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프로스트 1 : 텅 빈 남자 - 시즌 1 닥터 프로스트 1
이종범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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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은 별세한 곤 사토시 감독의 애니메이션<파프리카>(소설 원작)의 오프닝 부분의 한 장면이다. 자신이 막지못한 살인의 순간에 대한 트라우마가 계속해서 꿈에 나타나는 형사는 한 여자에게서 명함을 건네받는다. 그것은, 꿈을 통해서 트라우마를 치료해주는 '파프리카' 의 명함이다. 이 환상적이고 기묘한 애니메이션의 '파프리카'와 같은 인물이 여기 또 '프로스트' 로 탄생했다. 

 

 


중학교 때 일로 기억한다. 친구 한명과 함께 연락도 없이(그때는 핸드폰을 갖고 다니지도 않았으니) 다른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그저 벨을 두드리고 문을 두드리고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밖에 생각하고 할 수 밖에 없던 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잠시 후 현관 문 아래에 있는 우유함(?)을 열어보더니, '운동화가 있는걸 보니 슬리퍼라도 신고 급하게 나간 것 같다' 라고 얘기했다. 어떻게 정황들을 보고 그렇게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하며 내게는 그 당시 적잖은 충격!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어린나이에 참 신기하기도 했었나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 이후로 추리소설을 꿰차거나 한 것까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 추리소설 혹은 추리만화는 그 독서량과 상관없이, 그러니깐 아무리 작은 부분일 지라도 학창시절에 한 요소를 이루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안읽어도, 주위에서 친구들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추리'와 '심리'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별 생각없이 본다면 이것을 쉽게 떼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분명 맞닿은 거리가 있다. 추리를 하는 것 또한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포함될 때가 있고, 심리를 통해서 추리를 하는 것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보지않고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이것들을 구분한다면 이것들은 분명한 차이점을 가진다. 추리는 물질적 증거혹은 정황증거(알리바이 등)를 통해서야만 인정받을 수 있고, 감춰진 '행동'을 찾아내는 일이지만, 심리는 (물질적 증거가 뒷받침 된다면 더 극적으로 가능하겠지만 어쨌든) 그 내담자의 행동이 없다고 해도 그가 말하고 느끼는 것을 살펴봄으로써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추리는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 이지만, 심리는 한 인간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나름대로 이렇게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것도 말에 따라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적확하고 전문적인 해석은 말 그대로 '전문가'들의 일이라고 제쳐두면, 다시 혼란에 빠지기 쉽상이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마디로 '만화 논문' 이랄까. 

 

 

그럼 이 만화책은 대체 뭔가? 이 만화책은 분명 두가지 요소를 다 함께 가지고 있다. 심리 라는 것은 자칫 섣불리 전문적으로 접근했다가는 굉장히 루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 심리학을 전공한 작가가 '실제 심리학과는 인간의 뇌에 관한 이해부터 시작하여 신비롭기보다는 딱딱한, 과학시간 같은 느낌의 수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에 덧붙여 '학년이 올라가고 개론서를 넘어면 왜 그런 내용들이 필요한지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전공을 바꾼 학생들은 알 수 없는 재미가 기다리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마치 이 책은, 그 딱딱한 과정을 지나서야만 만날 수 있는 심리학의 '재미'를 보여주는 만화이기도 한 동시에, 누군가가 이 만화를 통해서 전문적인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이전에 만나는 즐거운 흥미붙이기 과정, 즉 '딱딱한, 과학시간 같은 과정'을 '말랑말랑한 미술시간' 처럼 쉽게 맛볼 수 있는 형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래, 이 만화는 '심리학에 대한 시식'과 같다! (시식코너에서 먹는 음식맛이 비할 수 없이 인상적이란 것은 다들 공감 하지 않는가?)

 

1952년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고든 엑스너는 자신의 가장 유명했던 논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 지구상에 사람들이 60억 명 있다면 그들의 심리상태와 기질, 성격은 전부 달라서 전부 60억 가지의 심리와 성격, 기질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고든 엑스너는 죽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논문에서 말을 바꿔 이렇게 끝맺었다. '그건 사실, '한 사람' 에 대한 60억 가지 표현일 뿐이다.'

