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 장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8
윌리엄 허드슨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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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녹색의 장원-윌리엄 허드슨

 

이 소설은 <정글 북>, <타잔> 등으로 대변되는 빅토리아 시대 대중 소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백인 남성 주인공, 이상적이고 신비한 여인, 생명력 넘치는 야생의 자연, 어딘가 열등해보이는 원주민, 제국주의, 인종주의, 오리엔탈리즘, 백인 우월주의, 남성 우월주의, 식민주의, 문명과 대비되는 자연... 여기까지보면 <녹색의 장원>은 더 이상 읽을 필요도 없는 그 시대 소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자세히 살피보면 어딘가 다른 면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이 균열점이 소설에 존재한다고 해야할까.

 

이 소설이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과 다른 것은 백인 남성의 실패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타잔>, <솔로몬 왕의 금광>, <잃어버린 세계> 같은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은 백인 남성의 성공 서사기 기본적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벨의 삶은 실패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아벨은 베네주엘라의 정치적 전복을 꿈꾸다 들켜서 도주합니다. 첫 번째 실패죠. 두 번째로 아벨은 야생으로 가서 황금을 찾는 엘도라도식의 꿈을 꿉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아벨은 황금을 찾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아벨은 야생의 숲에서 만난 신비한 여인 리마와의 사랑을 꿈꾸지만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네 번째로, 아벨은 숲에서 만난 원주민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리마를 죽인 원주민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원주민들끼리 싸움으로 살육을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야생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일체감으로 육식을 금하던 리마 때문에 하지 못하던 육식을, 리마가 죽고 나서 숲에서 자기 파괴적으로 지내다 무기력한 동물들을 잡아먹으면서 행하게 됩니다. 아벨은 죽은 원주민의 눈을 보면서, 육식을 행하면서 생각하는 자조와 자괴의 생각하면서,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긴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자각합니다. 정확하게 보면, 아벨은 원주민들보다 더 악한 행동을 한 것이죠. 이건 아벨이 가지고 있는 백인우월주의 실패라고 할 수 있죠.

 

위에 적은 것만 보면, 이 소설은 백인 남성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백인 남성 성공 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의 공식과는 다른 면이 있는 것이죠. 그러면 왜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대중 문학과 다른 것일까요? 추측이긴한데, 그건 작가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작가인 윌리엄 허드슨은 아르헨티나에서 미국 국적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그는 영국으로 가서 문인 생활을 하게 되죠. 문명에서 살며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르헨티나의 자연을 그리워합니다. 그는 정체성만 보면 아르헨티나인이자 영국인이자 미국인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는 완전한 아르헨티나인도, 미국인도, 영국인도 아닙니다. 세 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 나라 사람이 아닌거죠.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 어딘가에 있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백인 남성이지만 백인 남성 중에서도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그는 백인 남성 중심주의에 완벽하게 젖어 있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작가로서 그의 모호한 정체성이 이 소설에 반영된 탓인지, 백인 남성 중심주의와 동시에 그 이념의 실패와 균열이 소설을 맴돌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의 오독이자 확대해석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영국이라는 문명 속에 살며 남미의 자연을 그리워한 작가 윌리엄 허드슨은 남미에서 식민주의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영국에서 그는 가난한 삶도 경험했고, 기인으로서의 삶도 살았습니다. 문명과 자연을 모두 경험한 인물로서 그는, 백인 남성의 식민주의가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미의 자연에서 아벨의 지속적인 실패는 이런 그의 경험이 반영된,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실패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살육으로 몰아가는 건, 남미 식민지 역사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신비한 여인 리마와의 사랑의 실패 또한 백인남성 중심주의의 실패와도 이어집니다. 이렇듯 가득한 실패는 작가의 삶을 반영한, 빅토리아 시대 대중문학과 다른 소설의 등장으로 형상화됩니다.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오독이자 확대해석을 하고 나니, 제가 무언가 이 소설의 포장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확실한 건 이 소설이 다른 빅토리아 대중 문학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백인 남성의 실패로 점철된 소설, 자조와 자학, 망상을 거쳐 자기 정당화로 이어지는 백인 남성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낸 소설은 백인의 승리, 백인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다른 빅토리아 대중문학과 다를 수밖에 없죠. 마지막의 아벨의 자기 정당화는 동시대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위선과 허구와도 이어지죠. 죽은 리마를 다시 만날거라는 환상을 품고 자기 삶을 정당화하는 아벨의 모습은, 폭력과 학살, 착취로 가득한 유럽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그 시대 백인 남성들의 모습과 겹치죠.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정당화 속에서도 윌리엄 허드슨은 백인 남성들의 현실을 맴도는 실패와 위선, 폭력과 착취, 제국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의 허구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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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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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쇳밥일지-천현우

 

1.

