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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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은 잘 모르겠고, 자신이 만든걸 그만큼의 돈를 내고 사가라는데, ‘또 하나의 가족’을 자청한다. 아무래도 자기가 나라를 먹여살리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내 가족은 지금으로도 족하다고 하는데 자꾸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정말 제 가족은 백혈병으로 나가 떨어지는데, 괜히 엄한 사람 붙들어 가족이라며 저기 북쪽나라 뺨치게끔 하루에도 몇번씩 세뇌를 해대니 한때는 정말 회색 콘크리트의 그 파랑색이 내 가족인 것 같기도 했던 때가 있었다. 가족도 아닌데 자꾸 가족이라고 부담스럽게 강요하는 그들의 모습이 여기 조폭들의 이야기와 맞물려 생각났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통해 가족이 뭔지, 뭘 얻는지, 뭘 할 수 있는지 그 특유의 해학으로 버무러진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강을 끼고 있는,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 마을에, 쫓겨나거나 혹은 도망쳐오거나 하며 세상의 주류에 섞이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하나의 ‘식구’가 된 이들. 그리고, 조폭이 되겠다며 조직에 들어와서 합숙훈련을 받으며 ‘식구’가 된 이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드라마(가족)에 편승하지 못해서, 버려진 가짜의 드라마(가족)위에 터를 잡기 시작하며 살던 여산의 식구와, 보통의 드라마는 아님에도 그들과 전혀 다른 노선에 놓여져 있는 조폭들이 서로의 가족의 결속을 바탕으로 나뒹굴기 시작했다.

 

각자의 사정과 상처를 갖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모인 여산의 식구들은, 그 자신들이 삶에서 머물 끝자락으로 그곳에서 살아간다. 피 한방울 섞이진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이 할 일을 통해 서로가 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채워가는 일은 아마 그들이 인지와 상관없이 서로의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 터. 더불어 그 사이의 여러 새들과 물고기들의 가족사는 인물들이 채 보여주지 못하는 본래 그래야할,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집단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여들어 애써 만든 가족이란 울타리를 결국 힘과 공포라는 것으로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세계의 모습을 반추하기 위함일지도 모르겟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적(籍)을 두고, 그저 외부의 풍파에서 벗어나 있을 곳을 찾던 이들에 다름 없었겠지만, 조폭과 같은 외세와 싸워가는 과정에서 그들 각자가 서로에게 갖는 의미와 영향을 깨닫게 되면서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찾는게 아닌, 진정 서로에게 필요한 누군가가 되어주고 있었다. 소희가 밭에 가꾼 온갖 식물들과 나누는 교감에서 처럼, 그녀가 대지를 비롯한 모든 식물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인것 마냥 느끼고 소통할 수 있음으로써 그것들을 버리고 갈 수 없는 모습처럼, 결과적으론 식구라는 것도 가족으로 진화하면서 그런 형태를 띄게되는 것 아닐까.

 

학력, 체력, 모든게 모자라는 여산의 가족들이 견고하고 무자비한 조폭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건 똥통, 고춧가루, 벌 등과 같은 자신들이 가진 해학의 힘이 외부에 있었고, 그들 스스로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이 그러려니 하던 ‘사실’에 대해 누군가 ‘진심’으로 외쳐주었기에 가족이라는 집단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내면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것들이 연대할 수 있던 것은 누가 애써 가족이라고 정의내리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 더 강한 질문을 통해서 구성원 스스로가 그것을 진실로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성석제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해학으로 우리에게 이야기 했다.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이제는 달라진 시대에 맞춰나가야 할 공동체라는 운명,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시작(강, 젖줄)을 침해하는 악의 무리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가족을 형성해나가야 하는지. 생명의 시작을 위협하는 것은, 결국 이 생태계의 모든 가족을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깐.

 

강은 전통적으로 사람이 모여살기 시작하는 곳이다. 생명의 근간이 되는 강에 하나둘씩 모여 살다보니 많은 이들이 어느새 혈연이란 틀을 벗어나 자발적으로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강에서는 여산이 고기를 잡고, 땅에서는 소희가 밭을 일구듯 서로의 몫을 채워가며, 마치 영화 <괴물>에서의 가족들 처럼. 그런 강은 여산 가족에게도, 정묵에게도 결국 생명의 젖줄 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라는 것과 별개로 그들 모두가 그 언젠간 그 위협을 공유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자신의 자리가 유신시절의 ‘아버지’와 같은 위치라도 되는 것 마냥 ‘너 잘되라고 하는 것’ 이라며 불도저를 앞세우며 모든 가족의 시작을 위협하고 있는 이 현실에서 말이다. 자연-강은 여전히 강이고, 사람-가족도 여전히 가족인데, 그래야 할진데, 이제 그들의 시작이 위협받고 있다. 시작의 형태가 허물어지는 것은 결국 그들이 살아온 역사가 부정당하는 것은 아닐까.

 

언제고 우리는 어딘가에서 또 가족이란 이름으로 맞서야 할지 모른다. 가족이란, 개인이 스러지지 않게 하는 울타리다. 우리는 개인이 혼자서 성취할 수 없는 일들, 혼자서 버텨낼 수 없는 일들을 가족이란 일들로 이겨내며 살아간다. 사랑으로 이뤄지는 것이 가족이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가는 것이 가족이니, 피는 다르더라도 피 같은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될까.