 

우리는 인간이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인간은 누구나 똑같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이라는 것 또한 존재할 수 있고, 심리학이란 학문 또한 계속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초반에 실린 이 인용구에서 우선 정신이 퍼뜩 든다. 모두가 다른 듯, 다른 표현을 쓰지만, 결국 한 길로 통한다는 것!

 


바에 들어온 커플 중 여자는 벽지의 문양을 보고 가면을 보았다고 했고, 나는 대략 악마나 사람과 같은 형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전문적인 테스트'에 쫄아버린 나는, 중간중간 이렇게 본편의 요소들을 세부적으로 설명한 페이지에서 이 문양이 만화에 의해서 '수정'되었음을 알고서 안심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만나는 심리학 지식들의 재미도 쏠쏠하다. 분량도 부담없고 말이다.

 

 

'Mirror'라는 바 안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백발의 젊은 남자는 손님으로 온 커플 중 여자가 사라지자 남자에게 조언을 던진다. 여자가 사라지기전까지 그녀가 보냈던 무의식중의 수많은 신호들을 말이다. 추리적인 요소들로 시작하는 이 만화속에서 그가 바로 주인공인 '프로스트 교수' 다. 그는 곧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임상심리학자이자 용강대 문과대학의 학과장인 천상원 교수에 의해서 용강대학교 심리학과 정교수로 스카웃되지만 우선은 그의 바텐더 이력때문에 상담실에서 일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심리학의 인식처럼, 한가한 그곳에 바텐더에서 조언을 던져주었던 남자가 다시 찾아온다. 겉으로 보기엔 모자란 것 없어보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은 '자기애성 성격장애' 를 가진 그 남자의 심리를 파헤치고 그것을 치료하는것이 '닥터 프로스트'의 첫 임무다!

 

굴뚝청소를 하고 내려온 두 아이 중 얼굴이 더러운 아이와 깨끗한 아이가 있다. 이 둘중에 누가 먼저 얼굴을 씻을까 라는 질문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탈무드에 언급되는 유명한 일화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프로스트 교수의 지론 중 하나인듯 싶다. 그래서 그는 내담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의 가택에 '무담침입'을 시도하고, 그것을 통해서 내담자가 언제, 어떻게, 어떤 잘못된 거울을 들여다봄으로써 지금의 마음을 형성했고, 그로인해서 계속해서 어떤 거울을 찾으며 방황하는지 들려준다.

 

'모든 공간은 머무는 사람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보여준다'

내 방을 돌아보게 해준 촌철살인의 한마디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한편의 상담사례가 극적구조를 통해서 만화로 탄생했다. 이 만화는 추리와 심리의 경계에 있다. 내담자의 안에 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표면적으로는 (작가의 고백대로) 많은 부분이 추리의 과정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동시에 전문적 심리학적인 측면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돋보이는 점은, 그것을 대사나 지문을 통해서 '한꺼번에 열거'하는 형식이 아닌, 이야기 중간중간에 적절히 배치해놓음으로써 독자가 자연스럽게 심리학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지루함 없이 따라가게 할 수 있게 한 데에 있다. (좀 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중간중간 한페이지 분량으로 요약되어 있는데 이 또한 딱딱하지 않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내담자의 심리에 솔직히 많은 공감은 되지 않는다. 그는 나보다 너무 많은 것들을 갖고 있으니깐(돈, 차, 집 기타 등등.. OTL.. ) 하지만 고백하건데 화장실 거울을 통해서 (허경환 버젼의) '이정도 생겼으면 ~ ... ' 하는 생각을 한번쯤 가져본 (평범하다고 우기고 싶은) 1인으로써 '나르시시즘'은 10g쯤 공감은 한다. 사실 돈이 많든 적든 이정도의 '나르시시즘'은 공감할 수 있지 않겠는가?(솔직해지자!) 사실 생각해보면, 별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도 어느부분엔가 뒤틀려서 지금 우리가 결핍한 어떠한 것을 구성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정상 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위험하고 오만한 우리의 인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깐.

