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쿠스틱 라이프 3 어쿠스틱 라이프 3
난다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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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제, 어쩌다 처음 이 만화를 집어들게 됐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어, 그냥 이런저런 커플얘긴가 하며 호기심으로 열어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웬걸. 이것은 결혼생활 만화였다. 현재진행형의 커플이야기를 통한 염장도 아닌, (일단 공식적으로는) 사랑의 법적 완성형인, 결혼이야기라니.... 근데 다행이,  신기하게도 그렇게 염장질이 오질 않았다. 재밌었다. (너무 먼 얘기라서 그런건가?) 주인공이자 작가 자신인 난다와 그의 남편 한군의 결혼생활, 이 둘이 어딘가 어설프지만, 알콩달콩 사는 얘기는 질투를 불러오기 보다는, 귀여움에 가까웠다. 아름답고, 예쁜 모습으로 포장하고 있진 않았지만, 아주아주 사람 냄새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결국 3권을 기다리게 만들었고, 드디어 만났다!!!

이제 결혼4년차에 들어선 이들 부부의 모습, 웹툰 연재 한 시즌을 마치고 소심하게 3주간의 휴식을 얻은 이야기로 만화는 시작된다. 3주간의 휴식도 역시 생활웹툰의 고수답게 재밌게 잘 버무리는 솜씨로 그려진, 자기 가치를 두고 소심하게 고민하는 난다와 그런 소심한 고민을 보면서 다이어트에 예민해진 남편 한군도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은 어쩐지 귀엽기만 하다. 이야기는 이렇게, 소소하지만, 그 소소한 곳에서 캐릭터와 소재의 재미를 적절히 캐치해가서 이야기 하나하나 아기자기한 재미와 기쁨을 준다.

 

 

난다의 남동생과 함께한 자리에서 남동생의 근황을 묻다가, 자신들의 근황을 생각하자, 결국 '너랑 살았잖아'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 결혼 4년차 부부들. 역시 이 만화는 결혼생활(주부)웹툰이 맞다. 그래서 결혼생활의 모습들은 사실, '아~ 이렇구나' 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결혼생활에만 치중하다보면 분명 미혼자들은 괴리감이 있을법도 한데... 신기한게 그런게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 둘 각각의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들이 솔직하게 그려지기 때문이 아닐까. (난다의 남동생인 토깽 포함)

 

 

어쨌든, 우리가 으레 알고있는 결혼생활이야기를 재미지게 그려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난다와 한군, 이 둘의 모습들이 참 정감있게 그려져 있어서, 삽시간에 읽어내려갔다. 언젠가 결혼한다면, 이렇게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려면... 3화에서 그려진, 싸움에 대처하는 한군처럼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지...

 

어쨌거나, 이제 막 3권을 봤는데 벌써 4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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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주지 마! 2
하나코 마츠야마 지음, 김재인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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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한+과잉 친절남 유이치, 지치지도 않고 또 왔다!

표지로 보아서는 전권과 달라진게 없을 것만 같은 유이치, 달라진게 있다면, 유이치가 베푸는 친절의 강도는 더 기상천외 해졌고, 그 대상도 넓어졌다는 것!

 

 

 

시작부터 역시 빵터지는 (어쨌든) 네컷 만화 속 유이치. 게다가 작가는 '친절하게도' 자연스럽게 '일반적인' 친절을 베푸는 이들과, '타이밍 매우 나쁜' 친절을 베푸는 유이치의 사례를 한곳에서 비교 해줌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이 문장도 무척 친절하다는..)

 

 

 

유이치의 친절은 '타이밍이 매우 나쁜' 것뿐만 아니라, 마음에 '뒤끝'이 남는다고도 표현될 수 있겠다. 친절을 소재로 웃기는 네컷만화를 그리는 작가도 분명... '친절' 하다;; 하지만 사례별로 확실히 정의되는 것은 분명한 듯.

 

 

 

 

1권에서 처럼 여전히 타이밍 나쁘고, 뒤끝 남는 친절을 베푸는 유이치는, 2권에 이르러서는 그 친절의 폭을 넓혔다. 아이들에게는 괜히 '어른들이 사는 삭막한 세계의 현실을 미리 대비하게 해주는' 친절을 베푼다던가 하는 등... 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골드미스인 산죠 부장과의 미묘한 감정이라던가 (물론 산죠 부장에게서 조금 일방적이다. 유이치는 눈치 빵점 이니깐.. 이 둘의 관계는 앞으로 지켜볼 일!) 유이치의 어릴적 모습들이 그려짐으로써.. 유년기부터, 혹은 뼛속부터 친절의 선구주자 였던 것을 확인하는 일 들이다.