 

우리는 (힘으로 만들어지는)가짜 피와 (마음으로 만들어지는)진짜 피를 구분해야 한다. 가족이 어떻게 구성원을 버티게끔 하는가. 상대의 무게를 밀어내면서 언젠가는 누군가를 밀어내야하는 모습인가, 등을 기댄채 서로의 무게를 덜어주며 언제까지고 있을 수 있는 모습인가. 서로 마주보고 밀어내고 있던가, 등을 마주대어 기대어 있던가 말이다. 어느쪽이든 서로가 버팀목이 되는 것은 가능하나, 그 본질적인 지향점은 정 반대인 것이다. 근본을 잊지 않는 공동체가 우리를 버티게 한다면, 우리는 어디 앞에서건 당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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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김상봉 지음 / 꾸리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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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기업의 구조나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게 사실이었던 것 같다. 노동자의 파업같은 문제는 그저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불변하는 경영자들의 횡포로 생각은 했었을지라도, 그에 대한 자세한 배경이나 원론적인 문제는 쉬이 찾아보지 않았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법적 테두리는 정치라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실상, 초국가적 기업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일은, 비단 무기산업과 관련된 미국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막대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됬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거대 주식회사 집단 곧 재벌가문의 노예가 되어 있다." (236)

 

내가 다니는, 다닐 회사가 아니라고 아무런 관심도 갖고있지 않은것은 좁게는, 내 친구, 내 가족들이 속해있을 많은 기업의 횡포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은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사회의 비극과 불합리함을 놔두는 것이니 썩은 정치를 두고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어떤 의미의 공공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다." (235)

 

서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을 이야기 하는 이 책은 어쩌면 회의적인 사람에겐 발길을 돌리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근거들을 나열하다 마지막에 결론을 짓는게 아닌, 이미 지어진 결론을 증명하는 과정은 솔직함과 동시에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아마 그간 저자의 준비가 철저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노동자에게 경영권을 돌려줘야 한다" 같은 슬로건에 대해 대부분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에 열이면 열은 사장, 혹은 회장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대답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기업은 대부분 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이들에 의해서 너무도 당연하게 좌우되고 있으니깐 말이다. 매스컴이 그렇게 비추고, 주변인들이 그렇게 바라보기때문에 우리는 아무 의심없이 모든 기업을 개인소유의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소규모 기업이나, 예전의 기업들은 그랬었다. 주식회사란게 생길때까진 말이다. 저자인 김상봉은 순수 개인의 자본과 설립, 운영, 그리고 무한책임으로 이어지는 그런 기업들의 경영권을 노동자의 것으로 빼앗자는 것이 아니다. 본래 주인이 없는 주식회사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자본을 가진 자가 경영을 하는게 아닌 구조의) 형태를 마치 개인의 것처럼 부리고, 부정이득을 취하는 구조가 너무 당연시 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저자가 준비한 논거들을 따라가면, 말미엔 가장 뚜렷한 대안이 제시된다.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대명제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예상되는, 그리고 실제로 있어왔던 수많은 반박들을 다시 반박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또한, 이 대명제를 실제로 이루는 방법이 단순 노동자가 회사를 운영하자는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상 이 책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것은 내 수준에선 불가능하다. 저자가 한권의 책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반발감이나, 상식에 대한 깨부숨의 근거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거기다 단 한번 읽어본 나로서는 이 책의 주장을 괜히 어설프게 열거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앞에 언급한것, 그리고 뒤에 언급하는 이야기들은 최소한 이책의 내용이 실현하기가 용이하진 않은 상황이라도,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란 것을 조금이나마 이야기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글을 읽고 허무맹랑함에 더 무게를 두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이 글이 부족한 탓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고 평가할수는 있겠으나 '불가능하다'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법적인 논리와는 또 다르게 철저하게 경제, 기업, 정치생태를 논리적으로 파헤쳐야 할, 그리고 그랬을 것 같은 이 책의 내용들에 기본 밑바탕이 철학이라는 것에 나는 새삼 놀랐다. 경제학자, 혹은 기업인들이 '경영철학'이라고 함은 단순히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위한 어떤 구호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철학이란 어디에도 빠질 수 없고 빠져서도 안되는, 그리고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때 다시 근본부터 되짚어 볼수 있는 유일무이한 열쇠라는 것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정도면 웬만하게 철학, 혹은 경제분야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충분히 조금만 시간을 들여 읽는다면 십분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것도 이 책의 장점이겠다.(아마 저자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음을 저자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실제적인 방법의 문제보단, 우리의 확고한 인식을 뒤집어야만 하는 문제니깐) 그럼에도 이 책이 철학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철학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것또한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철학은 근본이념으로써 우리가 법이전에 갖춰야할 인식을 설명함에 바탕이 되는 것이지, 방법 그 자체는 철저히 현실적이며 논리적이다.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 단절된 홀로주체들이 아니라 더불어 보다 높은 하나 속에서 결속된 서로주체로서 '우리'라면, 경영자의 경영권 역시 타자로서 노동자에게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보편적 의지와 활동의 표현이며 실현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경영자가 노동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으로서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라면, 노동자들은 경영자 속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경영자는 노동자들과 서로 주체성 속에서 '우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니, 이런 기업이 참된 공동체를 이룰 수는 없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92)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라는 부제는 전혀 틀린말이 아니다. 인간을 이롭게 하기위한 저자의 애정어린 철학의 시선을 바탕으로, 경제학자의 말을 빌리거나, 명료한 법의 해석을 통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은, 소설만을 많이 읽어오던 내가 차마 (소설보다) 쉽다고는 할수없지만, 예상보단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었다. 철학을 파헤치고 법을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갖고있던 기업, 즉 주식회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되짚고, 그것을 우리와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 해외의 사례를 분석하며, 나아가 우리가 철학적인 사고의 부분에서, 그리고 법적인 부분에서 어떻게 해결을 해나가야 할 것임을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은 실제적으로 철학이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철저하게 경제와 사회에 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삼성은 이건희의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가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직 주식회사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이 주식회사를 두고 소유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0)

