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아는것 없이 시작했다가, 이제서야 평가단이란 감투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해본다고 생각했더니, 벌써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쉽게 될것이다 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운이 좋아 신간평가단 9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예술/대중문화] 분야라는, 사실 어느정도 관련이야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분야에 대해서 말이다. 무척이나 다양한 책들을 만나면서 정말 좋은 책들도 많이 만났고, 평가단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법한 책들도 만났다. 어디든 일장 일단이 있는 것일까, 내게 그런 양끝 지점에 있는 책들을 만나면서, 여러가지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비교적 알고 있다고 생각한 분야에 대해서는 더 심도있는 성찰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새로운 발견을 해볼수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사진철학의 풍경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연히 내겐 가장 좋은 책이었다. 많은 관련이 있진 않지만, 다른 분야에 비해 좀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반가운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정말로 진지하고 진정성 있는 작가의 자세가 좋았다. 문체 등도 읽기 편했음은 물론, 저자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와 애정, 그리고 열정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찍어야 할지는 제쳐두고, 이런 마음이면 '행복한'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도, 글도, 저자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었다.

 그리고 그 외에 기억에 남는, 좋았던 책을 골라보자면, 

 <본격 시사인 만화>  개인적으로는 굽시니스트를 처음 만나게 해준 작품이자, 신간평가단 활동에 처음 받았던 책이다. 촌철살인 같은 풍자와 해학이 돋보였으며, 내가 생각보다 정치에 아는게 없구나 라는 걸 느끼게 해준 책이다. 즐거우면서도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라지만, 일단은 가려운 곳을 제대로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이라는데 의미가 있겠다. 아주 재치있고 센스있는 만화기에 보기 어렵지 않았지만, 나의 정치적 견해가 더 충만했다면 더 많이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아 남았던 책이다.

    

 <옛 그림보면 옛 생각난다> 서양 미술만 주로 봐오고, 한국, 동양 그림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내가 부끄러워 졌던 책이다. 저자의 맛깔스런 해석과 글이 그림에다 풍미를 더해주었다. 서양이 아닌, 동양의 그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만들어준 책이다. 옛 그림에서 현재까지 꿰뚫는 저자의 날카로움과 더불어 사람 그 자체에 대해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솔직히 처음엔 제본스타일도 낯선 데다가, 생소한 분야라서 힘들게 읽다가 중반을 지나면서 제대로 흥미를 붙여가며 읽은 책이다.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해 흥미를 트이게 해준 책이다. 그저 실용적인 설계로 알거나, 혹은 건축, 설치예술은 많이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조금은 알게 된 느낌이다. 그의 열정도 좋았고, 그의 작품도 좋았다.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 이번 평가단을 하면서 동양, 특히 우리나라의 미술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지식을 쌓고 (사실 지식이라기 보단 눈을 뜨게해줬다는게 정확하겠지만) 관심을 갖게 해준 두번째 책이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 또한 선조들의 지혜와 한국건축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해준게 사실이지만, 일단 한국이라는 큰 카테고리로 볼때 이 두책이 가장 컸다) 이런 그림을 그동안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게 더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민화들이었다.

  

 <사유속의 영화> 굉장히 영양가 있고 가치있는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마음껏 읽지 못한 책이다. 읽기도 그렇고, 리뷰도 가장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책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하게 적은 듯한 기분이었다.) 조만간 꼭 시간을 내서 다시한번 진중하게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그러면 생각하고 배울 것들이 많을 것 이란 확신이 든다.

  이 외에도, 각각의 책들이 모두 각각의 가치와 가르침을 주었지만, 규격상 이렇게 남긴다..거의 반의 확률로 희망하던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평가단 활동이 반을 지나고 나서야, 그러니깐 평가단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 '평가단'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태도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과의 만남을 통한 배움 외에도 신간평가단이라는 직책(이라고 하기엔 우습지만)이 내게 주는 가르침과 의미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예술, 문화 분야를 여가활동이나 취미로 대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가까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면에 직업적으로 다른 직업에 종사함에도 매니아 성향을 갖고,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정도만큼 평가할 위치에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사실 중반 정도까지의 나는 그런 애매한 위치,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있는 나의 위치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제로 돌아보면 나는 항상, 완벽하게 전문적이지도 못하면서 그런식으로 느끼고 적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헌데 또 반면에, 몰라서 모르는 대로 적으면, 내가 이렇게 평가해도 괜찮은 책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고보니 정말 어정쩡한 평가들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내가 평가단에서 작성한 리뷰들이 (본의 아니게) 책의 가치들을 절하시키거나, 혹은 지나치게 미화시키진 않았었나도 돌아보게 된다..나의 리뷰가 어떤 역할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분한 많은 것들을 배워간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리뷰 마감을 맞추지 못한 전과가 있는 이유와 더불어, 내 스스로 내린, 평가단에 대한 나의 자격과 자체평가 결과를 고려해본 바 일단 이번 10기 평가단은 신청해보지도 않았지만, 다음번엔 좀 더 내 스스로가 만족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선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때는 좀 더 나은 능력과, 나은 태도로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자리를 빌어, 책의 선정부터, 리뷰 작성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 평가단을 위한 안내사항들을 성실하고 꼼꼼하게 공지하고 알려주었던 담장자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적한 물이 흐르는 강위, 그 위에 둥둥 떠있는 작은 나룻배 한척에 올라탔다. 그 작은 공간에 수많은 타인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어디를 둘러봐도, 누구도 없었다. 인상좋은 사공만이 한가로이 노를 저을 뿐이었다. 강의 한쪽편에 솟은 높고 단단한 절벽을 바라봤다. 높이도 가늠되지 않을만큼 높다란 그것은,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오를 수도 없을 것 같이 생겼다. 군데군데 밟아 올라갈 수 있을 만한 것들이 툭툭 튀어나와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세상 그 무엇이 부딪혀도 저 돌들을 깨뜨리거나 올라 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체념하여 반대편을 바라봤다. 무성한 숲이 있었다. 촘촘한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이 마치 다른 세상과 연결된 균열처럼 보였다. 그 나무들도, 잎들도 끊임없이 살랑거렸다.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흔들렸다. 무슨 나무인지 알아보기는 커녕,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 모든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통과하는 이 작은 배는 때로는 단단한 절벽에 다가서는 것 같더니, 금새 반대편 숲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사공은 술에 취한것 같기도 하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절벽에 부딪힐 것 같은 두려움도, 나무 사이의 균열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도 잊고, 어느샌가 나도 그 리듬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삶은 남의 제스처로는 살아낼 수 없다는 것. 오늘 바로 이 순간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가르침은 바로 이겁니다.  