 

어쨌든, 꿋꿋하게 한가지 철학으로, 하지만 신기하게도 계속해서 그 주제에 걸맞는 소재를 여기저기 곳곳에서 발견해 그려내는 이 만화, 어떻게 흘러갈지 무척 궁금하다. 4컷 만화라서, 각각 모두 단절된 에피소드처럼 보이지만, 백그라운드에선 주인공을 중심으로한 각 인물들의 관계도 나름 조금씩 변화하고 있으니깐 말이다. 어쩌면... 3권 즈음엔, 어떤 의미에서의 해결, 혹은 완화!? 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럼 개그만화가 너무 훈훈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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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주지 마! 1
하나코 마츠야마 지음, 김재인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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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설명을 보지 않고, 표지를 먼저 보았을때 왠지 모르게 먼저 든 생각은, 주인공으로 보이는 저 남자가 고문관 같은 스타일이라, 저 녀석에게 '잘해주지마!, 잘해줄 필요없어!' 인줄 알았다. 책 소개를 읽고, 실제로 읽기 시작했을때는...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던걸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야기는 정 반대였다. 이 <잘해주지 마!>의 제목은, 그리고 이 만화를 끌어가는 모든 중심화제는 바로, 주인공 유이치가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앞뒤없는 친절과 배려를 베품으로써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로 이어져, 그 주변사람들이 유이치에게 호소하는, '제발 우리들에게 잘해주지 않아도 돼!' 라는 것이었다.

 

 

그 유이치가 얼마나 타인, 혹은 자기 외의 모든 것들을 배려하려고 하는지는 사실 모든 만화에서 드러나지만, 위에 같은 경우에서 처럼, 그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면접자리를 오는 동기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가히 모두 혀를 내두를만 하다. 이 유이치에게는, 자신에게 중요한, 자신을 위한 일은 대체 없는 걸까!?

 

 

정답은... '없다'. 프로젝트 실패에 책임을 지고,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는 부장에게 그가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선 꺼낸 말은, "혼자서 회사를 움직여 왔다고 생각 하신다면 큰 오산 입니다!" 다... 보이는 것처럼, 유이치의 친절은 지구 최강이라고 불리어도 될 만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상황에 맞지 않아 오히려 상대에게 좌절감을 주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 유이치에게 '잘해주지마!'라고 호소할 만도 하다.

 

누군가는 유이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착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 즉 '착한사람 콤플렉스' 같은 게 아닐까? 라고....

하지만 역시 정답은 '아니다'. 유이치는 뼛속부터 친절과 호의, 배려가 몸에 베어있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그런 이유로 의사에게 상담을 받아보지만, 오히려 그런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다. 주변사람들이 쩔쩔매는 이유도 당연하다. 그의 친절이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기 때문!!!

 

어쨌든, 시종일관 큭큭 거리며 읽었던 개그만화인데 글은 짐짓 진지하게 써져 버렸다. 하지만 같이 올린 그림에서 처럼 이 만화는 분명 '개그만화' 다. 그것도 굉장히 '철학'있는 개그 만화다. 지인에게 이 만화책을 보여줬더니, 큭큭 웃으며, '나랑 닮았다' 라고 하더라... (나는 정말 이정도까진 아닌데!!!...) 어쨌건, 시종일관 웃으며 보는데 은근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많다. 내 딴엔 친절이라고, 진심이면 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행동은 과연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걸까? 그리고 좋은 결과가 아니라면 내 의도가 좋다고 해서 아무 책임없는 걸까? 하는..