 

위의 말처럼 명심해야 할 포인트 및 논리전개의 과정은 사실상 간단하다. '법인' , '주식회사'에 대한 정의를 다시 논리적으로 파헤침을 통해서,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주식회사란 것의 근본 성격과,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방치하고 있는 재벌 기업들의 병폐를 인식하며, 나아가 경영자와 노동자가 도구를 부리는 자와 도구 그 자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더 높은 하나를 이룩하기 위해서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방향과, 실질적인 법안을 살펴보는 과정이다.

 

끝으로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라는 법률조항이 현실적으로 제시되어,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짐과는 별개로 나는 모든 이가 사실상 노동자인 세상에서 아래의 문장이야 말로 중요한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몫이요, 철학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세계를 형성해 나갈 자유로운 노동자의 몫일 것이다." (310)

 

 

 

 

 

 

 

 

 

 

 

 

 

(이 리뷰는 제공받은 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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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이 아니다 - 세계사 속 여인들의 당당한 외침
신금자 지음 / 멘토프레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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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병역특혜 문제가 한창 불거졌을때 어지간한 게시판이나 기사 덧글은 항상 남/녀 싸움의 장이었다. 임신과 군병역 문제를 연결지으면서 싸우는 모습들은 측은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여성가족부는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불평등을 해결하거나, 그간 가부장제에서 살아온(그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남자들의 의식을 바꾸기엔 역부족 이었다. 루머인지 진짜인지 이제는 구분도 되지 않는 여러 황당한 정책들은 여성가족부에 대한 남자들의 편견을 심어주기에 너무 좋았었다. (여성가족부는 여성으로만 이뤄진 집단도 아닐텐데 말이다. 또한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면 충분히 도움되는 정책들도 많긴 하더라)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남녀가 서로 같은 파이를 나눠갖는게 아님에도 서로 헐뜯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항상 해법은 윈-윈 은 커녕 루즈-루즈 가 흔하다.

 

이런 얘기를 한 이유는, 남/녀를 편가르게 하는 기득권의 문제를 놓고 벌이는 싸움에서 실질적으로 그 문제에 대한 논의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본질 자체, 차이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종국엔 인격적인 것까지 남녀 이분법으로 구분지어 이야기 하는 것이 일상다반사 였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연관은 되어있지 않더라도 그것은 서로의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됬을 것이리라.

 

물론 거기에 이 책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 평가에서 '악녀'와 같이 부정적 이미지로 평가되거나 부족하게 평가되는 여러 여성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시금 새로운 시각에서 반추해보려는 시각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특별히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직접적으로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 남성들의 시각들로 기술되어 왔던 여성들의 다른 시각을 바라봄으로써 '여성자체'를 이해하는 시도라 생각된다. (다만 내가 느낀것은, 여성뿐만이 아니라 어떤 인물이라도 이렇게 '재조명' 은 필요하단 것일까)

 

과거 여성사의 최고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는 클레오파트라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역사가 기억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 역사적,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 조망하기 시작하며 현대의 마녀처럼 여겨진 오노 요코의 이야기도 있다. 거의 최상층의 여성을 다루는 중반부까지는 국가와 국민위에 있던 실권자로서의 여성들의 삶을, 공개된 차원에서의 역사적 흐름속에서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서, 조금 더 특별히 여성적 시각으로, 남성 역사가들이 간과하기 쉬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특히 출산, 육아 및 왕위 계승관련) 것들을 다시금 조망한다. 역사적 흐름속에서 이해해왔던 인물들을 다시금 새롭게 바라보기에 충분했다. 아예 몰랐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 시대상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유명한 영화, 예술,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다른 시각, 특히 여성이라는 시각에서 조망하는것이 유익하고 흥미로웠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특히 생소했던 중세의 여러 가문이나 왕조들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여성만이 겪어야 했던 필연적인 난관들은 비록 내가 해당 인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해왔지 않음에도, 다시금 그 인물에 대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령 마리 앙투와네트 같은 경우엔, 비단 여성이었기 때문이기보단 그 언행때문에 생겼던 선입견을 다소 전후맥락을 통해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비교적 현대 인물임에도 역설적으로 잘 몰랐던 배우들의 이면에 있는 모습들은 쉽게 흥미롭게 접할 수 있는 현대 여성상의 다른 모습들 이었다. 

 