... 라고,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 강신주는 이야기 한다. '이 책 자체가 완벽하게 강신주가 바라보는 제스처로 시와 철학을 바라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심증으로 의심하기엔 이르다. 그저 다시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그동안 내게 철학은 너무나 먼, 억갑절의 안개 자욱한 산과 같아서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시는 길가에 소담하게 핀, 종종 만날 수 있는 꽃과 같아서 가까이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도 이 책은 온기는 너무 따뜻하고, 또 포근했다.

이성복의 시와 라캉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각인된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을 씻어내기 위해 씨름하며, 곧 수평적 관계로의 나아가려는 시도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서로가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경계를 넘어가고, 극복하려는 사랑이란 것을, 그래서 그 길이 사랑이 나아갈 길임을 인지했다. 타인과의 관계, 그 사이에서 선택한, 혹은 선택받은 사랑을 시작으로, 나는 무수하게 다양한, 삶의 표면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와 세계의 모순과 위험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낡지만, 여전히 유효한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했다. 어떤때는 타인과 '타인의 타인' 즉, 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며, 나에 대해 떨어져보려고 애썼다. 이 차이들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인식해야하는지 생각해보았고, 선택하는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나, 너,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았고, 진정한 자유는 어떤 인식과 행동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았다. 나중의 생각이 먼저 한 생각을 덮어버리지 않게 애써야 했다. 그것이 곧, 세계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었음을 모르고서 말이다.  

글자를 인지하는 시각의 활동은, 뇌로부터 사고(思考)를 시작하게 하고선 이내 그 소임을 다했다. 그 뇌에서 시작된 사고는 곧, 혈관을 타고 심장을 돌며, 감상에 젖게 하고, 온몸의 기관을 돌며 시각으로 점철되어, 상대적으로 미뤄뒀던 나의 모든 감각들의 기억을 다시 찾기위해 애썼다. 발끝으로 내려온 그 모든 감각은, 내가 딛고 있는 이 땅, 그것을 함께 딛고 있는 무수히 많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을 다시 바라보려 했고, 어쩌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또 누군가를 떠올리고, 누군가를 지웠다. 그리고 그 타인과 내가 함께 공존하는 이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지금껏 인식하지 못했던, 인지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내가 이 책, 이 세계에 어디부터 들이밀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느 스포츠 종목처럼 발끝부터 들이밀었는지, 가슴부터 들이밀었는지, 머리부터 들이밀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디부터 나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때때로 머리가 이끄는 대로 향했고, 때로는 그저 발이 이끄는 쪽으로 향했다. 때로는 가슴이 뛰는 곳으로 향했다. 때로는 그것들이 불협화음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도 했고, 종종 그것들이 한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자의든 타의든 삶의 어느 순간 내 머리 위에 우뚝 서있던 철학과 시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들에게서 나는, 열매가 떨어지길 기다린 적이 없었다. 그 열매가 얼마나 탐스럽게 열려있는지 알면서도, 그것이 언제 내게 떨어질 것을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고 지나쳤다. 기다리려 해본적도 없거니와, 그 나무에 기어오르려 했던 적도 없다. 그것이 기억에라도 남아있었다면, 막 떨어진 열매라도 만날 수 있었으련만, 나는 그것을 너무 일찌감치 기억에서 지우고, 포기하고 사회와 자본이 부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내게 기다리고 인내하고, 성찰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며 쉴틈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속으로 나를 밀어버렸다. 실은, 그 움직임 또한 나를 등떠민 힘에 의해서였는지, 내 발이 먼저 움직였던 것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다.

강신주는 그런 나를 끄집어 내서, 잠시나마 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그러나 안에서는 눈물겹고 위험천만한 소용돌이가 휘몰아 칠지도 모를 강 한복판, 작은 배 위에 나를 앉혀준 것이다. 때로는 단단한 절벽의 모습을 한 철학에도 가까이 가보고, 때로는 바람이 굽이굽이 떠도는 시의 숲으로. 내가 배의 구불구불한 움직임에 맞춰 철학과 시를 잠깐씩 만나며 춤추기 시작하자, 어느새 배 위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내가 이 배를 저어가야 할지, 뛰어들어 수영을 시작해야 할지, 절벽을 타야할지, 숲으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집중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깊이의 비밀은,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있는 감수성이라고 말한 그는, 김수영의 시 '달나라의 장난'을 이야기 하며, 서럽지만 스스로 돌면서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는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서럽지만,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잃어버린 내 길도,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바깥으로 향해서, 세계로 들어가고 타인으로 들어가고, 또 타인으로.. 그렇게 '타인의 타인'까지 만나고 오면 그것이 곧, 자신을 거쳐나오는 것이라고 그가 말하고 있는것 같았다. 