<쇳밥일지>의 마지막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저자인 천현우 씨가 고향인 마산을 떠나는 걸로 끝납니다. 그래, 이제 과거 같은 번영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나의 친구들, 고마운 어른들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이 있다. 지금은 비록 돈을 벌러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들의 품속으로 다시 돌아 오고야 말리라. 돌아와서 고향을 위해 나 나름의 역할에 충실하리라. 비록 몸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오늘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쇳밥꾼들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주머니에 실패한 연인처럼 구겨져 있던 천원짜리 석장을 꺼냈다.

고향을 떠나기 전, 풀빵이 먹고 싶었다.(p.287)

 

2.

고향을 떠나는 천현우 씨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면서, 저는 책을 덮습니다. , 좋았다.. 이 말이 떠오르네요. 다시 생각해봅니다. 도대체 이 책의 무엇이 저는 좋았던 걸까요? 책이 좋은 이유는 책마다 다를 겁니다. 어떤 책은 서사의 힘으로, 어떤 책은 논리적 정합성으로, 어떤 책은 아름다운 문장의 힘으로, 어떤 책은 사유의 기발함으로, 또 어떤 책은 상황에 딱 들어맞는 비판의 유효성으로. 이렇듯 책이 좋은 이유는 무수히 많을 겁니다. 그 중에서 <쇳밥일지>가 좋았던 이유는 뭘까요? 제가 보기에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이 책에 넘쳐 흐르는 삶의 힘 때문인 것 같습니다.

 

3.

<쇳밥일지>는 삶과 밀착한 책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 공장에 다니며 쇳밥을 먹으면서 살아왔고, 그 과정을 가감없이 진솔하게 기록한 책답게, 이 책은 저자인 천현우 씨의 삶의 모습과 양상이 가득합니다. 공장 나가서 용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그 와중에 사랑도 하고, 산재사고도 겪고, 눈앞에서 다치는 사람들을 보고,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마주치고, 빚덩이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아픈 부모님을 돌보고, 사랑도 떠나보내고, 독서도 하고, 세상을 더 알아가고, 운동도 하고, 친구 만나고, 어떤 때는 눈앞의 일에 안주하고, 어떤 때는 우울해하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깨달음도 얻고, 운좋게 자신이 쓴 글이 알려져 글쓰는 일도 하는 등의. 읽다보면 책 속에 가득한 삶의 힘이 독자에게 전해져옵니다. 삶의 힘을 건네받은 독자는 저자의 삶에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의 삶 그 자체가 독자에게 설득력으로 다가오니까요.

 

4.

때로는 삶이 더 영화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서평을 쓰니까 영화보다는 문학이라는 말이 맞겠네요.^^;; 때로는 삶이 더 문학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는 <쇳밥일지>의 천현우 씨의 삶이 그랬습니다. 바람기 가득한 아버지, 친모 같은 애정을 준 양어머니, 생모와 지내면서 받았던 가정폭력과 학대, 크게 다쳐서 찾아온 아버지 때문에 과거의 양어머니와 다시 살던 일, 가난했던 나날들, 서울 말씨 때문에 괴롭힘받다 게임 잘해서 괴롭힘을 극복한 일.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나가면서 공장 일을 하면서 겪은 일들, 사랑과 좋은 이들과의 만남, 부조리한 일들과 힘겨움과 고통, 글쓰기를 통한 새로운 삶의 기회까지의 과정도 마찬가지처럼 만만치 않습니다. 본인에게는 평범한 삶의 과정이었겠지만, 그 삶을 글로서 읽어나가는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삶의 영역을 들여다보며 생생하게 체험해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이 글이 되는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문학적인 효과를 낳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것에 독자가 참여해서 그 합일의 과정을 체험하는 것. 이 과정이 좋았기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 걸 혼자 가슴 속에 품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요.^^;; 아무튼 저자인 천현우 씨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하하면서 저 또한 천현우 씨 삶과의 만남을 끝내고 저의 삶이라는 세계로 다시 떠나가겠습니다.