다만, 여러 역사적 사료와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있지만, 그것들이 배경설명에 그치고 때론 다소 작가 자신의 감상적인 노고치하와 이해가 앞설때도 있었던 점은 아쉽다. 물론 저자 또한 다분히 동의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하기도 하기에, 이것이 특별한 불균형을 초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아쉬운 것은, 차라리 인물을 줄이고 역사적 근거와 분석적 자료들을 제시했더라면 좀 더 풍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은 분명히 페미니즘 적인 지점을 지향함이 틀림없이 보이기 때문에 더욱 더 신중하고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깊게 공부한 적도 없고, 솔직히 아직 잘 모르는 것들이 많다. 감히 말하건데, 내가 어렴풋하게 '궁극적 페미니즘' 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이다. 물론 그것은 책을 읽고 어느정도 시간이 흐룬 후에 떠오른 단상이었고, 그 책은 그것 이상의, 어쩌면 그것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내겐 이 <나는 꽃이 아니다>란 책이, 희대의 여성들에 대한 조망 이상의, 한쪽으로 치우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들에게 다른 시각을 제공해주었다고 보여진다. 사실상, 역사적 인물들에서 남자들의 긍정과 부정은 한 '사람' 으로 평가받는 반면에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늘상 역사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은 (적어도 많이 기록되있는 것은) 남성이었고 그들이 힘과 여성을 탐닉하는 것은 마치 당연한 생리현상처럼 여겨져왔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이 벌여온 여러 부정들은 그저 단순한 비판에 그치고 말았지만, 가냘프고 섬세한 이미지가 각인된 여성들이 벌이는 큰 업적이나 부정은 아직까지도 (남성과) 비교되어 회자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것들의 완전한 균형이 가능할지는 조금 회의적이다. 생리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에서 조금만 뻗어나가도 여러 편견과 색깔 입히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기 시작한지가 오래되지도 않았지만, 사실 아직도(언제까지 일지도 모를) 남녀평등의 과도기적 시기에 이 책은 직접적으로 담론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역사적 여성들을 쭉 훑으면서 이해의 폭을 한단계 진전시킬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담론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재평가로만 그칠 수 있다는 위험을 간과할 순 없을 것 같다. 독자의 역량이 다소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저 재평가로만 인지하지 말고 자발적 결론의 도출이 필요할 것이다. 굳어지고 확고한 결론이 아닌, 열려있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론 말이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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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말해 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 - 양극화.분쟁.종교.민족.환경.질병
박종성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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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를 생각했을때 기억에 남는 것은, 마치 영화와 같은 테러의 공포가 점차, 단순 반복되어진 순간들이다. 즉, 테러에 관한 충격이 연신 티비에서 쏟아져 나와, 충돌장면과 붕괴과정의 반복으로 인해 단순 기계적인 사건처럼 느껴졌단 얘기다. 어쩌면 이것이, 오랜 시간이 지난후에 느끼게 된 감정이라고 할지라도, 아마 그때 분명 실제 사건과 녹화된 화면이 주는 무의미한 반복과의 괴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이라크전은 또  어땠는가. 미국 항공모함에서 촬영한 미사일이 날아가는 모습과, 적외선 카메라에 찍힌, 공습당하고 있는 이라크의 모습은 또래아이들에게, 전쟁의 심각성과 잔인성 보다는 영화나 게임과 같은 모습들에 불과했다. 우리는 미국이 발발시킨 전쟁을, 미국언론을 통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면, 선진국이라 하는 나라들은 모든면에서 무척이나 개방적이고 청렴한줄로만 안다. 물론 그것은 근대화 이후 줄곧 해외의 원조를 받고, 또 그 나라들을 동경하며 자라온 세대들의 피할 수 없는 시각임은 어쩔수 없겠다. 하지만 선진국이라 할지라도 (특히 선진국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언론은 단면만을 바라보기 쉽다. 특히 공신력 있는 매체야 말로, 당연히 정부가 손에 쥐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한두개의 채널, 한두개의 신문이 그 시대를 읽는 창의 거의 전부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세계적인 문제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보여져 왔다. 보여진 것들은 이미 해당국가가 선별해서 방송하고, 또 그것을 국내 방송사가 또 선별해서 가져온 것들이었으니깐 말이다. 일례로, 이라크전을 본다고 해도, 우리는 대부분 미국이나 영국 등 소위 강대국이란 곳에서 촬영한 영상을 접하기 쉽지, 이라크나 주변 국가들의 반응이나 담론을 접하기가 쉽지 않듯 말이다. 세계는 항상 시시각각 다른 사건들을 발생시킨다. 항상 새로운 것에 반응해야 하는 언론은 한가지 담론과 관심을 계속해서 끌고갈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또한 이미 역사가 수차례 증명했듯, 대부분의 언론들이 항상 권력에 무릅 꿇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강자가 만들어낸, 강자가 통제하는 언론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봐 왔다.

 

국내 얘기를 하자면, 소위 조중동이라는 거대 언론사와 한겨례 경향의 대립정도로 생각되어왔던 언론사는 인터넷 매체의 발달로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 초창기 거대 언론사의 권력에 대한 방편으로, 그리고 촛불문화제에 대한 중계로 그 입지를 굳혔던 몇몇 인터넷 (진보)언론사들의 등장과 더불어 또 그에 맞서는 (보수) 언론사들이 등장했고, 이제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해외파 SNS의 보급으로 인해 다시 또 새 흐름을 맞았다. (그리고 그 규제로 인한 새 흐름 또한 맞고 있는게 사실이다) 앞서 국외의 언론들을 통해 이야기 했듯, 이것들 또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보도하기엔 한계가 있다. 사실상 어지간한 큰 사건들이 아니면 지속적으로 다루기 힘들다. 언론 또한 구독자, 광고와 완전히 무관할 순 없으니 말이다. 여러 사회현상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수동적인 대다수의 사람들까지 포용해야 하는 것이 언론이다. 책이나 다큐멘터리 처럼 그것들을 집중적으로 희망하고, 그래서 능동적으로 그것들을 접하는 사람들은 항상 다수가 되지 못해왔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 및 시사프로그램을 본다. 그중에 방영시간을 애써 맞추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그리고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책이야 말로 진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닐까 싶다.

