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30년 넘게 책을 읽고 좋은 글만 모아놓은 파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저자의 파일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좋은 글 모음이 아니고, “누가 읽어도 고개를 끄덕일 글이기보다 개별자로서 나를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환기시킨 글 모임”이라며 속단을 경계한다. 나 역시도 나를 환기시키는 글에 안표와 필사를 계속해왔고 이 책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책 속의 책과 문장에 안표를 해 두었다가 옮겨 쓴다.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뇌가 새로운 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 발명이다. - 매리언 울프, <책 읽는 뇌>
고생 끝에 낙이라는 둥 어설픈 소리 믿지 마.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 너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쉽고 만만한 것들로 때우려 하지 말고 똑바로 쳐다봐. 밑바닥까지 바라봐. 네가 온 몸으로 견뎌낸 것들이 쌓여 너를 만드는 거야. 그렇게 성장하는 거야. 같잖은 희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성장과 자유의 즐거움을 누려봐. 내 어린 친구여, 부디 아모르 파티(Amor fati)!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얀 마텔의 소설 <베아트리스와 버질>에는 버질이 베아트리스에게 배를 설명하는 희곡이 등장한다. (중략) 버질은 베아트리스가 알고 있는 것에 기대어 한참 설명했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을 끝내 알릴 수가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버질의 이야에 푹 빠져 머릿속에 온갖 형상을 열심히 그려봤지만 최종적으로 몰랐다. 언어의 한다. 상상의 한계다. 인식의 한계다. 이 한계가 ‘프루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어 상대가 전하는 의미를 두드려 펴 늘이거나 머리 혹은 사지를 가차 없이 잘라낸다. - 유선경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깨끗한 팬티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작기는 하지만 확고한 행복의 하나(줄여서 소확행)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수한 사고체계인지도 모르겠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
리 대니얼 크라비츠, <감정은 어떻게 전염되는가>.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인간의 삶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규명되며 이런 상호작용은 주로 말을 통해 확립된다. - 장 폴 사르트르.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We cannot think what we cannot think).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에서.
도구화란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들이 다른 것들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처럼 취급되는 현상을 믿습니다. 예컨대, 다른 삶과 사랑을 하거나 우정을 나눌 때에도 그 관계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여부를 잘 따져야 ‘현명한’ 처신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 스벤 브링크만, <철학이 필요한 순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표시다. 왜냐하면 그 사람 역시 아파하는 한 명의 가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 레이 몽크, <비트겐슈타인 평전>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어떤 낱말의 의미는 주체가 주관적으로 정의하는 게 아니라 타인들에 의해 그 의미가 규정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잘못된 합의 효과(false-consensus effect): 자신의 의견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 가치로 간주하고 근거 없이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을 이르는 말.
대나무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하고 나서(成竹於胸中)’ 붓을 들고 자세히 바라보아야 그리고자 하는 것이 보일 것이니 그때에 급히 서둘러서 붓을 휘둘러 곧바로 그려내어 보인 것을 따라잡아야 한다. 마음속 생각이 충분하면 글은 저절로 써진다. - 소동파, <마음속의 대나무>.
그는 신비론자가 다 그렇듯이 자기의 절대는 오로지 순간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으리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아찔한 순간 속에서 절대를 자기 자신과 빈틈없이 연결해주는 그런 순간을 지향한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도 그런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 앙드레 말로, <인간 조건>
쓰고 싶은 만큼 써라. 잘 썼다고 생각하는 문장들을 다 빼라. 그래도 되는지 보라. - 어니스트 헤밍웨이.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중략)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적당한 어휘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작을 할 때는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았지만 제멋대로 떠오르는 어휘들이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나는 윤곽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영혼도 따라 변하고 나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 니코스 카찬차키스, <영혼의 일기>
우리는 마치 이국 땅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 나라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을 말하고 싶어도 회화책의 진부한 문장으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들과 같다. 머릿속에는 전하고 싶은 생각들이 들끓고 있음에도 기껏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정원사 아주머니 우산은 집 안에 있습니다.’ 따위인 것이다. - 윌리엄 서머셋 모음, <달과 6펜스>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 있지. - 미카엘 엔데, <모모>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려드리리다. - 니코스 카찬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의 반응은 더 이상 방금 전 곧추 서 있을 때와 같지 않다. (…) 누워서 생각하면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갑자기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우면 항복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어깨에서 짐이 떨어져 나간 듯 홀가분하다. - 베른트 브루너, <눕기의 기술>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 버트런트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다. -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그토록 위대했던 아킬레스가 항아리 하나도 다 채울 수 없을 만큼의 재료로 남았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온 세상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살아 있다. 온세상이야마로 그에게 어울리는 척도이며, 그곳에서만 펠레우스의 아들은 진정한 자신이기에 공허한 타르타라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 오이디우스, 천병희 역, <변신이야기>
읽고 싶은 책이 오지게 많아 같은 책을 여러 번 정독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고 읽은 책을 기억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인간의 뇌가 가진 한계, 망각에 대한 대항으로 생겨난 문자를 활용해 기억을 무제한으로 늘리기로 했다. 그래서 시작한 필사였다. 그러는 동안 깨우친 사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를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도, 사고력을 확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가 어떤 사고에 익숙한 사람인지조차 깨치지 못했을 것이다. - 유선경
—————
어휘력 이상의 깨우침을 준 책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