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걸까?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문단에서, 90 년대 중반 스웨덴의 복지 이상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알겠다. 복지의 가림막 뒤에서 개인의 나약함이 가려지고 방치되다가 복지가 줄면서 드러나는 상황이 쉽게 연상된다. 소설 속 인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소설이 시작되지만, 그런 사회 분위기가 작가한테 기성세대의 책임 같은 창작열을 자극하였으리라 짐작해본다.
작가는 범죄소설을 썼고, 나는 독자가 되었다. 범죄 소설을 읽어서 얻는 바가 무얼까. 지금까지 나는 이 장르의 독서 효과를 몰랐다. 착하게 살자 식으로 뻔한 교훈일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읽고서 나한테 다시 물어보게 된다.
나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걸까?
그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젊은이들이 분신자살을 하고 또 이런저런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세상이었다. 그들은 소위 실패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스웨덴 국민들이 믿었던,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세웠던 무언가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이미 잊혀버린 이상을 기념하는 기념비뿐이었다. 이제 그를 둘러싼 사회가 무너지고 있었다. 정치체계가 전복되는 중이었고, 이제 어떤 건축가가 나타나 새로운 건축물을 세울지, 그건 또 어떤 체계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름날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끔찍했다.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억하기보다는, 잊어버렸다. 이제 집은 안락한 가정이 아니라 도피처였다. 경찰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교도소도 다른 제복을 입은 사람들, 민간보안회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관리할 예정이었다.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발란데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더는 인정할 수 없었다. (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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