 

[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 은, 그것들의 총 합이다. 하루 이틀, 혹은 한두달의 현상들의 진실 찾기가 아닌, 웬만한 성인이라면 소싯적부터 꾸준히 접해왔던, 혹은 범국가적 문제들에 대한 진실찾기 개괄서이다. 책 표지에서 보이듯 양극화, 분쟁, 종교, 민족, 환경, 질병 등의 카테고리로 나눠져있다. 총 6개의 챕터로 나눠진 이 책의 중후반부는 거의 카테고리 분류에서 볼 수 있듯, 거의 제3세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의 진실 찾기다. 현재 월가 시위를 비롯한 양극화, 반세계화의 시작에서, 각 나라들의 가난과 분쟁이 강대국 및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 및 이권의 개입과 관련없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해준다. 티베트나 코소보 사태, 중동 지역의 독립, 민족, 종교 등에 관한, 보통 사람들이 어느정도 표면적으로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은 그 근원을 살펴 봄으로써 그것이 그들의 문제이면서, 또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 내게 많은 시사점을 준 것은 소말리아 해적에 관한 문제였다. 얼마전 우리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준 부분이기에 특히 관심이 갔었는데, 실상 알게된 진실은 다분히 충격적이면서도, 앞 부분에서 얻은 강대국과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모습으로 인해 또 어느정도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행한 구출작전으로 말미암아, 소말리아 인근 해상의 위협과, 그것을 대비하는 여러 국가들의 모습은 알게되었음에도 정작, 몰랐던 '그들이 왜 그렇게 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해준 그 파트는 인상깊게 남아있다. 물론 그들의 행동을 옹호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이 부분을 읽은 순간부터 이전과는 조금 넓은 시각으로 그때의 사건을 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이 책은 사실 굉장히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음에도, 서문에서 나와있듯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한다. 그것은 어떤 눈치보기식이 아니라, 언론이 말해주는 것에서 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것으로 시선을 이동함에 있어 편향된 사고를 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리라. 그래서 이 책이 주는 전반적인 목적이 소위 '강대국과 다국적기업 까기' 가 아니라, 우리가 '그 국가', '그 민족', '그 종교' 만의 문제라고만 치부하던 것들이 사실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서 적잖은 국가와 기업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은 후에, 어떤 문제는 그 자체의 문제보단 그 주변의 영향으로 인해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음을 알게되고, 어떤 문제는 그 자체의 문제가 다른 주변의 영향을 끌어들여 심각해진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목적이 한 극단의 시선에서 한 극단의 시선으로의 이동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판단을 세우기 위해선 분명 더 많은 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리라.

 

세계화는 결국 국가간의 이권으로 연결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힘을 쥐고 있는 나라들의 언론을 통해 접하는 세계의 모습들또한 우리의 편향된 시각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왜곡된 국내 기사를 보는 것과, 해외에서 왜곡되거나 혹은 들어와서 다시 왜곡된 기사들을 보는 것의 차이는 결국 개념은 비슷하니깐.

 

다만, 지금과 같이 여러 언론이 발달하고 새로운 시각들을 쉽게 접할수 있는 현실에서 보기엔 완벽히 새로운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더 큰 문제는 결국은 힘에 의한 논리라는 것에 대한 자포자기식 매너리즘이 더 문제일 수도 있겠다) 많은 이야기들을 담기위해 각 이야기들의 분량이 적은 것도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같은 심층적인 책보다는 세계적인 여러 사건들의 이면에 대한 개괄서임은 확실히 해야할 것 같다. 한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보다는, 보다 많은 사건들의 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혹은 아직 다른 분야는 잘 모르는 이들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짧은 시간에 세계의 개괄적인 문제점들에 대해서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분량이 적다고는 하였지만, 사실 민족과 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것들을 처음접하고, 생각하며 읽는다면 약간은 더딜 것이란 얘기다. (민족, 종교에 관한 파트들은 조금 생소한 인물이나 용어에 따라) 그리고 다음 인쇄에는 몇몇 오타가 필히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느책이든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어쨌든, 세계적인 문제이기에, 우리가 더 접하기 힘들었던 언론 저편의 진실들에 완벽하진 않더라도 쉽게 접근하기엔 별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 여겨진다. 사회분야에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들, 혹은 깊게 공부할 여건이 안되는 이들이 보기에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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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ㅇ난감 - 상.중.하 세트
꼬마비.노마비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이상(理想)이 되지 못한 이상(異常)....

정의와 영웅에 대한 혼란스러운 정의....

 

 

 

 



디테일한 묘사선, 클로즈업 되고 왜곡된 형태의 이탕의 얼굴에서 우리는 섬뜩함을 느낀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잠시 흠칫 했지만 이내 다시 페이지를 넘길 것이다. 이제 그는 마스크를 벗고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준다. 우리도 이제 봐버린 것이다. 살인자, 이탕의 자세한 얼굴을.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봐버린 독자들. 자, 이제 우리는 이 긴 사건에 관한 독자인 동시에 목격자가 된다.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어쩌면, 영화 '링' 보다 더 불편한 마음을 들게해준다.

 

 

 

 

 

 

'혹시 죽을만한 짓 하지 않았냐' 고 물어본후의 표정같은 그의 얼굴이 섬뜩하다 생각될 무렵, 그의 얼굴을 채웠던 많은 선들이 점차 사라진다.

 

 


마치 극적일 것 같던 컷구성도 이제 단순화 된다.

 

 


극화체의 그림 또한 단순해지면서, 이야기 또한 심플하게 전달될 터?

 

 

 

작고 간소한 그림, 그럼에도 그 무게감은 여느 극화체의 그림과 다르지 않다.

