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게으르고 중심이 없는 편이라, 한 작가(모든 문화 예술분야의 창작자를 총칭)의 작품을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다. 어느 카테고리를 구분해놓고 '최고의 작가' 혹은 '평생 기억할 작가' 를 정해버려도, '이 작가의 작품은 모두 봐버리고 말거야!' 라는 다짐에서 멈추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실천으로 옮기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 것이다. 굳이 이유를 따져보자면,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거 아냐? 라고 말하면 뭐라 대꾸할 말은 없다만) 줏대없는 성격과 팔랑거리는 귀가 한몫 할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폭넓게 접하기엔 좋은 습관이었지만) 그럼에도, 걔중에, 어물쩡 거리며 어쩌다보니, 한 애니메이션 감독의 작품을 90% 이상 봐버린 경우가 있다. (라디오 드라마, 뮤직비디오,.. 더불어 책도빼면 좀 뺄게 많긴 한데..뭐 대충 이렇다)
바로, 신카이 마코토
어쩌다가 그의 작품 <별의 목소리>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길로 그가 만드는 빛의 향연, 색채의 마술(샤갈님 죄송;)에 푹 빠져버렸다. 어디 그것뿐이었는가, '별의 목소리'는 단편임에도, 거대한 세계관을 갖고, 또 단편답게 과감하게 많은 것들을 생략했다. 3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SF와 로맨스 장르를 아주 적절히 뒤섞음으로써, 생략된 것들이 만드는 구멍을 메운다. 어디 그뿐인가, 소년/소녀의 성장과 더불어, 타인과 맺는 관계, 외로움에 대한 고찰이 스토리 속에, 시적인 대사들 속에 녹아내린다. 게다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단은, '별의 목소리'부터 함께 작업한 텐몬이 만들어내는 음악 또한 작품의 적재적소에 투입된다. 또한 일본 작품들 특유의 일상의 발견들까지 합쳐지니, 가히 감탄스러울 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가장 돋보이게 했던, 그가 뽐낼수 있는 여러 빛과 그에 따른 색의 묘사는 그의 작품 어디에서건 찾아볼 수 있지만, 항상 일정한 퀄리티와 정성을 보여주며 모든이를 감동으로 밀어넣었다. (약간은 어색한 캐릭터 디자인도 좋다. 나는 인디음악인이 방송에 나오게 되는 것을 보며 올드팬들이 아쉬워하는 것들을 보곤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별을 쫓는 아이'를 보며 이해하겠더라)
만약 이런 퀄리티가 상업애니메이션에서 나온다면, 그저 걸작 애니메이션으로 기억되겠지만, 이것은 한 개인이 만든 애니메이션 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1인 애니메이션'(실제로 음악이나 성우들은 따로 있지만 제작에 있어서는 혼자다) 제작에 몰입하면서 내놓은 작품이 바로 '별의 목소리'인 것이다. 마치 홀로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을 몽땅 연주하는 것 같은 기적적인 능숙함을 보여준 신카이 마코토라는 존재는 거의 신격화되며,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롤모델이 되었으며,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빛과 색의 향연, 나아가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헛되지 않게 하는 감수성에 여린 스토리와 대사는 그의 매니아들을 양산시키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별의 목소리를 본 것이야, 이미 DVD 로 제작되어 나온 후의 일이라 극장에서 보진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가 구입한 첫 DVD 타이틀 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시청각 자료로 봤음에도, 구매를 결정한 것을 보면 그때 정말 푹 빠져있었던 것 같다. 학생 신분에 30분 DVD 를 이만원 가량의 가격을 주고 사는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어쨌든, 그후로 짧은 러닝 타임의 이점과, 눈을 돌릴 수 없는 영상미, 감수성을 울리는 주옥같은 대사,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들을 보기 위해 가끔씩 그것을 틀어보곤 했다. 뭐 대충 그런 와중에 군대를 간것 같다.
물론 별의 목소리에 같이 수록되어있던, 그 전작 '그와 그녀의 고양이' 또한 매우 잘 만들어진 수작이다. 5분 가량되는 러닝타임에, 실연당한 여인의 아픔과 그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고양이의 모습을 매우 감성적으로 그려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쥐뿔도 몰랐기 때문에 좋다는 생각이상으로는 안했던 것 같지만, 지금 다시 본다면... 그러고보니 이제 조금은 와닿는 작품이 되어있을 것 같다. (글 쓰고 봐야지)
어쨌든, 그 이후에 개봉한 <초속 5센티미터> 도 꽤 괜찮았다. 하지만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는 그저 그랬다. 헌데 <별의 목소리> 부터 어차피 다 컴퓨터로 시청했는데, 왜인지 점점 초기작들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이번에 개봉한 <별을 쫓는 아이>를 보게 된다.