 

방어와 회피가 무너지고 내담자가 마음을 여는 과정에서 우리는 백프로 같지않더라도 대부분은 조금이라도 겪을 그런 강요와 요구로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을, 많은것들이 결핍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사회적인 측면에서 나와 많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상담자의 과거 '관계를 형성하는 슬픈 패턴'은 누구에라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그것을 맞닥뜨리는 프로스트 교수의 치료는 사실 굉장히 사회성이 포함된 문제들을 불가피하게 그의 소임인 심리학 분야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셈이다. 사회적 혹은 고질적 문제가 어느정도 베이스가 되는 만큼 우리 또한 완벽하게 다르다고 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었고 우리 스스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찾아주는 프로스트의 이야기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제때에 감정을 나누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해서 타인에게 그것을 찾으려고 안달하는 내담자의 모습이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지는 것은 아닌, 혹은 멀리 떨어저 있지 않은 주변인들의 모습은 아닐까.


왜곡된 과거로 인해서 리얼리즘에 입각한 이야기와 조금은 독특한 (속을 알수 없어 답답해 보일만한 표정의) - 회의적인 캐릭터(프로스트 박사)는 어쩌면 심리학에 대한 어떤 신비함없이 접근하는 인물의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특히나 책의 뒤에 수록된 '부록' 에서 보여지는 프로스트 교수의 내면에 대한 맛뵈기는 어딘가 부정적이고(심지어 졸려보이는) 캐릭터에 대한 근거를 언뜻 짐작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보면, 이후의 펼쳐질 내담자들의 상담사례 뿐만이 아니라 '프로스트 그 자신의 심리'에 대해서도 무척 궁금해지게끔 만든다. 프로스트 박사의 내면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짧은 부록과, 그 실명에 대한 SD의 네컷 만화는 충분히 그 부록으로써의 역할 이상을 한다.

 

내용에서 언급하는 성질(상담자에 대한 심리적 퍼즐)들을 컷구성에까지

적용하며 그것들을 좀 더 뚜렷하게 받아들이게 연출한 부분들


이 만화를 통해서 심리학이 뭔지 정확히 알았다는, 알려는 성급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에 대한 흥미를 줄 수 있는 만화이지, 어줍잖게 심리학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만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가장 서두에서 '우리는 돈, 건강, 집의 구조, 교육, 심지어 배우자의 선택 까지도 전문가에게 맡기고 있는데,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우리의 정신-마음은 그동안 우리에게서 얼마나 홀대 받았는가. 정신과 라고 한다면 마치 미친사람들만 가는 것으로 생각하듯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상식으로 생각했던 모습들이 과연 얼마나 실제적으로 존재하는가? 이것은 거의 '반쯤' 미쳤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우리는 무균실에 있는 것처럼 '정상'일까? 그렇다면 '정상'의 기준은 뭘까? 어떤 정신이든, 마음이든, 심리든 일정이상의 오염은 있다. 다만 그것이 일상을, 삶을 좌우하느냐 아니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마음이 아프면 당연히 '마음에 맞는 병원'에 가야 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만화는 그 이야기를 '이야기'로써 '재미'로 풀고 있다.


인간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도 심리학자들의 편의를 위해 그런것일수도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각각의 인간에게 매번 다른 방식으로 치료를 한다면 그것은 학문에 의거한 치료가 아닌 그저 만남의 하나일뿐 일 것이다. 수많은 병이 있지만 결국 분류될 수 있고 많은사람들을 만나도 그것이 어떤 고유한 그룹으로 묶여질수도 있듯이 말이다. 프로스트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본능적으로 찾고 채워가려고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만화를 만나고자 함은. 만난 것은 무엇을 채우기 위해서 였겠는가.

 

조교인 윤성아의 안내와 실제 책 사이에 꽂혀있는 닥터 프로스트의 명함.