물론 그것을 느끼기엔 아직 이를 것이다. 

 

 

 

 

 

평범함 이라는 단어가 어울렸을 법한 이탕은 편의점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살인을 저지른다. 퇴근길에서 아까봤던 손님이 쓰러져 있노라고 그 손님의 일행에게 얘기를 하다 시비가 붙어 얻어터지다가 이성을 잃고 한번 휘두른 망치질에 허무하게. 살인, 그로인해 생전 처음 겪어보는 그 격한 심장박동에 그는 어쩔줄 몰라하고, 아무에게도 말못하며 안절부절하던 와중에, 자신이 죽인 인물이 강력범죄를 저질렀던 흉악범이란 것을 알게된다. 더불어 감시는 받고 있었지만, 사건의 가닥이 자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잡혀가면서 그는 그렇게 새 삶의 기회를 얻은 것 같게 보인다. 하지만 사건을 못본줄 알았던 장님여자가 그 앞에 나타나게 되고, 그는 간신히 잡았던 새 삶의 희망에서 보기좋게 미끌어진다.

 

이탕의 첫 살인은 곧 두번째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피해자 또한 강력범죄의 경력이 있던 이로 밝혀지고, 이탕은 혼란스러워 한다. 계속해서 사건을 수사중인 난감은, 단서를 남기지 않는 범인의 수법에 말그대로 '난감' 해진다. 그리고 마치 선택받은 듯, 대중이 '죽어도 싸다'고 느껴지는 이들을 죽이는 감을 갖고있는 이탕의 행동은 이어지고, 그의 사이드 킥을 자청하는 노빈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이탕의 '천부적인 재능'이 아닌, '정밀한 노력'으로 그와 같은 길을 걸으려 했던 송촌이 그들의 주변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간다. 그 사이에서, 늘어나는 피해자만큼 감춰졌던 범죄들이 속속 들어나고, 이탕, 난감, 노빈, 송촌을 둘러싼 이야기도 점점 급박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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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ㅇ난감>이 그리는 범죄들은 이성으로 하는 범죄가 주가 아니다. 여기서 그려지는 범죄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욕망과 순간적인 감정으로 비롯된 범죄들을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정치범죄는 없다. 왜 없는지는 下권의 실려있는 외전#3 '100일' 을 참고하면 되겠다.) 어쨌든, 초과되버린 자기보호본능이라던지, 소중한 것을 잃었을때 끊어져버리는 이성이라던지, 흔하디 흔한 성욕이라던지.. 하는 것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끌고나가는 것은, 그 숱한 욕망중에서도 자신들이 '영웅'이 되겠다는 '욕망', 타인의 부적절한 욕망을 자신이 제어해야한다는 '욕망'

 

 

 

 '외전#2. 딸바보' 中

 

범죄는 사회가 원하는 형태로 나타나는지도 모른다.(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 인용) 바꿔말하면 사회가 어느 부분부터 뒤틀려 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우리가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밑바닥에 곤두박질 쳐 있었지만, 점점 그것이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때론 그것이 꽤 선명해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누군가의, 어쩌면 우리의, 우리 주변의 불편한 '본능의 위험'과 더불어,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에 못지않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위험한 욕망'을 다루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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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 욕망은 그대로 둔 채, 모양만 다르게 변화해온 범죄. 그리고 그 심리를 파헤치는,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대부분 금방 잊고 말아버리는 '심각한' 일들에 대한 끈질긴 시선. 현대적 범죄, 우리가 사실 이라고 알고있던 것 이상으로 깊숙이 들어가 파헤치는 진실, 그로인해 뒤집혀지는 심리(적 진실)와 뒤집히는 상식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불편함.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통해 어림짐작 해볼 수 있는 기본적인, 범죄(가 촉발될 수 있는) 심리묘사의 설득력.... 결국, 우리가 불편해서 더 깊숙히 들어가지 못했던 것들을 디테일하게 뒤집어 깐 모습은 감탄할만 하다.

 

 

 

 

디테일

 

 

 

"꿈이라서 주먹이 천천히 나가...."

 

 

그림으로 치자면 <살인자ㅇ난감>의 그 많은 분량중에서도, 디테일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그림들은 아주 극소수다. 그렇지만 4컷 만화로 구성된 이 만화가 몰입과 호소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역시 연출의 디테일에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2등신의 캐릭터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지만, 초반부분 살인을 저지른 이탕의 심리묘사를 어릴적 일상에서의, 사소하지만 무게감 있던 감정을 통해서 그려내며 공감을 불러왔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의 각 캐릭터들이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와 모든 캐릭터들이 갖는 비하인드 스토리, 범죄가 만들어지고 은폐되기까지의 치밀한 설정 등 간단히 표현하자면 '연출력' 때문에 독자들은 클라이막스로 향할수록 그 귀여운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전혀 귀엽지 않은 처절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단순한 그림으로 인해 그 한장의 그림이 말해주어야 하는 포인트를 잘 집어주기도 한 셈이다. 특히 상황에 맞는 대사, 행동 등 시의 적절한 연출력은, 우리가 갖고있던 2등신의 캐릭터가 주는 감정표현의 편견를 무색케 한다. 쉽게말해, 이런 스릴러의 포인트인, 꼬인 이야기들이 치밀한 통로를 갖고 있다는 점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이 <살인자ㅇ난감>의 가장 큰 (표면적) 장점 이겠다.