아 이 애니메이션도 참, 할말이 많다...
들어가기에 앞서, 솔직히 캐릭터와 빛&색은 차라리 전작들이 더 나았던 것 같다. 지브리의 그것들이 떠오르는, 조금 둥글둥글 해진 캐릭터 디자인서부터, '샤쿠나 비마나' 등... 빛&색감또한 전작들의 화사하고, 아련하고, 밀도있던 것들이 고의적으로 배제된 것 아닌가 할 정도였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빛&색감 퀄리티는 여전하지만, 또 무척이나 아름다운 장면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것들이 튀지 않고 캐릭터 앞에 서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눌러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는 것. 아무래도 좀 더 빛과 색의 묘사를 밝고 눈부시게 하며, 캐릭터들을 조금 날카롭게 그려대던 스타일이 개인적으로 더 맘에 드는 것 같다. 확실히 지브리의 느낌을 받은 관객들이 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지브리와 다른 점들 또한 뚜렷하다. 결국 다시 생각해보면, 감독 특유의 성질들이 좀 배제되긴 했지만, 결국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였다. 그가 이 작품에서 변화를 시도한 것인지, 실험을 한것인진 모르겠지만, 인물간의 감정선을 애틋하게 묘사할 줄 아는 그 특유의 감수성과 연출력, 그리고 환상적인 빛의 조절과 색감은 어디 사라지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은 덜어냈다고는 하나, 영상만으로도 봐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진중하게 바라보면.. 이런저런 아쉬운 부분을 상쇄시킬만한 이야기가 존재하니깐. 신카이 마코토 & 텐몬 콤비 또한 건재하다.
줄거리
소녀 아스나는 아버지의 유품인 광석 라디오를 통해 우연히 듣게 된 신비한 음악에 매료된다. 다시 그 음악을 듣기 위해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향하던 길에 이 세상에는 없는 괴물에게 습격을 받게 되고, 슌이라는 소년이 나타나 아스나를 구해준다. 아가르타라는 먼 곳에서 왔다는 슌에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갖게 된 아스나 이튿날 다시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다시 가지만 슌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망감으로 슬퍼하던 아스나는 신임 교사 모리사키로부터 지하세계의 신화에 대해 듣게 되고 그것이 슌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한다. 슌과 꼭 닮은 신과 그를 쫓는 비밀 조직 아크엔젤의 추격 전에 휘말리게 된 아스나는 지하세계로 가는 문 앞까지 이끌려오게 되고 아크엔젤의 요원이 바로 신임교사 모리사키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소년 신은 아스나를 뒤로 하고 지하세계로 자취를 감추고 아스나는 모리사키에게 아가르타로의 모험에 동참하겠다고 말하는데!!…
감상
슌과 아스나가 괴물에게 습격받는 것을 계기로, 아크엔젤 소속의 모리사키는 계획적으로 임시 교사로 아스나의 학교에 잠입한다. 모리사키는 수업시간에 의도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려는 시도를 담은 여러 신화들을 이야기하며 아가르타의 이야기를 흘린다. 여기서 이 만화의 기본 모토가 설명된다. 몇 가지 신화들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저승의 신 하데스를 하프 솜씨로 설득해서 아내를 데려오려 했던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것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실제로 아가르타는, 스리랑카의 지하성도 아가르타 전설(아틀란티스와 비슷한 맥락의)로 존재하는 듯 보이는데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여기서는 그런 신화를 조금 바꾸어, '별이 뜨지 않는 지구' 로서의 지하세계를 일컫는다. 이하, 만화의 설정으로 계속 이야기 하자면, 모리사키는 이 아가르타 내의 '피니시 테라' 라는 곳에 이르면, 그 어떤 소원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죽은 자(아내)를 다시 소생시키려 한다. 사실 모리사키는 자신의 아내를 살릴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아가르타로 통하는 크라비스의 존재를 유일하게 알고, 쫓는 아크엔젤에 몸담고 있으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아가르타 전설에 대해 정확히 찾아보진 못했지만, 오르페우스 신화와 아가르타의 전설이 합쳐진 듯 보인다.) 그 아가르타의 문이 열리면서 이 <별을 쫓는 아이>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주목할 것은, 초기작 '별의 목소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아가르타' 의 의미가 사실 일맥상통 하는 것이다. '별의 목소리' 에서 '아가르타'는 지구보다 월등히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인으로 설명된다. 지구인들은, 아가르타 혹성에서 발견된 그들의 유적에서 기술을 얻어 문명의 진일보를 기록하지만, 그 기술은 곧 우주 함대와 로봇병기를 만드는 등 거의 아가르타 성인들을 뒤쫓기 위한 혹은 인간들끼리의 전쟁을 위한 '무기'로써 제작된다. 그리고 이윽고, 워프 항법을 이용하여 아가르타 성인들의 흔적을 뒤쫓다, 만나게 되자 당연하다는 듯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사실상 인류에게 아주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했던 아가르타 성인과의 싸움이지만, <별의 목소리>에서는 그런 것이 진지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노보루(남주인공)와 미카코(여주인공) 의 애틋한 감정선과 서로의 부재속에서 성장하는 드라마가 전면에 드러날 뿐이다. 하지만, 여기 <별을 쫓는 아이> 에서는 그것에 대한 본격적이고 진지한 성찰이 드러난다. 이것은 곧, 인류의 전쟁역사에 대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세계관이 펼쳐지는 부분이라고도 보여진다.