삶은 남의 제스처로 살아낼 수 없다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가리킨 방향과 또 다른, 내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서 나는 그의 가르침을 흠씬 뒤집어 쓴 셈이다. 그가 시인과 철학자를 빌렸듯이, 나도 잠깐 그를 빌렸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나쁜 나는 금새 다시 여기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나아가고, 혹 또 돌아올 것이다. 그러다보면 또 어느새 그가 말한 많은 시인들과 철학자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나아간 만큼 돌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거짓말처럼 언제라도 내 바로 뒤에서 나를 반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등떠밀 것이다. 내 길을, 내 방향대로 가라고. 다시금 앞으로 향할때마다 분명, 타인을 향해, 세계를 향해 한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책을 덮고, 적잖은 시간이 흐른 후 불현듯, 집중에 이르는 길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했던 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시인들의 시를 읽고, 철학자의 말을 듣고, 그것을 한데 엮은 강신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하고 있는 나이기에, 나는 나의 내면으로 들어갔던것으로 착각했다. 사랑을 이야기 하고, 차이를 이야기 하고, 타인을 이야기 하고, 사회를 이야기하고, 감각을 이야기 하고, 자유를 이야기 했던, 그것들은 모두 나의 내면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타인의 타인'인 나 또한 세계를 향한 길목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것들중 하나였던 것이다.

강신주는 철학이,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 삶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채워야만 하는 빈 그릇이자, 미래에 읽힐 숙명을 타고난 글이라고 말 한다. 고도가 높을수록, 즉 높은 곳일 수록 산소는 희박하다. 그래서 삶의 높은 곳에서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은 더디고,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 읽힌다는 숙명이 결국은, 지금이 아닌 앞으로를 움직이 듯, 시와 철학은 앞으로의 삶, 나아가 앞으로의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작지만 큰 힘을 가진, 어쩌면 가장 맑고 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시와 철학 사이에서 길을 좇던 강신주의 글을 통해 나는, 세계와 타인, 나 사이에 놓인 험준한 길들을 더듬어본다. 죽음이 삶을 인식하게 하듯, 벽을 밀어내는 힘이 곧 나를 일정하게 밀어내듯, 상대적인 것이 그 반대편의 본질을 깨닫게 하듯, 세계를 향해 뛰어드는 것은 곧 나를 향해 뛰어드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베르테르의 사랑으로는 결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열 수 없다는 뜻을 넌지시 밝힌 그의 말처럼, 시인과 철학자를 멘토로 삼고 따라하려 하거나, 시를 외우거나 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의 말처럼, 그는 어쩌면 이 책 또한 흘려버리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눈 쌓인 길 위에, 철학자와 시인이 앞서 걸어간 발자취 사이를, 우리는 일정하게 따라나설 것이 분명하다. (저자인 강신주 또한 이토록 많은 시인과 시집, 철학자와 철학서를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언젠가, 우리가 준비되어 있든 아니든, 눈보라가 그들의 자욱을 지울 것이고, 우리는 덩그러니 남겨질 것이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만의 제스처를,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야만 할 것이고, 또 그럴 것이다. 어쩌면 그 길은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 사이의 길인 동시에,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에 대한 경계를 관통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국은, 그 길위에 꽃 한송이 필 지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1-11-0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과 내가 공존하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딱 한문장으로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이 요약이 되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기다리는 자 2011-11-07 01:37   좋아요 0 | URL
횡설수설 적어놓은 제가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집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문화에는 항상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대중의 이목과 관심을 끌며 호흥받는 것을 주류, 대중에게 외면받고 특정 층에서만 호흥받는 것을 비주류 라고 한다면, 우리네 삶은 항상 주류와 가까이 가려고 애쓴다. 이 주류란 무엇인가, 길고 지난한 교육과 자본의 산물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미술교육과 좋은 화구들을 통해 그려진 많은 그림들이 우리가 알고있고, 만나려 하는 미술의 모습이다. 이것은 책, 영화, 음악 어느것에도 통용되는 것들이다. 대중은 항상, 우리 대중이 만들지 않은, 소수의 전문가들이 만든 작품들에 열광하고 탐닉한다. 실질적으로 그들보다 더 많은 이들의 대중이 '스스로' 이야기와 작품을 만듦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들은, 앞서말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과 좋은 환경에서 실제로 높은 퀄리티의 작품들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반면에 그런 것들에 길들여진 인식이, 그런 형식의 것들을 높은 퀄리티라고 인지하기 때문은 아닐까? 길가에 핀 꽃 한송이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 산천에 핀 수놓은 꽃들을 더욱 아름답다고 인지하기가 쉽듯이 말이다. 또한, 보통의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작품들과 다르게 소위 배운 이들이 만드는 희소성에도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문학작품과 음악에 한해서는 왜인지 이런 예는 무의미할 것 같기도 하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는 것은 거의 성장과정에서의 본능적인 한 코스와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짓는것과 음악을 만드는 일은 그에 비해선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라서도 말이다. (이것은 표면에서 비롯된 상대성을 이야기한다) 

 어쨌든, 모든 인간이 예술적 기질을 가질수는 있지만, 모든 이들이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하거나, 만들지는 않는다. 또한 많든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역사에 남거나, 어떤 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여지거나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항상 우리의 인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먼, 기성화가, 기성작가, 기성감독, 기성가수 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라고 일컬어 지기도 하는 것들. 미술관에 가서 유명한 한장의 그림에는 온갖 정성과 정신력을 쏟아부음에도, 실제로 많은 이름없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실제로 접하기도 힘들고, 그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비난, 비판의 의도가 없는) 현실이다.  