 

잘 웃으면서 봐놓고 괜히 몰입해서.. 진지한 생각들을 해봤다. 가끔 일반적인 컷구성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4컷 구성인데, 그 반전이 늘 일정한 웃음을 유지하고, 그것들의 소재가 모두, '과잉, 상황에 안맞는 친절' 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대단한 것 같다. 한가지 주제를 갖고 이렇게 생활, 직장 곳곳에서 개그를 뽑을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미워' 할 순 없지만 조금은 '얄미운' 유이치의 행보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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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없는 두 사람 : 바닷마을 다이어리 4 바닷마을 다이어리 4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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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 만화에 대한 진심어린 추천을 접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은 나를 향한 것도 아니거니와,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된 것이었지만, 워낙 그 작성자가 이 만화에서 받은 감정이 진정으로 느껴졌기에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억하고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소박하면서 사랑스러운 느낌, 전체적으로 예쁜 표지 구성, 넉넉한 풍경에 들어가 있는 여유로운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이 만화의 따뜻함을 짐작케 해주었다. 그럼에도 적잖은 시간이 지난 후에 이 만화를 만났고, 얼마전에야 나는, 그 누군가 이 만화를 그렇게 진심어리게 추천해주었던 이유를 확인하게 되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제목 보다는, 각권에서 중심이 되는 소제목이 더 크게 표지에 인쇄되어있는 이 시리즈는, 각권이 한편의 (말그대로) 일기처럼, 꽤 잘 어울린다. 처음 볼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한권 한권 덮을때마다 참 좋은 편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제목들은, 한폭의 수채화같은 표지에 대한 제목이기도 했고, 각 권에 담긴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압축해주기도 한다.(물론 한권의 책엔 다른 소제목의 이야기도 더 들어있다) 다만, 애초에 내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공통된 인물들의 시리즈니깐, 1권부터 읽어야 한다. (소제목이 더 크기때문에, 옴니버스식인 건 아닐까도 생각했었다)


 

카마쿠라에서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던 세 자매는 오래전 자신들의 곁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갑작스레 듣고, 그곳으로 향하지만 큰 감정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장례식장에서 이제 혼자가 된, 배다른 여동생인 스즈를 만나고, 세 자매중에 첫째인 사치는 함께 살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카마쿠라로 간 스즈가 세 자매(사키, 요시노, 치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이 <바닷마을 다이어리>다.

 


우선 이 만화는, 카마쿠라라는 지역의 특성을 기막히게 활용한다. 신사라던가, 지형이라던가, 언덕길, 그리고 여러가지 명물 음식이나 축제같은 것들 속에서 이야기를 녹여내며 독자들에게 마치 그곳을 둘러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게 해주며, 정말로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은 욕심이 나게끔 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네 자매가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삶과 사람을, 나아가 어딘가 평범에 미치지 못하는 부모들을 점차 이해해가는 이야기란 것이다. 그것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허세떨지 않고 겸손하게, 하지만 무척이나 인간적이고 간절하게 다가오기에 늘 안쓰럽지만, 또 감탄하고 만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하지만 이뤄지지 못하고 헤어지고 하는 일들이야 굳이 따져서 일상다반사라고 쳐도, 그 과정에서 그들이 배우는 감정과 사람에 대한 깊은 고민과 이해들은 분명 매우 통찰력 깊게 그려져 있다. 



특히 카마쿠라에서 먼저 살고있던 사치/요시노/치카와 스즈는 분명 적대관계(앞의 세 자매의 아버지 였던 사람은 스즈의 엄마 때문에 가정을 포기했다.)라고도 볼 수 있음에도, (물론 그들이 부모를 자신의 인생에 연관시켜 놓으려 하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보듬어가는 과정을 때론 위태롭기도 하지만, 결국은 안도하게 된다.

 


그런 네자매가 힘겹게 자신의 부모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과정속에서, 그들도 누군가처럼 평범하게 사랑을 하고, 또 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늘 그들은 그 속에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그 사람이 내린 결정을 만나면서도 결국은 그 어려운 과정을 잘 견뎌 누군가에 대해 더 깊히 들여다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억지로 새 인연을, 큰 사건 혹은 급선회 하며 그리지 않고, 주변에 있는 이들에 대해 하나하나 따스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며 애정을 쌓아가고, 그럼으로써 서로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고, 사람으로써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나아가 완벽히 이해할 순 없다고 해도 의지할 수 있는 서로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읽으며 내가 느낀 가장 크게 느낀 행복감 중 하나이다.


