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는 것은 잘 모르겠고, 자신이 만든걸 그만큼의 돈를 내고 사가라는데, ‘또 하나의 가족’을 자청한다. 아무래도 자기가 나라를 먹여살리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내 가족은 지금으로도 족하다고 하는데 자꾸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정말 제 가족은 백혈병으로 나가 떨어지는데, 괜히 엄한 사람 붙들어 가족이라며 저기 북쪽나라 뺨치게끔 하루에도 몇번씩 세뇌를 해대니 한때는 정말 회색 콘크리트의 그 파랑색이 내 가족인 것 같기도 했던 때가 있었다. 가족도 아닌데 자꾸 가족이라고 부담스럽게 강요하는 그들의 모습이 여기 조폭들의 이야기와 맞물려 생각났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통해 가족이 뭔지, 뭘 얻는지, 뭘 할 수 있는지 그 특유의 해학으로 버무러진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강을 끼고 있는,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 마을에, 쫓겨나거나 혹은 도망쳐오거나 하며 세상의 주류에 섞이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하나의 ‘식구’가 된 이들. 그리고, 조폭이 되겠다며 조직에 들어와서 합숙훈련을 받으며 ‘식구’가 된 이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드라마(가족)에 편승하지 못해서, 버려진 가짜의 드라마(가족)위에 터를 잡기 시작하며 살던 여산의 식구와, 보통의 드라마는 아님에도 그들과 전혀 다른 노선에 놓여져 있는 조폭들이 서로의 가족의 결속을 바탕으로 나뒹굴기 시작했다.

 

각자의 사정과 상처를 갖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모인 여산의 식구들은, 그 자신들이 삶에서 머물 끝자락으로 그곳에서 살아간다. 피 한방울 섞이진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이 할 일을 통해 서로가 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채워가는 일은 아마 그들이 인지와 상관없이 서로의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 터. 더불어 그 사이의 여러 새들과 물고기들의 가족사는 인물들이 채 보여주지 못하는 본래 그래야할,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집단의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여들어 애써 만든 가족이란 울타리를 결국 힘과 공포라는 것으로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세계의 모습을 반추하기 위함일지도 모르겟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적(籍)을 두고, 그저 외부의 풍파에서 벗어나 있을 곳을 찾던 이들에 다름 없었겠지만, 조폭과 같은 외세와 싸워가는 과정에서 그들 각자가 서로에게 갖는 의미와 영향을 깨닫게 되면서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찾는게 아닌, 진정 서로에게 필요한 누군가가 되어주고 있었다. 소희가 밭에 가꾼 온갖 식물들과 나누는 교감에서 처럼, 그녀가 대지를 비롯한 모든 식물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인것 마냥 느끼고 소통할 수 있음으로써 그것들을 버리고 갈 수 없는 모습처럼, 결과적으론 식구라는 것도 가족으로 진화하면서 그런 형태를 띄게되는 것 아닐까.

 

학력, 체력, 모든게 모자라는 여산의 가족들이 견고하고 무자비한 조폭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건 똥통, 고춧가루, 벌 등과 같은 자신들이 가진 해학의 힘이 외부에 있었고, 그들 스스로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이 그러려니 하던 ‘사실’에 대해 누군가 ‘진심’으로 외쳐주었기에 가족이라는 집단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내면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것들이 연대할 수 있던 것은 누가 애써 가족이라고 정의내리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 더 강한 질문을 통해서 구성원 스스로가 그것을 진실로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성석제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해학으로 우리에게 이야기 했다.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이제는 달라진 시대에 맞춰나가야 할 공동체라는 운명,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시작(강, 젖줄)을 침해하는 악의 무리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가족을 형성해나가야 하는지. 생명의 시작을 위협하는 것은, 결국 이 생태계의 모든 가족을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깐.

 

강은 전통적으로 사람이 모여살기 시작하는 곳이다. 생명의 근간이 되는 강에 하나둘씩 모여 살다보니 많은 이들이 어느새 혈연이란 틀을 벗어나 자발적으로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강에서는 여산이 고기를 잡고, 땅에서는 소희가 밭을 일구듯 서로의 몫을 채워가며, 마치 영화 <괴물>에서의 가족들 처럼. 그런 강은 여산 가족에게도, 정묵에게도 결국 생명의 젖줄 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라는 것과 별개로 그들 모두가 그 언젠간 그 위협을 공유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자신의 자리가 유신시절의 ‘아버지’와 같은 위치라도 되는 것 마냥 ‘너 잘되라고 하는 것’ 이라며 불도저를 앞세우며 모든 가족의 시작을 위협하고 있는 이 현실에서 말이다. 자연-강은 여전히 강이고, 사람-가족도 여전히 가족인데, 그래야 할진데, 이제 그들의 시작이 위협받고 있다. 시작의 형태가 허물어지는 것은 결국 그들이 살아온 역사가 부정당하는 것은 아닐까.

 

언제고 우리는 어딘가에서 또 가족이란 이름으로 맞서야 할지 모른다. 가족이란, 개인이 스러지지 않게 하는 울타리다. 우리는 개인이 혼자서 성취할 수 없는 일들, 혼자서 버텨낼 수 없는 일들을 가족이란 일들로 이겨내며 살아간다. 사랑으로 이뤄지는 것이 가족이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가는 것이 가족이니, 피는 다르더라도 피 같은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될까.

 

우리는 (힘으로 만들어지는)가짜 피와 (마음으로 만들어지는)진짜 피를 구분해야 한다. 가족이 어떻게 구성원을 버티게끔 하는가. 상대의 무게를 밀어내면서 언젠가는 누군가를 밀어내야하는 모습인가, 등을 기댄채 서로의 무게를 덜어주며 언제까지고 있을 수 있는 모습인가. 서로 마주보고 밀어내고 있던가, 등을 마주대어 기대어 있던가 말이다. 어느쪽이든 서로가 버팀목이 되는 것은 가능하나, 그 본질적인 지향점은 정 반대인 것이다. 근본을 잊지 않는 공동체가 우리를 버티게 한다면, 우리는 어디 앞에서건 당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