 

청년공으로 살아가기란 생각보다는 힘들고 꾸역꾸역 생존은 가능한 나날이었다. 그때의 시간들. 고와 낙이 있었고, 땀과 눈물이 있었으며, 희망과 좌절이 공존했고, 꿈이 짓이겨졌다가 다시금 피어났던 과거를 문자로 남겨보고자 한다.’(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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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썼다 지웠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글이라 적고 보니 뭔가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도 좋았던 건,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느낌을 글로서 털어내고 보니

내 마음 속 부정적인 감정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역시 글쓰기는 치유의 힘이 있나봐요.

앞으로도 종종 이런 경험을 시도해보겠습니다.

저 자신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서도 좋은 경험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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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1-31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이성복 시인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된 짜라투스트라님의 부정적 감정이 물러간 빈 자리에 긍정적인 감정이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짜라투스트라 2023-01-31 23:55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메데이아
에우리피데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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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메데이아-에우리피데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봤습니다. 송혜교가 연기한 문동윤이라는 인물이 잔혹한 학교폭력을 당하고, 그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신의 평생의 삶을 바치는 이야기로서. 드라마를 보다보니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을 문동윤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 그 사람의 복수를 응원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게 흡입력 있는 드라마의 힘이겠죠? 그런데 <더 글로리>를 보다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떠올랐습니다. 똑같은 복수극이지만 <더 글로리>와는 어딘가 다른 복수극으로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더 글로리>의 복수는 어떤 점이 다른 걸까요? 저는 이걸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반적인 복수. <더 글로리>도 그렇지만 <메데이아>도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복수극이 나옵니다. 주인공이 무언가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일을 당하거나 큰 배신을 당합니다. 배신 이후에 각성한 주인공은 사력을 다해 복수를 하며 자신이 당한 걸 상대방에게 되돌려줍니다. 이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응익주의는 뿌리가 깊습니다. 고대 합무라비 법전부터 고조선의 8조법까지 뿌리 깊은 이 응익주의는 복수극의 사고방식의 원형을 이룹니다. 응익주의에 기반한 복수극은 몬테크리스토 백작부터 무협소설의 다양한 복수이야기까지 무수한 이야기를 변주해냅니다. <메데이아>도 일반적인 복수극에 충실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아손을 따라나선 메데이아. 시간이 지나 성공을 위해 메데이아를 버리는 이아손. 그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아손을 파멸시키려 나선 메데이아의 복수극. 이아손과 결혼하는 여인을 죽이고, 죽인 것도 모자라 여인의 아버지까지 죽이면서 이아손을 파멸로 몰고가는 메데이아의 행동. 여기까지 보면 <메데이아>는 일반적인 복수극에 충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다릅니다. 왜냐구요? ‘메데이아의 복수는 더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복수. <메데이아> 속 메데이아의 복수는 더 나아갑니다. 이아손의 배신에 대한 복수로서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메데이아는 또다른 행동을 합니다. 바로 이아손과 메데이아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물론 메데이아가 이아손과 결혼할 공주를 죽이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독 묻은 예쁜 옷과 황금 머리띠를 공주에게 주는 도구로서 사용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후 상황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로서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손수 죽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가족주의가 공고한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더 쉽게 이해할 수 없겠죠. 하지만 저는 이 상황을 나름의 오독으로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메데이아가 아이들을 죽이는 행위는 완벽한 복수에 가깝다고. 복수가 뭡니까? 당한만큼 돌려주는 겁니다. 당한만큼 돌려주는 행위에 숨겨진 복수자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요? 어쩌면 복수자는 복수라는 행위를 하며 자신이 당하기 전의 삶을 갈구하거나 그때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죠. 이미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복수자의 복수는 어쩔 수 없는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메데이아는 당한만큼 갚아주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아이들마저 죽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의미입니까? 어쩌면 메데이아에게 아이는 자기 삶에 미친 이아손의 흔적이자 그림자였겠죠. 위의 글을 떠올려보세요. 복수자에게 복수라는 행위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벌이는 어떤 몸부림에 가까운 것입니다. 메데이아에게 복수의 완성은 자기 삶에 남은 이아손의 흔적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아이들을 죽이면서 자기 삶에서 이아손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죽인 것이라고 해도. 과거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으니 이것이 완벽한 복수가 아닌가요? 물론 과거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메데이아가 이아손을 만나기 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자신의 삶의 상황을 만든 것도 맞습니다. 이 정도면 저에게 메데이아의 복수는 완벽에 가까운 복수로 여겨집니다.