 

자신의 아픔을 통해, 혹은 타인의 아픔을 진정으로 들여다 봄으로써 한발 한발 성장해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흠뻑 와닿는 한장한장을 읽으며 입가엔 살며시 미소가, 마음은 말랑말랑해 지는게 느껴졌다.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서로를 보듬어가며 살아갈까. 한 집, 혹은 한 마을에 가까이 살고 자주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일은 아직 부족함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한발한발 이해하고, 혹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앞으로도 서로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그런 마음은 분명 시간이라는 바람을 타고 사람의 마음 깊숙이 전해질 테니깐.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고, 이해해가고, 보살펴주고 아껴주는 일이 이토록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바라보고 다독여주고 싶다... 바닷마을의 그들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손놓고 있을 수 없는 마음이라면... 분명 우리는 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싶다.






덧>


4권에 등장한, 요, 잔멸치 토스트.. 이미 해먹어본분도 봤지만..나도 꼭 해먹어보고 말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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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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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전 의도치 않게 친척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살 어린 동생과 함께 그의 방에서 있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서 마주치는 것이 전부인 그와 나는 그다지 친하거나 혹은 그 반대도 아니다. 소싯적에 머리카락 붙들고 싸우던 일은 이제 그냥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관계. 무슨얘기끝에 그가 나에게 물었다. 꿈이 무엇이냐고. 나는 갑자기 깔린 멍석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석은 진지한 눈빛으로 물어봤다. 대답했다. 그리고 왜 지금 거기에 코빼기도 가깝지 않은지 둘러댔다. 그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사가 되기위한 공부와 실습을 하고있으니, 누군가에게 말을 하거나, 꺼내놓게 하는데 능통하겠구나', 라는. 어쨌든 그는 그것들이 핑계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이야기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기에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그 이후였다.
 
그는 우리 부모님과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다른 친척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잘되라고. 말문이 막혔다. 무슨말을 해야할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예수께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왜? 그 집안은 우리집을 비롯한 다른 친척들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다고 할 수 있지는 않다. 물론 냉전과 같은 분위기가 시종일관 지속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속에 문득 그런 기류가 감지될 뿐이다. 어쨌든, 그 이유 가운데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었다. 집안행사는 교회행사보다 뒷전이었고, 다른 친척과는 투닥거릴지언정, 자신교회의 교인들을 더 아꼈다. 모두가 모여 논의를 할때에는, 그들 자신의 믿음이나,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비단 종교만의 문제,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항상 완벽히 환영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들의 관계는 은연중에 나에게 약간이나마 심어졌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 동생까지 그 범주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결국 그 또한 한 범주에 들어갔던 것이 사실이니, 무척 당황스러웠던것이 내게는 당연했다.  
 
어쨌든, 나는 그에게 고마웠다. 무척이나 고마웠다. '매일? 웃기시네..' 라고 속으로 비웃고 뭉개버리기엔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짐짓 진중했다. 나는 더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는 선교로 흘러갔다. 우리 가족은 아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전 무렵까지 교회를 다녔던걸로 기억한다. 나또한 부활절에 반투명한 컬러의 종이에 쌓인 달걀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니깐. 하지만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된건, 우리가 살던 윗집의 영향이었다. 부모님의 말에 따르면, '교회에 다퍼주고 망했다.'라고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렇지만, 대략 자신들의 수입에 맞지않게 교회에 헌납했었으리란 사실은 짐작이 간다.
 
한때는 가식으로 보기도 했지만, 내가 바라본 시골교회에서의, 노인들을 위로하고 묶어주는 교회, 목사의, 교인의 역할을 보았기에, 교회를 통해 조금 더 안정을 찾은 그들을 보았기에, 나는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얘기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혹은 부유한 자 일지라도, 종교가 안식처가 되고 좀 더 나은 행복을 위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그러니 그가 말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다니거나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은, 다시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그나마 상쇄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기도를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내가 말한 '궁극적인 행복을 향한 종교의 역할'은, 선한 행동이 선행된 뒤의, '강요하지 않는, 자율적인 종교생활 = 믿음' 이었다. 그들 스스로, 보여야만 믿느냐고 반문 하듯이, 그것은 진실의 문제이기보다 믿음의 문제니깐) 그는 대답했다.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죄가 완벽히 없을 수 있겠느냐고, 그렇다고 또 그런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며 살아가야 하느냐고, 예수님이 그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 메달렸다고, 기도 함으로써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차라리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과오들을 지워낼 수 있다는 '자기만족'을 정당화 하는게 나으면 나았지, 이런 면죄부라니...
 