이 충돌이 주는 기묘한 느낌이 내 뒷통수를 쳤다. 머스트 해브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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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하라 - 박노자, 처음으로 말 걸다
박노자.지승호 지음 / 꾸리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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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좌파란 말이 매우 거북스럽다. 내가 아는 좌파란, 북한과 소련과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며, 그것은 곧 공산주의를 통해 몰락한, 그리고 언젠가 몰락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주체사상과 세습독재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깐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자세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좌파란 말을 거북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소위) 보수라고 칭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현 정권, 집권당에 대한 반대를 비난하며 항상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바로 좌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좌파가 마치 이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할 불순물처럼 갖다대며 모든 의견들을 '빨강색'으로 통일시킨다. 내가 거기에 속으로 반박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나는 좌파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닥 관심도 없다 (이것은 당연히 자랑이 아닌 솔직한 내 생각일 뿐) 그저 현재의 정치와 사회가 잘못되어있다고 생각할 뿐이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기 위해 최소한 지금 너희들은 '최악'이라고 생각할 뿐이며, 그래서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차선책인 진보를 선택한다. 그러니 나를 북한과 연결짓지 마라.' 나는 늘 북한군과 북한 노동당 그리고 북한주민을 나눠서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들이 항상 결부시키려고 하는 지점은 북한의 온갖 악폐습과 직접적 군사위협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전쟁전후의 세대나, 직후의 세대들에게 전쟁은 생각하기도 싫은 살육과 고통, 가난의 시대였을테니 사실상 보수세력과 보수언론들이 끊임없이 북한을 들먹이며 소위'물타기'를 시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네들이 본다면 우리처럼 북한에 대해서 '일정이상 옹호적인' 태도를 지닌 젊은 이들은, 휴전이 오래되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해서 안보의식이 형편없는, 걱정되는 젊은이들일 뿐이니깐. 하지만 정말 좌파란 이념은 정말 이제는 북한에서 조금 떨어뜨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먼저 언급되진 않지만,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좌파의 단어를 보수들이 생각하는,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방어하며 역설적으로 인정하게 되어버리는 북한과의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박노자는 좌파라는 말을 북한이나 소련 등 '왜곡된 형태의' 좌파, 실패한 사회주의 와 벗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짧게는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고, 길게는 진정한 좌파는 그런 좁은 의미가 아님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그렇게 왜곡되고 잘못되어진 좌파,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한 예에서,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이야기 한다. 이것만으로도 일단 수확이다. 좌파란 단어는, 이 나라의 보수들이 늘 그렇듯, 그런 왜곡되고 오용된 나라에서 찾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설령 그 예에서 좌파의 성향이 포함되있긴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좌파성향의 일부가 공유되는것일 뿐이지 그 형태와 지향점에서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논리는 당연히 현재 한국사회에서 좌파=진보 라고 인식되는 많은 스타급 정치인과 방송인들을 다시금 살펴본다. 처음엔 특히나 그런 것들이 많이 불편하다. 앞서 서두에 언급한, 내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이라고 선택하려하는 이들을 다 까고나면 도대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나는 실현가능한 변화의 인물에 집중하고 있는데, 아무리봐도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인물들에 기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좀 더 읽다보면, 좀 더 생각하다보면, 좀 더 들여다 보면, 박노자는 (물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옳다면 그럴때도 있었지만) 그들을 부정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과 지향적인 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진보의 대표적 정치인이나 언론, 방송인)의 현재 태도와 행보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박노자는 대통령이 바뀌면, 정권이 바뀌면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되리라 믿는 우리의 망상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나아가 박노자의 분석은, 한국 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의 정치성향, 유권자들의 성향의 근거를 분석하며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유럽의 사례들과 비교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그것이 곧 진정한 좌파의 길임을 역설한다. 그의 꿈은 타협적인 진보도 아니고, 소위 '북한or소련'스러운 체제도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신자유주의 와 자본주의의 폐단이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기득권의 보수를 찍는 것도, 타협적인 진보를 찍는 것도 아니였다. 박노자가 말하고자 함은, 마치 민주주의의 힘이 오로지 그것인 마냥 부상한 투표가 아닌 그것을 뛰어넘는 자발적 참여와 연대를 통한, 이 사회의 '개혁' 이다. 정치참여로는 결국 한계가 있으며, 지금껏 많은 문제들이 그것을 증명해왔다. 우리가 정말 열어야 할 지점은, 사회구조의 개혁이다. 결국 좌파들이 저지른 스스로의 여러 잘잘못과 환경적 요인들, 그리고 그에 따른 시민들의 조금 섣부른 외면으로 인해서, 지지 받는 보수와 지지받는 진보 양자 택일만이 계속해서 화두로 여겨지는 경우 우리의 미래는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게 박노자의 생각 아닐까.

 

솔직히, 좀 불편했다. 서두 및 중간에도 언급했지만, 내 정치적 성향과 일정부분 같지만 또  일정부분 다른 다르며, 내가 옹호하는 현상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도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대체 그래서 어쩌란 건지' 란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럼에도 박노자의 이야기는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현재의 체제와 정치현실, 사회의 모순을 매우 날카롭게 풀어낸다. 특히나 어떤 특정 학문에 구애받지 않음으로써 당연히 한계를 긋지 않으며, 그로인해서 무척이나 확장된 시야를 갖고, 나아가 더 넓은 가능성을 심어준다.