인류는, '케찰코아틀'이라는 고대 신에 의해 여러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끝없는 전쟁을 일으키며 살육과 파괴를 반복함으로 인해 결국 '케찰코아틀'이나 선인들마저 지하(아가르타)로 내쫓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아가르타인이 지구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별의 목소리>는 <별을 쫓는 아이>보다 한참이나 후의 일이지만, 결국 아가르타 라는 전설속 미지의 존재에 의해 문명의 진일보를 이룩하고, 그것으로 인해 또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계속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마치 모든것을 다 가지기라도 할 것 처럼,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지구를 파괴한 인간은, 결국 '생명의 부활'이라는 신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으려는 것이다. (마치 아가르타에게 상실의 아픔마저 보상받으려는 듯) 이보다 큰 주제의식으로 인해 이런 모습들은 크게 부각될만큼 언급되진 않지만, 충분히 그 비판성을 드러낸다. 아가르타든, 케찰코아틀이든, 문명의 발달을 오로지 폭력과 전쟁을 위한 것으로, 혹은 폭력과 전쟁을 위한 문명의 발달을 이룩한, 나아가 이제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려 하는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주제는 아니라 보여진다. '아가르타', <별의 목소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인류문명에 대한 판타지, 문명의 발전이 야기한, 혹은 폭력과 잔학함으로 인해 발달된 문명에 대한 성찰은 나아가, 조금 다른, 제멋대로 파괴하고 소멸에 이르게 함과 동시에 탄생까지 손을 뻗으려 하는 인간의 끝없는, 부질없는 욕심이란 맥락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어쩌면 모리사키는 그런 인간의 대표인지도 모른다.
모리사키는, 아스나와 함께 별이 하나도 없는 아가르타의 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없기 때문에 더 외롭게 느껴진다며 (혹은;; 별 하나 없는 하늘의 모습이 인간의 외로움 같다고) 인간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 한다. 대중적인 연예인들을 스타라고 표현하고, 옛 이야기에서 별이 지는 것을 보고 먼곳에 있는 사람의 운명을 짐작했듯, 별은 종종 사람을 상징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으레 말하는 스타처럼) 별은 바라볼 수만 있을 뿐 가 닿을 수 없다. 이미 저물어버린 관계나 실제로 혹은 기억속에서 소멸된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별이 없는 하늘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그리워하고 기억할 사람조차 없는 것이 외려 더 쓸쓸한 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그(모리사키)는, 그리워 할 수 있는 누군가(아내)가 있었기에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으레 '어른'이라고 부를 만한 나이가 된 이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게, 아픔의 형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것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모리사키는 실제로, (<그와 그녀의 고양이>에 등장하는 인물도 중년은 아니니깐) 신카이 마코토 작품에서 뚜렷하게 등장하지 않은 중년의 인물이다. 15년 동안 아내를 잃은 슬픔을 어딘가로 흘려보내지 못한 채, 안에서 계속해서 고여놓았던 모리사키는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으로는 (신화의)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자신의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아이같은 감성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상실의 아픔을 온전하게 이겨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떤 어른들의 모습을 대변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아픔을 견뎌내고, 나아가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을지 찾지 못한 어른(모리사키)와는 다르게 아스나는 차곡차곡 상실과 이별이 주는 감정을, 그 아픔들을 견뎌내고 이겨내는 과정을 배워간다.