면죄부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을 모집할 때의 그 유명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말을 지나치고 나니, 열흘동안 공의회가 토의를 거쳐 결정한 사항에는 그것과 똑같은 말이 들어있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면죄가 주어진다." (31) 
 
완전한 면죄는, 십자군에 참가함으로써 그 어떤 죄든 면죄될 수 있단 것이었다. 그것이 살인이든 더한것이든. 이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인가. 아니 논리를 들이대기에도 어리석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으로 이야기 해야할 테니깐. 십자군에 대해서 아주아주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이유들을 알고있고, 관심도 없던 내게 이 부분은, 그 친척동생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네가 말한 '면죄'를 통한 안식을 얻기 위해,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게되겠구나."
 
부(영토)와 권력에 대한 야망, 소속 클랜으로서의 공동체 의식 + 금전적 수입을 위한 참가도 적지 않았고, 어쨌든 비잔틴제국 황제의 요청과,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자신이 처한 권력의 약화를 타파하기 위해서 제창한 십자군이라도 (과학/의학 및 생활수준/신분고착으로 비롯된 괴로움을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타파하려했던 시기였기에) 종교에 대한 믿음이 참여에 대한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성지순례행위에 타인(이슬람)에게 대가를 바치는 것에 대한 불만 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그로인해 '성지탈환' ,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이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었을 것이란 것도 예측 가능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아무리 표면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향한다 해도 그 안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셈하는 것도 새삼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종교에 대한 믿음을 다시 반추해보면, 그것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들이 지은 죄를 면제받기 위해서 참가하거나, 지원금을 충당한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은 곧 면죄의 대한 믿음과 나란히 걸어갔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면죄부'에 집중해서 몰입하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자신의 신을 위해 벌이는 살육이 과연 신이 바란것인지, 인간인 자신들이 바란것인지 질문하면서. (아니 이미 내 스스로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리고선)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가 일단 연대순으로 민중십자군부터 차례로 언급한 것과는 다르게, 이 <십자군 이야기1>은 교황을 통해 시작된 본격적인 십자군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민중십자군은 적절하게 다시 등장한다) 아마 이것은 민중십자군이 결국 종교에 대한 믿음, 면죄/천국에 대한 욕망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과 비교해서 각 귀족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1차 십자군이,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종교를 넘어서는) 권력, 야망, 음모, 이기와 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3권으로 펼쳐질 이야기에서 작가가 생각하는 '중요도'에 단순히 밀린것일수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1차 십자군은 출발했고, 매우 집중력있게 (초반에 이 멍청한 머리가 또 이름들을 헷갈려한것을 제외하자면) 읽기 시작했다. 거기엔 무엇보다도 시오노 나나미 작가가 역사의 사실적 기술 사이에 배치해둔 인물의 심리묘사와, 그리고 로마를 비롯한 고대 세계에 대한 애착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시대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 상황을 돋보이게 하는 문학적 감수성이 이들의 원정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초반부를 서술하며 명칭에 대한 정리를 한다. 이슬람국가에서 바라보는 로마(그리스)인, 그리고 그 반대의 시각과, 프랑크인을 비롯한, (현재 와는 매우 다른) 민족적, 영토적 경계를 그 시대적 상황에 맞춰 교정해주고 시작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동방이나 서방이나 호칭 하나도 상당히 엉성했던 것이 중세 시대이자 십자군 시대였" 으니깐. (87p 인용)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그녀(작가)의 역할은 바빠진다. 사실적 기술로는 '읽게'만드는 힘에 한계가 있을테니깐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녀는,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표면/심리)적 묘사를 채워넣는다. 작가의 역량을 통한 인물들의 묘사(교황 우르바누스2세부터, 보두앵 까지)는 역사적 사실들 사이를 수놓는 다리가 되고, 또 잘 닦인 얼음과 같이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십자군에 참가한 다양한 제후들에 대한 탐구로 인해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는 셈이다. 역사는 결국 빈틈을 남길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채우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자료가 근거가 되지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그 주변의 근거를 통해 추정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것들을 이제껏, 거의 비슷한 모습(태도)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군상에 대한 혜안으로 받춰주는 이것들이야 말로 과거의 역사를 현재서도 짚어볼수 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어쨌든, 나는 시오노 나나미가 그리는 각 인물들이 심리묘사가(비록 작가의 판단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을 더욱 찰지게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1차 십자군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모두 성직자들인데, 이런 사람들은 전략적 발상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은 자기 관심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나의 지나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이처럼 되었다. (111)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인물의 묘사는, 시대적 이야기를 좇는 즐거움과 더불어, 독자들이 그 인물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고, 나아가 원정과정에서의 완급조절과, 작가의 적절한 개입은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며, 집중력을 더해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시대를 지금의, 작가 자신의 시각으로 반추하는 것이 빠질수 없다. 나아가 그런 시각에서 탄생된 고차원급의 유머러스함은 또 얼마나 즐거운지.
 