 

저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죽이면서까지 복수를 행하는, 완벽에 가까운 복수를 하는 복수극을 본적이 없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이야기도 그렇고, 무협소설의 다양한 복수극에서도 그렇고, 메데이아의 단계까지 복수를 밀어넣는 복수극은 없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메데이아>는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복수를 달성한 유일무이한 복수극처럼 여겨집니다. 어느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복수를 행한 복수자이자 완벽하게 주체적인 복수자가 나오는 복수극으로. 아마도 저에게 <메데이아>속 메데이아는 복수의 극에 도달한 복수자의 표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또다른 완벽한 복수자가 나오는 복수극을 보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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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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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영민

 

인간에게는 희망이 넘친다고, 자신의 선의는 확고하다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해맑게 웃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p.10~11)

 

독서 모임 때문에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펼쳐 읽었습니다. 읽는데 초반부에 저 문장들을 만났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데 문장을 읽으면서 어떤 인상들이 남습니다. 어떤 문장은 아무 인상도 없이 내 정신에서 흩어져 가고, 어떤 문장은 내 영혼에 스며들어 매력을 남기고, 또 어떤 문장은 참을 수 없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으면서 만난, 저 문장은 제게 매혹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문장을 만난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책이 저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으리라는 걸.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p.292~293)

 

독서 모임에 나오신 분들도 이 책이 인상 깊었나 봅니다. 모임에 나온 분들이 서로 합의한 것도 없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에게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자발적으로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모임의 흐름이 흘러 갔습니다. 자신이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분들의 대화 속에서 저는 독서 모임의 빛을 본 것 같습니다. 책에게서 좋은 것을 보고 그것을 남들과 나누고자 할 때 생겨나는 대화에서 생겨나는 빛. 그렇게 모임에 참석한 우리들은 독서 모임의 시간을 찬란한 성좌의 빛처럼 빛내고 있었습니다.

 

목적 없는 삶을 바란다고 하면, 누워서 꿀 빨겠다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오해다.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아니던가. 소극적으로 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목적도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p.291)

 

저자는 허무와 더불어 사는 삶을 주제로 산문집을 내겠다고 마음먹었고, 그에 관련된 생각의 편린을 다양한 지면에 발표하고 그 글들을 모아 이 책을 냈다고 합니다. 어쩌면 모임에 모인 우리는 허무와 더불어 사는 삶을 주제로 모인 글들을 보면서, 삶의 허무에 대항하는 어떤 몸부림을 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몸부림이 책을 읽는 독자의 삶과 겹쳐 보인 게 아닐까요. 겹쳐 보였기에 우리가 이 책과 공감했던 게 아닐까요. 공감했기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좋았고, 좋았기에 독서 모임에 나와서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시간을 가진 게 아닐까요. 너무 좋은이라는 말을 많이 해서 거짓말 같겠지만(^^;;) 실제로 좋은 독서를 하고 좋은 경험을 하고 좋은 독서 모임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좋은이라는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좋은 이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는 건 과장이라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어쨌든 좋았고, 좋아서 다음에도 좋은 독서 모임 시간 가지기를 기대해봅니다. , 어쩌면 이 모든 게 저자처럼, 허무에 대항하는 우리만의 방식이 아닐까요. 허무에 대항하는 우리만의 바식이 독서모임이라면, 우리는 삶의 허무에 대항하기 위해 독서 모임을 하고 또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허무에 대항하는 좋은 방식이니까요.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소.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되오, 그것들은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소.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고갈되지 않는 창고)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외다.(부록인 소식의 <적벽부>중에서,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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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1-29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무상한 것이기에 세상의 많은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허무함으로 자신 안으로 침잠하기 보다는 올해 피는 꽃은 다시는 피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아이의 눈으로 보듯 세상을 경이롭게 보는 것이 삶의 허무를 이겨내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3-01-29 14:08   좋아요 2 | URL
참 좋은 말이네요 여기서도 또 무언가 얻어갑니다^^

DYDADDY 2023-01-29 14:32   좋아요 2 | URL
김영민 교수님의 책 담아갑니다. 저도 김교수님이 어떻게 허무를 대하는지 공부하겠습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3-01-29 20:04   좋아요 1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