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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추리소설 같다. 보통 추리소설 하면 장르문학이라 해서 순수문학에 비해 하류로 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김영하가 썼다. ‘김영하’라면 이상문학상, 만해문학상을 받은 순수 문학가이다. 그런 이가 쓴 추리기법의 작품이라니 더욱 솔깃했다.
기대했던 만큼 흥미로웠다. 하지만 살인이나 폭력 등 잔혹행위에 대한 묘사는 쉽게 읽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소설 첫 부분부터 등장하는 김 노인의 이야기들이 유쾌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쉽게 끌리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긴장감이 있다. 초반부터 김 노인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긴장을 놓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김 노인이 읽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의 좋은 구절들이 오히려 긴장을 배가시키고 공포를 조장하면서 끝까지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김 노인은 오직 완벽한 쾌감을 위해 살인을 하는 끔찍한 연쇄살인마이다. 이런 그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 집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되자 일상사 및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다. 이 책의 이야기는 바로 김 노인의 기록이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면 독자인 내가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김 노인은 치매이고, 살인마이다. 치매 환자의 기억력과 살인마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점이다. 순순히 김 노인의 기록을 따라 의심 없이 읽었는데 놀라운 반전에 부딪히게 된다. 과연 시간이 죄이고 기억이 문제였을까?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결코 무관하지도 않을 것이다.
치매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가정이 늘고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치매 같이 노화에서 빚어지는 퇴행성 질환의 발병이 증가하고 있다 하니 수명이 더욱 더 늘어나는 앞으로는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예전에는 발병도 전에 생을 마치므로 크게 문제시 되지도 않았을 텐데...
이 책은 치매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또한, “이 생인지 저 생인지도 분명치 않다.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자꾸만 내게 여러 이름을 댄다. 이제 그 이름들은 내게 어떤 심상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사물의 이름과 감정을 잇는 그 무언가가 파괴되었다. 나는 거대한 우주의 한 점에 고립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 세상을 잊는다는 것 그리고 내 자신마저도 잊는다는 것. 이런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슴이 먹먹하고 머리가 멍해진다.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문제일 것 같다. 당사자나 가족 모두에게.
이 글을 읽기 전에는 치매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언론매체에서 치매 가정에 대한 사회적 대책이 시급하다고 할 때도 그 심각함을 몰랐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치매의 무서움을 느꼈다. 시간이 오래산 자에게 부리는 고약한 심술의 실상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치매를 소재로 한 글이 많지만 이 책처럼 그 두려움을 확실히 전해주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시간 감옥에 갇혀 있다.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감옥에서 벗어날 때까지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기억만은 담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마지막으로 가져야 할 희망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