물론, 대중들이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고 만드는 일이 이제 낯선 일은 아니다. 이 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글, 만화, 영상, 음악 등 많은 분야에서 지금은 인터넷이란 창구를 통해 접하고, 또 생산해간다. 이런 각각의 부분에 두터운 매니아 층이 있음도 사실이다. 사실 소수가 많든 문화에 반하는 문화는 항상 있어왔겠지만, 그 표현의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헌데,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의 존재와는 별개로 그 수많은 것들을 얼마나 대중들이 기억하고 인식하느냐다. 매니아나 인지도가 얼마나 늘어나든, 결국 수많은 대중들을 움직이는 것은 주류 문화니깐 말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민화에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것은 곧, 지금껏 있어왔지만, 그 수만큼 조망받고 인정받지 못했던 숱한 문화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항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대표 미술들이 아닌, 음지 아니, 평지에서 그려지던 자유 분방한 민화를 담는다. 김홍도나 신윤복등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만을 접하기 쉽고, 그보다 더 다빈치나, 고흐,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들만 접하기 쉬운 우리의 미술세계를 벗어나, 마치 액자(틀)를 거부하고, 그 틀 바깥에서 끝없는 자유와 불규칙을 즐겼을 민화들을 말이다. 

집안의 재정 상태와 신분, 환경, 그에 따른 정형화되고 집단적인 교육은 의도하든 아니든 어떤 틀을 만들었을 것이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묘사나, 비율과 배치, 혹은 원근법이나 투시법 등 방법적인 접근부터, 좋은 작품의 기준이라는 것 까지, 그들이 정한 틀 안에서 그것들의 수준이 결정되기도 했을 것이다. 굳이 이 틀을 나쁜것이라 부를 필요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분명, 좋은 교육이나 환경은, 그만큼의 학습을 거두지 않고서는 따라할 수 없는 예술적 경지에 다다랐다. 하지만 문관이 있으면 무관이 있듯, 유무형의 틀 밖에서 그려졌던 많은 그림들도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 서양에서는 환경과 상관없이 비교적 다양한 화가들이 알려진 반면에, 실제로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우리화가 들은 그 수가 손꼽을 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민화는 그 특성상 작가를 알기가 거의 어려워 보인다. 이 책 또한 화가가 아닌 그림을 다룬다) 

틀 바깥, 그러니깐 좋은 교육과 환경에서 그려지지 않은, 그림들 '민화'의 가장 큰 특징을 작가는 '자유로움'으로 꼽는다. 신분에 의해 사상과 활동의 제약이 많이 따랐을 화가, 혹은 사대부 들과 다르게 먹고사는 보편적인 모습을 제외하면, 그들은 어떤 사상과 활동의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거리를 그리지 않았다고 해서 귀향을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방안에서 주경야독 해야만 하는 이들과 다르게 일상에서 항상 자연과 부대끼며, 상대적으로 제약이 없었을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처음 책을 펼치자 마자, 민화가 보여주는,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생소한 그림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상상력은 가히 '충격'으로 느껴졌다. 수많은 시간이 지난 민화가 대담함은 물론이거니와, 이토록 놀라운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풍속화', '수묵화' 등을 우리 옛 조상들의 상징과 같이 생각해온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무지와 무관심이 참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될 정도로 말이다.  

자연을 담은 민화들은, 그 형태와 배치, 비율등이 기존의 통념을 벗어난다. 보이는 그대로, 혹은 '보여져야 할' 그대로의 모습을 벗어나,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과, 상상한것, 혹은 그렇게 그려보고 싶은 것에 대해 거침없는 그림들을 표현해낸다. 문자도와 같은 경우는, 그 형태와 상상력또한 놀랍거니와, 실제로도 주술적 성향을 띄었다고 하니, 마치 이우혁의 '치우천왕기'에서 문자를 하나의 주술적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 절로 떠올랐다. 까치호랑이 그림은, 두려움의 대상을 풍자와 해학으로 극복하는 민중들의 의식또한 엿볼 수 있었다. 용에 관한 그림은 신화 혹은, 유행과 연결되있는 모습들도 보여준다. 

여러 민화들을 만나는 동안,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백성들의 삶과 애환, 나아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어떤 미신과 신앙을 더듬어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배층이 그린 그림들과의 비교를 통해 민화가 어떻게 틀에서 벗어나 있는지 더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길상과 벽사를 위한 것임이 아닌 풍자와 해학을 위한 목적까지 엿봄으로써 고통받는 민초들이 삶을 견디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도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상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림, 한편 한편의 민화를 통해, 가늠할 수 없는 가치를 알아보고, 그 시대의 문화의 흐름, (즉 사상이나 문화, 도구의 유입) 뿐만 아니라 생활의 변화에 따른 (극단적으론 전쟁과 같은) 인식과 관심사, 그리고 그에 따른 작품의 변화 또한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민화에 대해서 우리나라보다 실제로 해외에서 더 알아보는 가치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말이다. 이런 민화들이 적잖이 해외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아쉬움이자, 아픔이기도 했다.

 

<닭과 모란>, <신구도> 에서 보여주는, 그간의 인식을 깨버리는 대담하교 자유로운 표현과 상상력에서부터 시작하여, 불로장생/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십장생도>같은 그림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여정은, 민화에 대한 작가의 애착, 나아가 민화에서 뻗어나간 이런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대범함이 존재하고 또 인정받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염원을 이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작게는 민화의 생명이 꺼지지 않고 우리 후손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과, 크게는 이런, 자유로운 정신이 끊임없이 우리의 세계의 곳곳에 또 존재하기를 바라는 염원 이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기억속의 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색이란 것은 적어도, 아니 정말로 우리 일상과는 때어놓을 수 없는 요소가 아닐까. 불을 끄고 컴컴한 곳에 있다면 오로지 형태만을 감지하겠지만, 자연빛이든 인공빛이든 그 아래에 있는 한, 우리는 늘 매일같이, 아니 어쩌면 항상 색을 만나고, 색과 함께한다. 하다못해 우리의 머릿결, 눈동자, 우리의 살갗에도 '색'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깐 말이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항상 우리와 만나는 것이기 때문인지, 혹은 항상 어떤 일정한 형태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인지, 색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워서 그것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 옷을 고르거나, 무언가를 살때도 색은 분명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지해왔기 때문이다. 색이 갖는 어떤 일정한 상징에 대해 개괄적으로, 어렴풋하게 알고있는 것 이상으로 색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항상 색을 선택하고, 색에 감탄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던 수많은 색들을 생각하며.. 