십자군은 프랑스의 유력한 수도원이던 클뤼니 수도원이 불을 붙이면서 시작된, 말하자면 종교가 주도한 ‘사회개혁운동’ 이었다. (119)
 
이렇게 그리스도 전사들은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자면 ‘속죄’. 동양에서 말하는 ‘목욕재계‘, 내가 보기에는 ’집단 세뇌‘를 마쳤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속죄를 마치자,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다툼하는 사이였던 레몽과 탄크레디가 우애의 증거로 서로 껴안았다. 그걸 보면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233)
 
또한, 사실적 표현의 경계를 묘하게 오가며 문학의 그것과 같은 서정적 표현이 담겨있는 묘사는, 인물의 감정에 더욱 깊이 몰입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내 앞의 펼쳐진 이야기가, 글자와 여백을 넘어서 그 시대를 눈앞에 투영하게끔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준다. (다만, 이런 감상적 표현은 아주 드물다)
 
그날은 ‘철의 다리’ 맞은편에 펼쳐진 평지에 천막을 치고 밤을 보냈다.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안티오키아를 보려고 했는데, 바라본 자가 우선 감탄하고 그후 바로 절망한 것도 이 무렵일 것이다. 오리엔트에서도, 가을엔 해도 달도 한층 빛을 더한다. 그리고 모래먼지의 방해를 받는 날이 적어서 중근동 전역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계절이다. (133)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정과, 작가 의견의 개진 방법이다. 작가는 미묘한 사실이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없는 판단지점에서 다른 역사가들의 의견을 언급하며 인정하거나, 덧붙이거나, 혹은 반대의견을 꺼내놓는다. 그것은 작가가 펼치는 객관적 역사로서의 신뢰를 강화하고, 작가의 시각을 다른 역사가들과 (간단히라도) 비교해보며 독자에게 판단의 권리를 쥐어준다. (다른 역사가들의 관점을 함께 알아보는 것은 덤으로) 어쨌든 이런 작가의 철학적, 역사적 시각으로 인한 개입은, 역사를 객관의 산물로 바라보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함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그 개입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으며, 혹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작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견해와 (현재까지 공인된)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껏 증명되고, 인정되온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더불어 작가의 시각을 받아들일것인지 말것인지는 우리의 판단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후세의 많은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을 해방한 후 유럽으로 돌아간 장수들을 영토 욕심이 없고 신앙심으로만 뭉친 기사들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책임감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앙만으로는 신앙조차 지킬 수 없는 것이 인간세상의 현실이니까. (253)
 
물론, 한참 이야기를 따라갈 당시에 시오노 나나미가 기술한 사실과 더불어 작가가 추정하는 사실들(병사들의 숫자나, 각 리더들의 행동근거)에 대해 큰 의심없이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근거로한 시대적, 종교적, 신분적 배경과, 인간 본성을 근거로한 판단에 큰 이의를 갖지도 않았다. 하지만 책을 덮고나서는, 보다 신중하고 열린 인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인간이 판단하는 사실에 대해 감히 무결점의 역사가 있겠는가. 어디에도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이란 마치 비문같은 말이다. 많은 이가 좇고있는 허상같은 결정. 시오노 나나미가 중립적인 상태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술했다고 까지는 생각치않는다. 아니, 그 누구도 그럴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가는 십자군에 대한 비판과 인정의 그 근거를 나름 균형있게 제시하려고 했다. 그녀가 펼쳐놓은 이야기 속의 인물묘사, 사건의 디테일을 완벽히 믿고 동의하든 말든, 적어도 작가가 그것을 독자가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작가가 그 경계에 대해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지점들을 세워두었으니, 판단은 독자의 몫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술자의 객관성에 관한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독자의 객관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대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넓은 이해와 견해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역할을 했다. 많은 이가 지나간 이후, 처음의 발자국은, 점차 아래에서 흐뜨러지며, 흐려진다. 그녀는 (다른 역사에 대한 접근과 저술은 별개로) 십자군 이야기의 전개에 자신의 이름을 이제 막 올렸을 뿐이다. 시대에 대한, 인간에 대한 그녀의 '판단'을, 우리가 또 즐겁게 '판단'하면 될 일 아니겠는가. 더불어, 아래 문장에서 역사의 운명을 감지한다.
 
