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석 전야

고향생각을 잠시 했었다. 고향을 떠나온지 얼마나 지났는지 햇수를 세는 일도 타향살이를 잠시나마 잊고자 향수에 젖는 일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명절에 고향 가는 일만큼은 꼬박꼬박 해왔는데 작년에 처음 빠트렸다. 올해는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는데 막상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쉬움을 달래고자 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혼쭐이 났다. 동생이 나를 많이 보고픈가 보다. 책을 읽지만 머리에 남지 않는다. 한 잔 술을 들이켜보지만 마음이 뒤숭생숭하다. 창밖이 밝을 줄 알았건만 추석 전날 한밤중인데 보름달이 보이지 않는다. 달은 커녕 비가 내리고 있다. 낮에 감상했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다시 들을까 보다.

2. 꿈의 대화

아, 시벨리우스! 그대를 진정한 인상파라고 말하지들 않는지 모르겠소. 드뷔시가 창가에 달빛이 쏟아지는 느낌을 피아노 곡으로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그대는 드뷔시를 능가한다고 생각하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그대의 나라에 순간 이동한 느낌이 들고 바이올린 선율은 나의 가슴에 시린 기분이 스며들게 하기에 그렇소. 들어도 들어도 좋소. 혹시 그대의 바이올린은 악마의 것인지 묻고 싶소만, 그렇다고 그대가 파가니니도 파우스트도 아니지. 나도 아오. 하여튼 정말 좋소. 이 세상 최고라고 내가 인정하는 바이오. 화답하는 의미로 들려 줄 테니, 우리나라 시인이 남긴 시조를 한번 들어보시오.

벽공(碧空) / 이희승

손톱으로 톡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드리우고 있건만.

시벨리우스, 그대의 바이올린 현이 튕기는 소리는 내 마음 속에서 청명한 하늘에 쨍 하고 금이 간 듯 생채기를 남겼소. 가끔은 아프다오…


3. 추석 아침

비가 밤새 내렸고, 눈을 떠보니 비는 그쳐 있다. 아침 공기가 차다. 한기가 느껴짐에 북유럽의, 마시면 바로 얼어버릴 것 같은 가슴 시린 공기인 듯 싶다. 고향 대신 북유럽에 가는 기분을 다시 느껴볼까.


국내서 판매 중인 (품절/절판 상태가 아닌)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수록한 음반을 모아 보았다. 정경화가 연주하는 음반이 모두 품절 아니면 절판 상태여서 참 안타깝다. 정경화는 1970년에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협연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여 첫 음반으로 내놓았는데 명연주 중 하나로 뽑힌다. 그리고, 최근에 리사 바티아쉬빌리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는데 20대의 정경화를 지금 보는(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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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21 11: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벨리우스는 어제 스캇님 페이퍼를 통해서 처음으로 진득하게 들어보았는데 세상에 이런 곡도 다 있구나! 생각해서 그런지 꿈의 대화 느낌이 오는것 같아요!ㅎ
오늘은 올려주신 차이콥형님의 바협으로 인생격정과 무상함을 느끼기 좋은 아침인것 같습니다!ㅎ 즐건 명절되세요!

mini74 2021-09-21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쓸쓸하셨겠어요. 그래도 좋은 음악 들으시면서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09-22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벽공!
오랜만에 보는 시...^^
학교 다닐때 시를 다른 방식으로 감상했었으면 그 좋은 시들을 그렇게 시험지 안에 묻어버리지 않았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