기억에서 색의 문제에 대해 편파적이 되는 것은 비교적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 88 

하지만 이런 내 기대와 다르게 이 책은 색에 대한 개괄서는 아니다. 이 책을 고르려는 이들은, 이 책의 제목 <우리 기억 속의 색> 에 조금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색에 관한 개론이나 연구서보다는 기억속의 색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란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저자인 미셸 파스투로의 기억을 중심으로 색을 더듬어가는 '에세이'다. 다만, 우리네 삶의 요소요소들을 따뜻하게 다뤄보는 여타의 에세이들과는 조금 다른, '색'에 관한 에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에세이와 같이 쉽게 읽히지만, (저자의 직업과 관련한) 역사적, 과학적으로 접근한 색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니 어떤 치밀한 분석적 방법으로의 색의 접근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색에 관한 연구보다, '기억 속의 색' 그러니깐, 사람과 색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다룬다. 

이런 형식 때문일까, 처음에는 예상과 달라 다소 당황했다. 색에 관한 어떤.. 과학적인 접근만을 예상해온 내게, 미셸 파스투로는 너무 쉽게 색에 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 혹은 누군가의 기억속의 색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솔직히 고백하고 인정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색에 관련한 자신의 강렬한 경험을 토대로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이야기는, 온화하고, 때로는 세심하다. 또 틈틈히 깊이있고, 무엇보다도 개인적 인식이 만나는 색과 더불어, 충분히 역사적,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개인이 만나게 되는 색에 대한 경험, 기쁨, 두려움, 미신, 그리고 그 개인 주변의 인물들의 색에 대한 선입견이 끼치는 영향, 시대의 변화와 색에 대한 인식의 변화, 나아가 사회가 생산하는 색에 대한 정의, 개념의 변화, 적용, 대륙별 색에 대한 접근 태도.. 그리고 색에 대한 선택에 관한 문제를 다각도로 풀어나간다. 그것도 아주 꽤 잘 읽히게끔 풀어나간다.  

단어는 색에 무한한 힘을 행사한다. 색과 관련된 단어들은 그 색에 특별한 색조를 부여하며, 그 색을 학문이나 산업 분야의 색견본들보다 훨씬 더 몽환적인 색으로 만든다. 우리들 각자도 시인의 상상력과 화가의 감수성을 결합해 새로운 색을 창조할 수 있다. - 294

그래서 오히려 전문적인 지식이나 분석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분명 저자인 미셸 파스투로가 오랫동안 연구해온 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정리된 개념이라고 하긴 힘들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녀의 이야기 속에 색에 관한 개인적, 사회적, 과학적, 역사적 담론이 충분히 녹아있다. 에세이 형식속에 녹아든 전문적 지식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어 실제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다만, 이런 쉽게 읽히는 내용이기에 전문적 지식도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 조금은 주의할 점이랄까. 

책날개에 적힌 아래 글이 이것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기에 적어본다. 

미셸 파스투로가 60여 년을 사는 동안 보아온 색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때로는 세심하게, 때로는 몽상적으로, 그러나 언제나 주의 깊게 증언한다. 그는 인간들의 '색에 관한 변덕'을, 색들에 관한 선호를, 시대와 나라, 개인에 따른 색에 관한 미신을, 색들에 관한 기피를 이야기 한다. 어린시절의 느낌들, 소소한 즐거움, 색에 대해 느낀 반감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늘 경쾌하고 정확하게 색의 복잡한 유희들을 해독해내며 결코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의 책 덕분에 우리는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색을 생각하게 된다. (라 캥젠 리테레르) 

생각해보니 색에 대한 굉장히 종합적인 접근을 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특히 어째서 우리가 선호하거나 꺼려하는 색이, 시대별, 지역별로 다른지, 색에 관해서 우리의 시각이 우선하는지 혹은 의식과 정의가 우선하는지 등등.. 워낙 종합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했고, 또 그것이 전문적이 지식이라 길게 풀어놓기는 그렇지만, 확실히, 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쉽게 접한 기분이 든다. 아마 진짜로 내가 색에 관한 개론서를 접했다면 머리터지게 책을 읽어야만 했을 것이다. 다만 이야기 했듯이, 전문적인 접근(사실 과학적이라고 하기보단 용어적, 언어적으로 전문적이었던 적이 있다)을 너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천천히 기억속의, 일상속의 색을 음미하며 읽다보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리라 생각한다. (단, 색에 대한 선호도와 기준또한 개인, 국가마다 차이는 있는지라 우리나라의 실정과는 조금 다른 부분들도 더러 있다. 우리나란 최근까지도 약국에서 여전히 녹색 십자가를 쓴다던가, 하는 것들?)

어쨌든, 부담스럽지 않게, 색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의하고 생각하는, 그저 심미적, 상징적 색의 의미를 넘어, 몽환적인 동시에 정교한 색의 세계를.  

나에게 색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 (......) 우주의 진정한 주민이다. 선은 지나가기만, 화폭을 가로질러 이동하기만 할 뿐이다. 선은 그저 통과만 할 뿐이다. - 177 (이브 클랭의 말 인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을 쫓는 아이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워낙 게으르고 중심이 없는 편이라, 한 작가(모든 문화 예술분야의 창작자를 총칭)의 작품을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다. 어느 카테고리를 구분해놓고 '최고의 작가' 혹은 '평생 기억할 작가' 를 정해버려도, '이 작가의 작품은 모두 봐버리고 말거야!' 라는 다짐에서 멈추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실천으로 옮기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 것이다. 굳이 이유를 따져보자면,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거 아냐? 라고 말하면 뭐라 대꾸할 말은 없다만) 줏대없는 성격과 팔랑거리는 귀가 한몫 할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폭넓게 접하기엔 좋은 습관이었지만) 그럼에도, 걔중에, 어물쩡 거리며 어쩌다보니, 한 애니메이션 감독의 작품을 90% 이상 봐버린 경우가 있다. (라디오 드라마, 뮤직비디오,.. 더불어 책도빼면 좀 뺄게 많긴 한데..뭐 대충 이렇다)