틀루즈 백작 레몽은 ‘성스러운 창’을 계속 보관한다. 그러나 6년뒤 그가 죽은 후 이 ‘성스러운 창’은 기묘하게도 네 개로 늘어난다. 이 네 개의 ‘성스러운 창’의 행방은 이런 성유물의 운명을 무척 흥미롭게 보여준다. (211)
 
처음의 '면죄부'에 대한 조소에 가까운 시각에서부터 비롯된 이 독서는, 그 끝을 알면서도 시종일관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에, 십자군의 온갖 모습들을 떠올리고 그리는 도중에 그런 조소는 거두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한 종교에 대한 내 시각이 달라졌음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좀 더 명확히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마 그와 동시에 나는 거기서 몇걸음 물러났다. 십자군과 중세의 역사에 깊이 들어갔더니 결국 어쩔수 없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국으로의 희망, 권력, 명예, 부의 욕망, 인간적인 질투 등, 지금 여기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대부분의 성질을 발견하게 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체게바라로 시작해 쿠바의 전후 역사를 살펴본 이후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뜸했다. 최근엔 조선시대의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가, 이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접한다.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이름만 줄기차게 접했을 뿐, 로마인 이야기 한번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독자다. 더불어 다른 역사(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음으로 인해, 다른 십자군 저서와의 비교가 가능했을리도 만무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제 막 '시오노 나나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초짜 독자인 셈이다. 그런 어설픈 독자이지만, 아직 나의 판단기준은 부족하지만, 아마 앞으로의 십자군 이야기에도 주목할 것이다. 읽을것이고, 즐길것이고, 또 판단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넘어서 인간을 다시금 짚어볼 것이다. 그들의 궤적을 따라간 끝에서 결국 오늘날의 누군가와, 또 우리와 닮은 그들을 발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속에서, 현재의 사람들과 똑닮은 그들을 발견하며, 절망하고, 또 희망할 테니깐. 이미 많은 이들이 연구한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오늘날의 인간, 불멸의 속성에 대해 좀 더 나은 혜안을 가질 수 있으리란 것에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한살터울의 친척동생과 함께했던 그 몇 시간, 집에가서 처리해야할 일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받아치는 것을 관두었다. 굳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어떡할 셈인가? 하며 아직도 사회가 합의보지못한 사안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폭력적 선교활동 및 정치, 권력, 부의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이들을 거부할 뿐이지, 기도하고, 봉사하는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고, 종교적 논쟁에 일침을 가할만큼 그 종교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니깐. 어설프게 그의 말에 인정한 나에게 그는 그 자리에서, '진실된 기도를 하겠노라'고 약속하라 했다. 나는 덜컥 겁이났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했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약속할 수 없다. 거짓된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그는 이해했고, 더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마 나는 그런 생각을 햇을것이다. '언젠간 더이상 아무것도 강요하지 못하게 제대로 반박해주겠다고.' 하지만 이젠 아주 조금 달라졌음을 느낀다. 혹, 이후에 그와 함께 다시 그 얘기를 할 수 있다면 믿음의 강요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싶다. '믿어라-안믿겠다' 같은 영양가 없는 논쟁이 아닌, 내가 그에게서 발견하고, 그가 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길 바란다. 그때가 좀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나는 조금씩이라도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할 테니깐. 다시 기회가 온다면, 종교 너머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싶은 바람이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239)
 
(종교가 전부인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신을, 어떤 종교를 믿느냐는 그 사람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중세의 그들과 비교했을때, 우리는 늦게 태어난 인간들일 뿐이지, 새로 태어난 인간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시대, 그 종교뿐만이 아니라, 지구위에서의 인간을 배우고, 이야기 하고 싶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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