 

 

 

 

불편함, 심리

 

우리는 어떤 일정한 아름다움, 사회가 냉정한 판단을 배제해버리는, 동정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 혹은 그런 상황을 파헤쳐 들어가기 쉽지않다. 어쩌면 걔중에는 그 아름다움안에 추악함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름에도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본질을 탐구하다보면 인간본성 이라고 부를만한 -  어두운 부분을 많이 발견하게끔 되고, 그것들은 결국 남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옭아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일까? <살인자ㅇ난감>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결국 두얼굴을 하고있다. 누군가는 욕망으로, 누군가는 신념으로. '위험한 영웅' 과 같았던 이탕에서부터 도덕을 살짝 비껴간 잘못을 갖고 있고, 작던 크던 저마다의 도덕적 결함을 갖고 있다. 타인에게 보이는 가면과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진짜 얼굴. 어쨌든 으레 우리가 쉬쉬하고 피하려는 그런 불편함. SD의 캐릭터들이 아무렇지 않게 강력범죄를 저지르듯, 꼬마비&노마비 또한 아무렇지 않게 우리가 불편해 하는 것들을 잘 짚어주고 있다.

 

 

 

 

...누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어차피 우린 다 장님에 귀머거리 아닐까"

 

 

경찰이라는 감투때문에 법이라는 테두리를 옹호하지만, 결국 경찰들도 별반 다름없는 사람이다. 죽은 이들의 전과가 흉악할때 그들이 으레 내뱉던 '죽을 짓 했구만' 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가장 최종적인 형벌이 죽음 이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책에 언급됐듯이 죽어 마땅한 사람을 누가 정할 수 있는가. 물론 잔혹하고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은 정말로 '죽을 짓 했네' 하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헌데 '죽을 짓 했네' 란 것은, 결국 '맞을 짓 했네' 라는 전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쉽게 생각했을때 '정말로 맞아도 싼' 사람들을 만들어버리는 논리는 그 이외의 많은 상황에 더 위험한 판단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중이 만드는 애매한 처벌은 결국 혼란과 불안을 만들 수 밖에 없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 이라는 전제에 대해 나도 생각한다. 저인간은 왜 안죽나 그렇게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또한 만약 어떤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변할련진 모르겠다. 아마 객관적에 가깝고 냉정에 가깝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제3자이기에 가능할 것이라는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 주변으로 다가오기 이전에, 우리의 본능적 분노가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폭발하기 전에 그 분노를 방관하는 '시스템'을 점검해야 한다. 여기서 굳이 왕따 가해학생들에 대한 처벌이나, 장애학생 성폭행에 대한 처벌수위 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예방시스템과 지원시스템이나, 그런것을 논하는 것이 우리가 더 분노해야 할 일을 만들지 않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분노는 어떤 욕망와 다름없는 자연적이고 본능적이면서, 통제해야 하는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그 어떤 사건의 욕망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송촌이 말미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찾는 것은 어쩌면 그 혼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는지도 모른다.

 

 

 

 

"법 안에서 허용되는 만큼만 미쳐야 된다는 거"

 

 

 

 

 

...누가,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는가

 

스스로 내려야 하는 범죄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 유효할까. 영웅은 존재할까. 영웅은 무슨 근거와 자신감으로 악을 처단하나. 과연 우리앞에 영웅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우리의 모습은 정말로, 배트맨을 두려워하던 고담시의 시민같지 않을까. 인간은 영웅을 원하면서도 막상 영웅이 자신들 앞에 나타났을땐 그 초월적인 힘에 불안해하는 모습을 띈다.

 

 

 

 

 "누가 됐든 좀 나와서 다 쓸어버렸음 좋겠네"

 

 

이탕은 영웅이 아니었다. 영웅이 될 수 없었다. 진짜 '어둠의 기사' 였다. 인간적인 면을 잃을뻔 했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송촌은 어떤가.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그동안 쌓아온 불만과 억압으로 말미암아 이익과 신념을 위해 결국 광인으로 변해갔다. 송촌의 "넌 어떠냐, 스스로를 믿고있냐' 는 질문은 그래서 더이상 청춘을 향한 낭만적인 질문처럼 들리지 않는다. 네 스스로가 믿는 것, 정의같은 도덕적 잣대에 대해서 다른 이들도 공감 하느냐. 그것이 다른 이들도 원하는 것이냐 묻고있다. 역설적이게도 송촌의 입에서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따금씩 꺼내놓는 분노를 향한 질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 번으로 족해 그 이상은 혼란일 뿐이야"

 

 

어쩌면 시대는 많이 변했는지 모른다. 홍길동처럼 민초를 위해 불의와 싸우는 것은 결국 우리의 소설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정의가 누구에 손에 의해 어디까지 발현되야 할지를 고민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원작은 안봤으니 어쨌든)에서 배트맨이 결국 조커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배트맨과 조커를 둘러싼 선과 악의 대한 논의를 제쳐둔다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정의를 얘기한게 아닐까. 그러니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법과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법이 정의를 품으려면 그 법은 얼마나 정의로워야 겠는가. 게다가 '작가의 말'마따나, 진짜 선수들은 칼이 아니라 법으로 상대를 제압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볼 일이다.

