호, 자신들이 있는 배 다프네에서 보이는 섬이 그들이 그렇게 찾는 일자 변경선 너머의 섬이라는 신부의 주장(즉, 눈에 보이는 그 섬이 전날의 섬이라는 말), 섬에 가려던 신부의 실종, 실의에 빠진 주인공이 쓰기 시작하는 페란테의 소설. 그전까지는 그래도 현실의 시간대를 넘나들던 이 소설은 여기서부터 가상과 현실이 서로 섞이는 메타소설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페란테의 무수한 악행의 열거. 파리에 와서 이중, 삼중, 사중의 간첩 행위로 재상의 신임을 얻는데다 주인공인 척 주인공이 사랑하는 릴리아의 사랑을 받고,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기. 리슐리외가 죽어 후임인 마자랭에 의해 위기에 처하나 릴리아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제2다프네를 타고 항해하기. 항해의 끝에 릴리아를 선원 들에게 팔려고 하다 분노한 작가인 주인공에 의해 페란테가 천벌을 받아 죽고, 죽은 뒤에도 죽은 자들의 나라에서 벌 받기. 죽어 가는 릴리아를 향한 주인공의 안타까움. 그 릴리아가 자신이 보이는 섬에 도달했다는 사실의 열거. 현실과 분리되어 있던 가상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더니 어느새 현실과 가상이 일치하는 상황 앞에서 주인공은 릴리아를 구하기 위해 섬으로 달려나가고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끝이 난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는 그 뒤에 두 가지 다른 결말과 열려 있는 듯한 마무리로 소설을 끝내고, 소설은 그렇게 독자의 품으로 넘어간다. 이야기가 계속 되는 소설, 소설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소설이 되어 독자의 머릿속을 뱅글뱅글 무환하게 순환하는 소설. 이야기와 소설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그 무한한 이야기와 소설의 흐름을 맴도는 것뿐. 그렇게 나와 주인공과 소설의 화자와 <전날의 섬>과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는 돌고 돌고 또 돈다.
2. 독서모임에서 <마지막 목격자들>을 가지고 전쟁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떨지는 예상했던대로 였습니다.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데 전쟁을 가지고 이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보죠. 우리는 전쟁을 해야 합니다, 전쟁은 좋은 것입니다, 사람은 많이 죽을수록 좋습니다, 살인은 좋은 것입니다, 대량 살상 무기는 권장해야 합니다.... 이 무슨 미친 말입니까?^^;; 전쟁을 가지고 내릴 수 있는 결말이 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뻔해야 하고, 뻔할 수 밖에 없는 게 전쟁 이야기의 결말이니까요. 여기에 미학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의 아름다움, 살육의 아름다움, 파괴의 아름다움, 대량학살의 아름다움, 피가 뿜어져 나오는 미... 무슨 예비 사이코패스 범죄자 담론도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정해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건 미학이 아니라 윤리학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너무나 뻔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실천이성의 담론 같은. 독서 모임에서 나오는 전쟁 이야기의 결말이 뻔한 것은 그게 반드시 필요해서입니다. 다 같이 죽자고, 다 같이 파괴하자고, 다 같이 대량살육에 가담하자고, 다 같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죽이자고 책읽고 독서하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전쟁이라는 비극의 진실을 바라보고, 그것이 무슨 영향을 끼쳤고, 앞으로는 그런 비극이 어떻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또 하나의 전쟁 책을 펼쳐듭니다. <류성룡, 7년의 전쟁>. 류성룡이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인 임진왜란을 둘러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기 않기를 바라며 쓴 <징비록>에 기반한 이 책을 읽으며 저는 생각합니다.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어리석은 상황이 나오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