 

아직 좌파가 무엇인지는 완벽히 정리가 되진 않는다. 어떻게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인지도 완벽히 정리되진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이제는 더이상 '좌파'란 수식을 마치 실패와 전쟁의 색(色)처럼 불러대는 이들에게 주눅들지 않을 것이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틀린' 용어로 우리를 조롱함에도, 우리가 그 뜻이 추구하는 '진짜'를 알고 있는 한 의기소침해질 필요가 없다. '그래 나 좌파다!' 하고 떳떳하게 외치기 위해서 내게 남은 숙제는, 누군가 내게 왜 좌파를 지지하느냐 라고 말할 때 명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좀 더 체계화된 정리이며, 내가 하나의 정말 잘 정의된 좌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 수많은 편견과, 의도적으로 왜곡된 색깔론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테지만, 세상은 항상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가능으로 바뀌었다고 얘기한 박노자 처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왜곡된 사회주의를 넘어서서, 우리가 진정 꿈꿀 수 있는 - 진정한 좌파가 꿈꾸는 더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고 싶다.

 

'좌,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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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만화 구두 세트 - 전4권
박윤영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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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인간을 정신적, 신체적으로 유지시켜주는 '사랑' 이라는 개념을 인류가 처음 정립하기도 전에 이미 사랑은 흔한 이야기였을 테고, 지금도 흔한 이야기이며, 앞으로도 흔한 이야기일 것이다. 문학, 음악, 영화 그 어느것에서든 '사랑 이야기' 를 빼놓을 순 없다. 반복에 대해 금방 싫증을 내는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대해 이토록 꾸준하고, 끊임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걸까. 근원적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필연적인 이유는 단순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여전히, 끊임없이, 쭉, 다시 또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멀리 떨어질 순 있을지언정, 결코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그 소중한 감정이, 바로 '사랑' 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 했었거나, 하고 있거나, 앞으로 하게 될 것,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 이니깐

 

사랑을 원하지 않은 사람은, 그 감정을 모르는 사람뿐 아닐까. 한번 그 감정을 넘어온 삶은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미뤄둔다고는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사랑'. 난 그렇게 생각한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결국은, 이전보다 덜 아프고 좀 더 안정적인 사랑을 원할 뿐 아닐까.

 

 

 

내가 좀 더 사랑하면 되지. 뭐, 가끔씩은 훨씬 많이?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예술가에게는 muse로 일컬어 질만큼,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창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누군가는 사랑을 이야기 하기 위해 상업 속으로 뛰어들어 사람들과 만나고, 누군가는 상업속에서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중에서 어떤 것들은 사랑받고 인정 받는 작품이 되는 반면에, 어떤 것은 별볼일 없는 작품으로 치부된다. 물론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언뜻 보기엔 '재미'다. 어느것이든, '재미'없이는 선전하기 힘들다. 평가와는 또 별개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지하든 아니든, 그 재미보다 더 우리에게 오래도록 남는 소통의 과정은 바로 '공감' 이 아닐까. 사랑은 모든 것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다. 어떤 행동또한 내면에서의 태풍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일 뿐이다.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랑의 감정'에 우리가 공감 하느냐 아니냐.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느냐 아니냐가 된다.

 

 

"사실 난... 잊은 것도 아니고 정리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뎌진 것도 아니고 그때의 기억을 그대로 토막낸 채 묻어뒀던 거다. 스스로를 치유할 자신이 없어서... 피가 철철 흐르는 모양 그대로... 내 안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뒀던 거다. 그리고 그 애를 잊는 대신 그 상처를 묻어뒀단 사실을 잊고 살았다." (16)

 

 

'사랑'에 대해 이토록 생생하게 현실적이면서도,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흔하진 않은 것 같다. 이 만화가 그다지 특별하다고 말할 순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여를 불문하고(아무래도 여자들이 더) 이들의 '사랑의 감정' 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 이다. 박윤영 작가가, 사람을 위해 사랑을 이야기 하는지, 사랑을 이야기 하기 위해 사람과 만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작가가 가진 감정없이 우리의 감정을 설득시킬 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 뿐.