 

바로, 신카이 마코토



어쩌다가 그의 작품 <별의 목소리>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길로 그가 만드는 빛의 향연, 색채의 마술(샤갈님 죄송;)에 푹 빠져버렸다. 어디 그것뿐이었는가, '별의 목소리'는 단편임에도, 거대한 세계관을 갖고, 또 단편답게 과감하게 많은 것들을 생략했다. 3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SF와 로맨스 장르를 아주 적절히 뒤섞음으로써, 생략된 것들이 만드는 구멍을 메운다. 어디 그뿐인가, 소년/소녀의 성장과 더불어, 타인과 맺는 관계, 외로움에 대한 고찰이 스토리 속에, 시적인 대사들 속에 녹아내린다. 게다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단은, '별의 목소리'부터 함께 작업한 텐몬이 만들어내는 음악 또한 작품의 적재적소에 투입된다. 또한 일본 작품들 특유의 일상의 발견들까지 합쳐지니, 가히 감탄스러울 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가장 돋보이게 했던, 그가 뽐낼수 있는 여러 빛과 그에 따른 색의 묘사는 그의 작품 어디에서건 찾아볼 수 있지만, 항상 일정한 퀄리티와 정성을 보여주며 모든이를 감동으로 밀어넣었다. (약간은 어색한 캐릭터 디자인도 좋다. 나는 인디음악인이 방송에 나오게 되는 것을 보며 올드팬들이 아쉬워하는 것들을 보곤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별을 쫓는 아이'를 보며 이해하겠더라)

 

만약 이런 퀄리티가 상업애니메이션에서 나온다면, 그저 걸작 애니메이션으로 기억되겠지만, 이것은 한 개인이 만든 애니메이션 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1인 애니메이션'(실제로 음악이나 성우들은 따로 있지만 제작에 있어서는 혼자다) 제작에 몰입하면서 내놓은 작품이 바로 '별의 목소리'인 것이다. 마치 홀로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을 몽땅 연주하는 것 같은 기적적인 능숙함을 보여준 신카이 마코토라는 존재는 거의 신격화되며,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롤모델이 되었으며,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빛과 색의 향연, 나아가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헛되지 않게 하는 감수성에 여린 스토리와 대사는 그의 매니아들을 양산시키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별의 목소리를 본 것이야, 이미 DVD 로 제작되어 나온 후의 일이라 극장에서 보진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가 구입한 첫 DVD 타이틀 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시청각 자료로 봤음에도, 구매를 결정한 것을 보면 그때 정말 푹 빠져있었던 것 같다. 학생 신분에 30분 DVD 를 이만원 가량의 가격을 주고 사는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어쨌든, 그후로 짧은 러닝 타임의 이점과, 눈을 돌릴 수 없는 영상미, 감수성을 울리는 주옥같은 대사,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들을 보기 위해 가끔씩 그것을 틀어보곤 했다. 뭐 대충 그런 와중에 군대를 간것 같다.

 

물론 별의 목소리에 같이 수록되어있던, 그 전작 '그와 그녀의 고양이' 또한 매우 잘 만들어진 수작이다. 5분 가량되는 러닝타임에, 실연당한 여인의 아픔과 그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고양이의 모습을 매우 감성적으로 그려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쥐뿔도 몰랐기 때문에 좋다는 생각이상으로는 안했던 것 같지만, 지금 다시 본다면... 그러고보니 이제 조금은 와닿는 작품이 되어있을 것 같다. (글 쓰고 봐야지)

 

어쨌든, 그 이후에 개봉한 <초속 5센티미터> 도 꽤 괜찮았다. 하지만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는 그저 그랬다. 헌데 <별의 목소리> 부터 어차피 다 컴퓨터로 시청했는데, 왜인지 점점 초기작들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이번에 개봉한 <별을 쫓는 아이>를 보게 된다.

 

아 이 애니메이션도 참, 할말이 많다...

 

들어가기에 앞서, 솔직히 캐릭터와 빛&색은 차라리 전작들이 더 나았던 것 같다. 지브리의 그것들이 떠오르는, 조금 둥글둥글 해진 캐릭터 디자인서부터, '샤쿠나 비마나' 등... 빛&색감또한 전작들의 화사하고, 아련하고, 밀도있던 것들이 고의적으로 배제된 것 아닌가 할 정도였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빛&색감 퀄리티는 여전하지만, 또 무척이나 아름다운 장면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것들이 튀지 않고 캐릭터 앞에 서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눌러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는 것. 아무래도 좀 더 빛과 색의 묘사를 밝고 눈부시게 하며, 캐릭터들을 조금 날카롭게 그려대던 스타일이 개인적으로 더 맘에 드는 것 같다. 확실히 지브리의 느낌을 받은 관객들이 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지브리와 다른 점들 또한 뚜렷하다. 결국 다시 생각해보면, 감독 특유의 성질들이 좀 배제되긴 했지만, 결국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였다. 그가 이 작품에서 변화를 시도한 것인지, 실험을 한것인진 모르겠지만, 인물간의 감정선을 애틋하게 묘사할 줄 아는 그 특유의 감수성과 연출력, 그리고 환상적인 빛의 조절과 색감은 어디 사라지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은 덜어냈다고는 하나, 영상만으로도 봐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진중하게 바라보면.. 이런저런 아쉬운 부분을 상쇄시킬만한 이야기가 존재하니깐. 신카이 마코토 & 텐몬 콤비 또한 건재하다.