 

 

 

 

술마시지 않고 하는 '정의' 와 '영웅' 대한 주절거림

 

 

 

 

 

정의는 무슨 의미를 지녀야 할까. 우리가 분노하는 불의는 어떤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는 수많은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의를 많은 이들에게 위탁하고 있는 우리들이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불의 그 이상이다. 미성년, 혹은 음주로 인한 강력범죄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상식이라고 여기는 처벌을 받지 않는 모든 범죄들이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분노해야 할 것은, 불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불의를 명확히 바로잡지 못하는, 우리가 위탁한 정의 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정의를 원해야 할 곳은 치안기관과 사법기관 일 것이다. 우리의 영웅은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한다. 모두가 최대한으로 공감할 수 있는 죄에 대한 처벌을 공정하고 적법하게 내릴 수 있는 곳. 우리는 거기에 영웅을 세워야 하고, 그들이 영웅이 될 수 있게끔 쉼없이 감시하고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정작 영웅에 대해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너무 쉽게 단념해버리고 비웃어버리는 현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신해철의 노래 'the hero' 에서 그중 한가지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영웅을 갖고있어. 유치하다고 말하는건 더이상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이야.

 

거의 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없었음에도, 영웅을 바라는 마음보다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며, 단념하고 비웃는 세상은 절망적인 곳인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영웅을 품는다해도 현실에서 우리는 얼마나 바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이 원래 불의에 적합한지라 사회화를 통해 정의를 외치든, 아니면 그 반대든. 눈 앞에 초월적인 힘을 가진 영웅을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각자가 '최소한의 영웅'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저 높은곳에 '최대한의 영웅'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작금의 시대를 보자. 한명의 영웅이 바꾸기에 세상은 너무 거대해졌다. 영웅이 한곳에 머무르는 사이 수도없이 불의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정의로운 법을 집행하는 '영웅'을 똑바로 내세울 수 있는, '작은 영웅'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런 영웅적 (신체적, 초능력적, 재력적)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기꺼이 영웅과 같은 희생을 등에 엎고 지금도 저 험한곳에서 고군분투 하는 그들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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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중요하진 않은 덧. 1 <살인자ㅇ난감>을 읽으면서 미야베 미유키의 <영웅의 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에서 보여졌던 영웅들의 모습들을 많이 떠올렸다.

 

 

 

꽤 중요할지도 모를 덧. 2

1) 완성된 스토리를 위한 외전

 

 

 "....그래서 난 아빠가 걱정돼" - 외전#2

 

<살인자ㅇ난감> 에는 기존 인터넷 연재에 실려있지 않은, 단행본에만 들어가있는 외전이 있다. 그런데 이 외전에 으레 웹툰이 책으로 나올때 더해지는 부록과 같은 것이 아닌, 이야기 자체를 확장시켜주는, 본 연재에서는 실리지 않았던 뒷 이야기가 나온다. 上권에서는 이탕이 처리한 맹인이 데리 고 다녔던 맹인견의 전 주인이었던 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외전#1. 인간의 친구' 가, 中권에서는 마찬가지로 이탕이 처리한 남자 고등학생 둘에게 이전에 강간당했던 한 여학생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외전#2. 딸바보'가, 下권에서는 이탕과 노빈이 만나게 된 계기인 '외전#3. 100일' 과 추가결말이 수록되어 있다. 미공개 단편들을 통해 <살인자ㅇ난감>의 세계가 더 디테일해짐은 물론, 그 이야기들을 통해 추가적인 생각거리도 늘어난다. 또한 추가결말 까지 더해지니, 어쩌면 진정한 <살인자ㅇ난감>의 세계는 단행본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구매야 구매자의 몫이지만, 타 웹툰 단행본에 비해서 좀 더 특별한 가치를 충분히 지녔다고 생각한다.

 

 

2) BGM 함께 감상하기

 

 

 

사실 읽은지가 좀 되서 두번째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이다.(그렇다고 수준이 늘어나는 건 아니지만;) 아마 누가 시간을 떼어주며 더 써보라고 하면 더 이야기 할 거리가 많은 것이 이 책인데, 그런 면중에서 BGM 은 꼭 이야기 해야할 것 같다. 영화화 될 것을 생각지 못했을 작가가 언젠가 상황에 맞게 쓰려고 아껴둔 음악들은 그저 조용히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을 전해줬다. 대부분의 음악들은 음원사이트에 등록되어있어서 쉽게 구했지만, 여러 사정상 못구한 음악들은 유튜브나 블로그에 가서 들으며 책을 읽었다. 작가의 말대로, 어떤 것은 그 상황에 철썩 들어맞기도 하고, 어떤것은 그 상황에는 조금 어색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묘한 분위기를 불러오기도 한다. (가령 살인장면 에서 흐르는, 사건이 일어나기전 미리 틀어진 감미로운 라디오 음악으로 인한 이질감이라던지)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음악을 구하고, 또 거기에 맞춰서 책을 다시 읽느라 꽤 시간을 들였기 때문에 이 부분에 욕심을 내서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음악이 꽤 많기도 하거니와.. 음악 리뷰를 어떻게 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길게 쓰진 못했다. 다만, 누군가 시간이 좀 가용하다면, 책의 앞에 실린 차례에 나와있는 음악들을 맞춰 들어보는 것도 꽤 맛난 별미(?)가 될 것이라 얘기해주고 싶다. 특히 이제 영화화가 결정된 이 작품(사실상 저작권료 때문에 여기에 실린 음악들이 실릴 일은 거의 없겠으니) 이 어떤 분위기에 어떤 음악이 깔릴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즐거움이 되었다.

 

참고로 네이버 오늘의 뮤직에 실렸던 <살인자ㅇ난감>의 음악들에 관한 URL 을 첨부한다.

URL : http://music.naver.com/todayMusic/index.nhn?startDate=201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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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포함된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작가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사진출처 : 단행본 및 온라인 서점 책 소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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