 

 

 

 

 

 

 

 

이 이야기는... 

 

 

 

 

 

보다 보니 계속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좋아지고, 그래서, 그 짝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는 출장에서 예쁘게 꾸미고 싶어하는 여자, 지후. 잡지에서 우연히 본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려면 2cm 더 높은 구두를 신어라' 고 하는 기사를 읽고는, 현관에서의 단 한순간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

 

 

 

 

 

 

그녀가 좋아하는 태수는 그의 직장 상사이자, 이제는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남자다. 마치 친절한 바람둥이 같게도 보여지는 그는 (자세히 언급 되진 않지만) 더이상 사랑에 모든 것을 쏟아낼 자신이 없어하는 남자다. 처음엔 사랑한번 못해본 여자처럼 순수하고 조금은 바보같기도 한 지후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호감으로 접근했다가, 서서히 지후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오랜 시간동안 짝사랑 하고 있던 같은 직장의 임주임 과, 뒤늦게서야 지후의 사랑을 깨닫고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지후의 첫사랑 연호. 이 넷 사이에 펼쳐지는 미묘하고 복잡한, 아프고도 달콤한 사랑이야기가 바로 이 <여자만화 구두> 다.

 

1권 말미에 수록되어있는 짧은 글인 <여자와 구두, 네버엔딩 스토리> 에서 보면 구두에 대한 여자의 입장은 참 복잡하면서도 단순하다. 표면적으로는 남성에게 좀 더 예뻐보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면서, 반면에 좋아하는 남성에게 '연락처'와 같은 장치로써 예전부터 상징되어 왔던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또 구두를 통해 남여가 이어지는 이야기가 전세계 500여 종이나 있다고 하니, 구두란 것은 단순히 미적인 차원을 넘어, 어떤 브릿지와 같은 셈이다. 마지막 부분에, 구두와 사람의 조합을 '짝'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사랑은 한 사람만으로 완전해질 수 없다'는 의미를 찾는 것을 통해서 구두와 사랑의 상관 관계를 한번 더 짚고 넘어갈 수 있다.

 

 

 

아무도 안 만나고 관심도 없고

진짜 말라 비틀어졌다고.

 

 

지후에게 구두란, 좋아하는 사람앞에서 자신을 더 내어 주는 것이다. 특히나 꾸미는데 서툰 지후가, 더 높은 힐을 신는 것은, 약간이라도 더 큰 고통을 감내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예쁜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러니깐 그것은 자신이 양보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늘리고, 그렇게 덜어낸 자신안에 사랑을 채워가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후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후의 마음은 복잡하다. 태수와 점점 가까워지면서도, 과거에 오랫동안 사랑하면서도, 결국 그 상대방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괴로움으로 많은 것들이 두렵기만 하다. 자신이 또 그때처럼 상처받는건 아닐지, 또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거기엔 첫사랑이었던 연호와, 태수와 친하게 지내는 임주임의 존재가 지후를 더 혼란스럽고 답답하게 만든다.

  

아픈 과거때문에 많은 것들이 조심스럽고, 두려운 지후가 그럼에도 보고싶어서 밤중에 택시를 잡아 찾아갈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때문에 또 두려워하는 나날들 속에서 무척이나 섬세하게 그려지는 '감정'은 깊은 공감과 몰입을 자아낸다. 더불어, 반대에 입장에 놓여있거나 혹은 비슷한 심리를 가진 인물들인 연호, 임주임, 태수와 같은 주연 캐릭터의 심리를 통해서, 그리고 지후의 절친한 친구인 수영과 같은 조연 캐릭터를 통해서 사랑에 관한 더욱더 많은 감정들을 이야기 함으로써, 다양한 감정을 체험하고, 돌아보게끔 해준다.

 

특히, 2권과 4권에 실린 외전 중, 2권 끝에 실린 외전1 '지후와 연호, 그 전의 이야기' 는 지후가 첫사랑인 연호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현재의 지후가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슬픔과 혼란을 겪고서야 비로소 지금만큼 될 수 있었는지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낸 부분이다. 그동안 결국 스스로 버텨왔어야 하는 감정의 부분에 있어서 이 부분의 묘사는 어쩌면, 이 만화에 있어 가장 높은 감정의 밀도를 보여주는 부분일지도 모른다고 본다.