모리사키처럼 분명한 목적은 아니지만, 아스나 또한 분명 슌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모호한 희망으로 아가르타에 들어섰었다. (혹은 자신의 아버지가 아가르타 인 이었기에 느끼는 일종의 회귀본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스나 또한 모리사키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슌과 닮은 신을, 신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정의 과정속에서 자연스레, 슌과 다른 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지상위에서 자신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고양이(실은 보통 고양이가 아니지만)를 두고 떠나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이별이 주는 강렬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한 존재의 소멸은, 또 곧 다른 형태의 탄생으로 혹은 탄생의 일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고 통곡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릴적에는 몰랐던, 하지만 결국 깨달아야만 하는 가슴 시린 인생의 한 과정을 말이다.
결국, 죽은 아내를 되살리겠다는 강한 신념으로 피니시 테라에 도착한 모리사키는, 신들이 타고 있다고 알려진 아가르타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선 '샤쿠나 비마나'와 마주하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아내를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소원을 빈다. 하지만 샤쿠나 비마나(곧 신-GOD)은 영혼을 담을 그릇을 요구하고 광기의 모리사키는 아스나를 그 그릇으로 바치지만, 신은 또 다른 것을 원한다. 마치 (어느 리뷰어의 말처럼) 인간을 조롱하듯이 말이다. 그 어느것을 계속해서 바친다고 해도 신의 요구는 충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의지와 자연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덧없고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었으니깐.. 신이 크라비스(열쇠)를 파괴함으로 인해, 잠시 아스나란 그릇에 담겨있던 모리사키의 아내의 영혼은 이내 다시 사라져버리지만, 모리사키는 잠시나마 아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무엇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샤쿠나 비마나-신(GOD)) 상실에 대해 오롯이 깨닫게 된다. 라틴어로 열쇠를 뜻하는 크라비스의 파괴는, 세계의 법칙을 넘으려는 열쇠는 애초에 존재해서도 안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다는 뜻으로 보여졌다.
한 인간은 다른 어떠한 인간도 대신 할 수 없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고유의,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모리사키는 자신의 아내를 잊지 못했을 것이고, 신은 아스나를 아스나로 있게 하기 위해서 크라비스를 부쉈을 것이다. 모리사키가 찾는 아내도, 죽어버린 슌도, 아무도 돌아올 수 없고,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이 또 다른 희망이 된다.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존재와 만나기도 한다는 것 말이다. 잃어버린 어떤 존재가 가지고 간, 나의 한 부분은 마치 어떤 일정한 형태를 띄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형태가 없는 상실감으로, 결국 다른 새로운 존재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채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상실된 존재를 대신해줄 수 없는 존재이기에 또 다른 가치를 지니니깐 말이다. 신이 아스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도, 그런 아스나란 존재가 갖는 고유한 가치를 알게되었기 때문 아닐까.
모리사키가 아내의 상실을 그제서야 마음속에서 흐르게 할 수 있게 되고, 신이 자신의 형인 슌의 상실을 이겨내며 아스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아스나는, 슌의 죽음을 점차 받아들이며, 죽은 아버지의 묘지에서 통곡할 수 밖에 없던 어머니의 감정을, 곧 이별과 사별의 저릿한 아픔을 배워나간다. 이 모든 인물들이 상실을 받아들이고 한뼘 성장하는 모습이야 말로, 신카이 마코토가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 아닐까.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사람을 인정하는, 가슴 아프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인생의 한 단면 말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은, 그래서 더욱 외롭다. 마치 저주처럼 외롭다. 이별을 결국 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모리사키는 이것을 인류의 저주라고 까지도 표현했다.) 엔딩곡 'hello goodbye, hello' 처럼, 인생은 헤어짐의 인사 후에 또 다른 만남의 인사를 한다. 그 어느것도 거스를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 한 사람이 빈 자리는, 결국 다른 이가 다른 모습으로 채운다. 그것이 관계이고 삶이다. 그리고 삶은,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고, 사라져간 자들의 바람이다.
<그와 그녀의 고양이>에서의 관계의 단절로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별의 목소리>의 불가항력적인 이별, <초속 5센티미터> 에서 여전한 그리움의 애틋한 감정을 보여주었으며, 이제는 한뼘 성장해 <별을 쫓는 아이>에서는 이별, 사별, 죽음, 곧 모든 상실을 어떻게 삶이 감싸안아야 하는지 보여주었다. 상실은 곧, 도망칠 수 없는 삶의 일부니깐. 모리사키라는 중년인물은 마치 그런 감독 자신의 성장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들은, 별을 쫓으려 달리지 않을 것이다. 때론, 바라보며 눈물짓는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