줄거리  

소녀 아스나는 아버지의 유품인 광석 라디오를 통해 우연히 듣게 된 신비한 음악에 매료된다. 다시 그 음악을 듣기 위해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향하던 길에 이 세상에는 없는 괴물에게 습격을 받게 되고, 슌이라는 소년이 나타나 아스나를 구해준다. 아가르타라는 먼 곳에서 왔다는 슌에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갖게 된 아스나 이튿날 다시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다시 가지만 슌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망감으로 슬퍼하던 아스나는 신임 교사 모리사키로부터 지하세계의 신화에 대해 듣게 되고 그것이 슌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한다. 슌과 꼭 닮은 신과 그를 쫓는 비밀 조직 아크엔젤의 추격 전에 휘말리게 된 아스나는 지하세계로 가는 문 앞까지 이끌려오게 되고 아크엔젤의 요원이 바로 신임교사 모리사키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소년 신은 아스나를 뒤로 하고 지하세계로 자취를 감추고 아스나는 모리사키에게 아가르타로의 모험에 동참하겠다고 말하는데!!…   


 


감상

슌과 아스나가 괴물에게 습격받는 것을 계기로, 아크엔젤 소속의 모리사키는 계획적으로 임시 교사로 아스나의 학교에 잠입한다. 모리사키는 수업시간에 의도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려는 시도를 담은 여러 신화들을 이야기하며 아가르타의 이야기를 흘린다. 여기서 이 만화의 기본 모토가 설명된다. 몇 가지 신화들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저승의 신 하데스를 하프 솜씨로 설득해서 아내를 데려오려 했던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것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실제로 아가르타는, 스리랑카의 지하성도 아가르타 전설(아틀란티스와 비슷한 맥락의)로 존재하는 듯 보이는데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여기서는 그런 신화를 조금 바꾸어, '별이 뜨지 않는 지구' 로서의 지하세계를 일컫는다. 이하, 만화의 설정으로 계속 이야기 하자면, 모리사키는 이 아가르타 내의 '피니시 테라' 라는 곳에 이르면, 그 어떤 소원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죽은 자(아내)를 다시 소생시키려 한다. 사실 모리사키는 자신의 아내를 살릴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아가르타로 통하는 크라비스의 존재를 유일하게 알고, 쫓는 아크엔젤에 몸담고 있으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아가르타 전설에 대해 정확히 찾아보진 못했지만, 오르페우스 신화와 아가르타의 전설이 합쳐진 듯 보인다.) 그 아가르타의 문이 열리면서 이 <별을 쫓는 아이>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주목할 것은, 초기작 '별의 목소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아가르타' 의 의미가 사실 일맥상통 하는 것이다. '별의 목소리' 에서 '아가르타'는 지구보다 월등히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인으로 설명된다. 지구인들은, 아가르타 혹성에서 발견된 그들의 유적에서 기술을 얻어 문명의 진일보를 기록하지만, 그 기술은 곧 우주 함대와 로봇병기를 만드는 등 거의 아가르타 성인들을 뒤쫓기 위한 혹은 인간들끼리의 전쟁을 위한 '무기'로써 제작된다. 그리고 이윽고, 워프 항법을 이용하여 아가르타 성인들의 흔적을 뒤쫓다, 만나게 되자 당연하다는 듯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사실상 인류에게 아주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했던 아가르타 성인과의 싸움이지만, <별의 목소리>에서는 그런 것이 진지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노보루(남주인공)와 미카코(여주인공) 의 애틋한 감정선과 서로의 부재속에서 성장하는 드라마가 전면에 드러날 뿐이다. 하지만, 여기 <별을 쫓는 아이> 에서는 그것에 대한 본격적이고 진지한 성찰이 드러난다. 이것은 곧, 인류의 전쟁역사에 대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세계관이 펼쳐지는 부분이라고도 보여진다.

 

인류는, '케찰코아틀'이라는 고대 신에 의해 여러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끝없는 전쟁을 일으키며 살육과 파괴를 반복함으로 인해 결국 '케찰코아틀'이나 선인들마저 지하(아가르타)로 내쫓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아가르타인이 지구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별의 목소리>는 <별을 쫓는 아이>보다 한참이나 후의 일이지만, 결국 아가르타 라는 전설속 미지의 존재에 의해 문명의 진일보를 이룩하고, 그것으로 인해 또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계속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마치 모든것을 다 가지기라도 할 것 처럼,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지구를 파괴한 인간은, 결국 '생명의 부활'이라는 신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으려는 것이다. (마치 아가르타에게 상실의 아픔마저 보상받으려는 듯) 이보다 큰 주제의식으로 인해 이런 모습들은 크게 부각될만큼 언급되진 않지만, 충분히 그 비판성을 드러낸다. 아가르타든, 케찰코아틀이든, 문명의 발달을 오로지 폭력과 전쟁을 위한 것으로, 혹은 폭력과 전쟁을 위한 문명의 발달을 이룩한, 나아가 이제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려 하는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주제는 아니라 보여진다. '아가르타', <별의 목소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인류문명에 대한 판타지, 문명의 발전이 야기한, 혹은 폭력과 잔학함으로 인해 발달된 문명에 대한 성찰은 나아가, 조금 다른, 제멋대로 파괴하고 소멸에 이르게 함과 동시에 탄생까지 손을 뻗으려 하는 인간의 끝없는, 부질없는 욕심이란 맥락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어쩌면 모리사키는 그런 인간의 대표인지도 모른다.