 

난. 누군가를 그토록 좋아하는 일을.

그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주변인들의 도움과 그들 자신의 사랑과 지혜 덕분에 앞서 말한 것처럼, 어쩌면 결말이 놀랍지 않을수도 있다. 독자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바로 이 만화의 결말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이 책은 특별하다. 페이지는 쉽게 넘어가지만, 문득 문득 그 행동을 길게 멈추게 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그 사이사이에서 나는 지나온 시간들을 쉼없이 돌아보고 또 돌아봤으니깐. (내가 남자이기에 공감의 방향이 같진 않겠지만 말이다.)

 

구두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깐, 좋아하는 이성에게 잘 보이기위한 구두가 -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다시금 다른 '구두의 모습 - 사랑의 감정' 으로 그녀에게 도착할 것이다.

 

 

 

 

 

 

<여자만화 구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

 

 

다시 또 누굴 그렇게 좋아할 수 있고,

또 안좋아할 수 있다는게... 반복하니까 우습잖아.. 

그냥, 누굴 좋아하는 거 내가 만든 환상 같은게 아닐까

 

 

여자만화를 남자가 봐야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다. 바로 이것을 보고 여자가 '공감'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충해서는, 여자들의 심리와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라는 어려운 과정을 넘어보는 시도는 일련의 '노력' 들이 필요하다. 필요한 수 많은 노력들 중에 만화책 한권 읽는 그 노력이 어렵다고 할 사람은 없을 터.

 

 

이 책을 읽을 적잖은 남자들은 어쩌면, 사랑할 그때에 항상 최선을 다해왔던 똑똑한 남자가 아니라면야, 이 만화속 어딘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던 그녀들의 수많은 감정들. 어쩌면 단순함에도, 바보처럼 알지 못했던 감정들과 함께.

 

적어도 나 때문에 싫은 걸 참지 말고, 억지로 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사실, 제목에서부터 밝혔 듯, 대놓고 여자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건 맞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그러지 말아야 할' 남자의 모습과, '그래야 할' 남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만약 양쪽 어딘가에 속해있다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양쪽도 아니라면, 싼 값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 지 배우는 셈이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여성판타지적 인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이 만화가 '이런 남자가 되라' 라고 말하진 않는다. 다만 '이런 남자라면' 여자들은 이렇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긍정, 부정의 결과를 낳기도 하고, 그에 따라 자신도 행복하거나 아플 수 있다.' 란 것을 지후를 비롯한 여러 캐릭터들을 통해서 직접적, 혹은 반사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거나, 하다못해 여자의 감성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는 매우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심리학 책이나 여자에 대한 연구는 아니기 때문에 그럴 목적으로 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다만 그런 점도 있다는 것 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결국, 모두의 사랑 이야기

 

 

 

어떻게 보면 참 신기하다. 분명히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환경, 다른 사람과, 다른 모양의 사랑을 했을텐데, 한 가지 이야기에 공감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의 외부의 모습이 아니라, 그 안의 어떤 감정이기 때문인 것 아닐까. 나는 남자인데다가, <여자만화 구두>에 나오는 것과 판박이처럼 똑같은 경험도 아니면서도, 그 감정의 모양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곳에서, 나를 돌아봤고, 어떤 곳에서 누군가를 돌아봤다. 사실, 이 만화를 읽는 시간 내내 살아온 모든 시간을 돌아보고, 살아갈 어떤 시간을 기대해 본게 맞다. 그것은 분명 내가 아니라도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이 만화가 내게 준 감정에 대한 '공감'의 힘은 무척 강력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애써 '남여' 혹은 '여남'을 구분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아직 아픈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여자가,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와 만나, 정말로 사랑이 사랑스러워 지기까지의 서러움과 눈물, 기쁨과 낭만의 나날을 보내는 한달여의 짧은 과정,

그러니깐, 연애에 있어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 선명하게 기억하는 그런 부분들, 아직 서투르고 어설프고 알아가지만, 그만큼, 상대의 모든 것을 간직하고픈 시간들이 유리처럼 반짝거리며 이 책 안에 녹아들어 있다.