 

모리사키는, 아스나와 함께 별이 하나도 없는 아가르타의 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없기 때문에 더 외롭게 느껴진다며 (혹은;; 별 하나 없는 하늘의 모습이 인간의 외로움 같다고) 인간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 한다. 대중적인 연예인들을 스타라고 표현하고, 옛 이야기에서 별이 지는 것을 보고 먼곳에 있는 사람의 운명을 짐작했듯, 별은 종종 사람을 상징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으레 말하는 스타처럼) 별은 바라볼 수만 있을 뿐 가 닿을 수 없다. 이미 저물어버린 관계나 실제로 혹은 기억속에서 소멸된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별이 없는 하늘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그리워하고 기억할 사람조차 없는 것이 외려 더 쓸쓸한 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그(모리사키)는, 그리워 할 수 있는 누군가(아내)가 있었기에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으레 '어른'이라고 부를 만한 나이가 된 이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게, 아픔의 형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것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모리사키는 실제로, (<그와 그녀의 고양이>에 등장하는 인물도 중년은 아니니깐) 신카이 마코토 작품에서 뚜렷하게 등장하지 않은 중년의 인물이다. 15년 동안 아내를 잃은 슬픔을 어딘가로 흘려보내지 못한 채, 안에서 계속해서 고여놓았던 모리사키는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으로는 (신화의)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자신의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아이같은 감성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상실의 아픔을 온전하게 이겨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떤 어른들의 모습을 대변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아픔을 견뎌내고, 나아가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을지 찾지 못한 어른(모리사키)와는 다르게 아스나는 차곡차곡 상실과 이별이 주는 감정을, 그 아픔들을 견뎌내고 이겨내는 과정을 배워간다.

 

모리사키처럼 분명한 목적은 아니지만, 아스나 또한 분명 슌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모호한 희망으로 아가르타에 들어섰었다. (혹은 자신의 아버지가 아가르타 인 이었기에 느끼는 일종의 회귀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스나 또한 모리사키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슌과 닮은 신을, 신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정의 과정속에서 자연스레, 슌과 다른 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지상위에서 자신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고양이(실은 보통 고양이가 아니지만)를 두고 떠나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이별이 주는 강렬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한 존재의 소멸은, 또 곧 다른 형태의 탄생으로 혹은 탄생의 일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고 통곡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릴적에는 몰랐던, 하지만 결국 깨달아야만 하는 가슴 시린 인생의 한 과정을 말이다.

 

결국, 죽은 아내를 되살리겠다는 강한 신념으로 피니시 테라에 도착한 모리사키는, 신들이 타고 있다고 알려진 아가르타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선 '샤쿠나 비마나'와 마주하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아내를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소원을 빈다. 하지만 샤쿠나 비마나(곧 신-GOD)은 영혼을 담을 그릇을 요구하고 광기의 모리사키는 아스나를 그 그릇으로 바치지만, 신은 또 다른 것을 원한다. 마치 (어느 리뷰어의 말처럼) 인간을 조롱하듯이 말이다. 그 어느것을 계속해서 바친다고 해도 신의 요구는 충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의지와 자연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덧없고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었으니깐.. 신이 크라비스(열쇠)를 파괴함으로 인해, 잠시 아스나란 그릇에 담겨있던 모리사키의 아내의 영혼은 이내 다시 사라져버리지만, 모리사키는 잠시나마 아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무엇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샤쿠나 비마나-신(GOD)) 상실에 대해 오롯이 깨닫게 된다. 라틴어로 열쇠를 뜻하는 크라비스의 파괴는, 세계의 법칙을 넘으려는 열쇠는 애초에 존재해서도 안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다는 뜻으로 보여졌다.

 

한 인간은 다른 어떠한 인간도 대신 할 수 없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고유의,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모리사키는 자신의 아내를 잊지 못했을 것이고, 신은 아스나를 아스나로 있게 하기 위해서 크라비스를 부쉈을 것이다. 모리사키가 찾는 아내도, 죽어버린 슌도, 아무도 돌아올 수 없고,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이 또 다른 희망이 된다.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존재와 만나기도 한다는 것 말이다. 잃어버린 어떤 존재가 가지고 간, 나의 한 부분은 마치 어떤 일정한 형태를 띄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형태가 없는 상실감으로, 결국 다른 새로운 존재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채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상실된 존재를 대신해줄 수 없는 존재이기에 또 다른 가치를 지니니깐 말이다. 신이 아스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도, 그런 아스나란 존재가 갖는 고유한 가치를 알게되었기 때문 아닐까.



모리사키가 아내의 상실을 그제서야 마음속에서 흐르게 할 수 있게 되고, 신이 자신의 형인 슌의 상실을 이겨내며 아스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아스나는, 슌의 죽음을 점차 받아들이며, 죽은 아버지의 묘지에서 통곡할 수 밖에 없던 어머니의 감정을, 곧 이별과 사별의 저릿한 아픔을 배워나간다. 이 모든 인물들이 상실을 받아들이고 한뼘 성장하는 모습이야 말로, 신카이 마코토가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 아닐까.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사람을 인정하는, 가슴 아프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인생의 한 단면 말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은, 그래서 더욱 외롭다. 마치 저주처럼 외롭다. 이별을 결국 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모리사키는 이것을 인류의 저주라고 까지도 표현했다.) 엔딩곡 'hello goodbye, hello' 처럼, 인생은 헤어짐의 인사 후에 또 다른 만남의 인사를 한다. 그 어느것도 거스를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 한 사람이 빈 자리는, 결국 다른 이가 다른 모습으로 채운다. 그것이 관계이고 삶이다. 그리고 삶은,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고, 사라져간 자들의 바람이다.

 

<그와 그녀의 고양이>에서의 관계의 단절로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별의 목소리>의 불가항력적인 이별, <초속 5센티미터> 에서 여전한 그리움의 애틋한 감정을 보여주었으며, 이제는 한뼘 성장해 <별을 쫓는 아이>에서는 이별, 사별, 죽음, 곧 모든 상실을 어떻게 삶이 감싸안아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상실은 곧, 도망칠 수 없는 삶의 일부니깐. 모리사키라는 중년인물은 마치 그런 감독 자신의 성장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들은, 별을 쫓으려 달리지 않을 것이다. 때론, 바라보며 눈물짓는다 하더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