 

저 사람과 함께라면 내 과거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오게 될 거라는 

 

 

옛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아파하고, 그리고 또 새 사랑으로 가슴 설레어 하는 지후의 모습에서,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자신이 품고있는 지난날의 열병을 조금이라도 이해받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마음을 향해 또 설레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만화를 많이 읽는 편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감히 말하자면, 이 <여자만화 구두>는 내가 지금껏 만화를 읽고선, '조금이라도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준 최초의 만화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제 운명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세상 어딘가엔 꼭. 반드시. 반드시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결국은 서로 사랑하게 될 그런 두 사람이. (316)

 

 

>

 

 

마지막으로, 이 쓸데없이 길게 늘어놓은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이 만화를 보는 순간, 그 누구라도,

사랑, 연애, 결혼, 구분없이 무언가는 하나 하고 싶어 근질이 날것이다.

그러니까 다 필요없고, 아니 딱 필요한건, 고만 전전긍긍 하고,

 

 

 

 

이 만화를 덮는 순간, 누가 말려도, 절로 그러고 싶어질 테니!

 

사실 이 <여자만화 구두>는 정말로.. '본격, 연애 권장 만화'

(이미 하고 있는 분은... 범사에 감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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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서재 - 최재천 교수와 함께 떠나는 꿈과 지식의 탐험 우리 시대 아이콘의 서재 1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 본 이 <과학자의 서재>제목에 대한 느낌은 언뜻 보기에, (아주 창피할만큼 단순하게도) '과학분야에 국한된 책 소개가 주된 주제가 아닐까' 하는 편견아닌 편견. 책을 읽기 시작하다 보니, 그것도 참 쓸데업는 기후에 불과했던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단 서재라는 책의 제목에서 조금 떨어져 보자. 실제로, '책을 추천하는 책'은 참 많기도 할 것이다. 내가 알고있거나, 혹은 갖고 있는 책만해도 벌써 몇권은 되니, 내가 모르는 세상에 그 많은 책들 중 '책을 소개하는 책'들이 오죽하겠는가. 물론 이 책의 말미엔 저자인 최재천이 소개하는 몇권의 책이 언급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책들도 직,간접적으로 언급되긴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어불성설인듯 싶다. 이 책은, 책을, 그리고 자연을 사랑했던 한 소년이 특별한 과학자로 성장해가는 성장담이다.

 

누가 보면 궁색한 과거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책 과 사람을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것은 군대 훈련소 때다. 생소한 모든 것, 내일, 혹은 잠시 후도 알 수 없는 순간순간, 그동안 해왔던 많은 것들, 정확히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통제되고 금지되고, 남은 것은, 하기 싫거나, 할줄 모르는 것들만을 남겨두었던 그때다. 아마 훈련소 입소식이 아니었을까. '이들과 함께 과연, 더 큰 소리를 낼 수는 있는걸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계속해서 예행연습을 하면서 소위 말하는 '군기'가 바짝 들어갔던 그때는, 실제 입소식 때 주먹을 쥔 손에 너무 힘이들어가서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헌데, 그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은 그때 훈련소대 대대장이 해줬던 짧은 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충 기억하기론 '다들 책을 읽을 텐데, 한 사람이 살아가는 역사는 한권의 책과 같다는 것, 즉 여러분 주변에 있는 전우들 이나 조교들 혹은 간부들 모두가 하나의 책과 같으니 많은 것들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배우라' 는 말이었던 듯 싶다. 많은 시간이 지난 이야기라 내가 어떤 말을 빼고, 어떤 말을 더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그나마 좋은 축에 속하는 기억으로 간직하니, 미화했을 확률은 많겠다) 그때의 훈련소가 얼마나 부조리 했든, 군생활이 어땠든 간에 상관없이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니깐.

 

자, 우리가 들고있는, 종이로 되있는 종이책, 혹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태블릿PC 나 스마트폰 등으로 보는 E-BOOK 이 갖고 있는 책의 개념을 잠시만 내려놓자.

 

 

한권의 책으로 분한 그의 삶을 따라가보자!

 

 

마치 가까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듯, 따뜻하고 부드럽고, 솔직한 그의 입담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도 하거니와, 딱딱하지 않게 설명해주는 옛날이야기와 같은 그의 이야기는,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 한다. 또한, 성인 독자뿐만 아니라 청소년 독자또한 고려한 듯한 (보통의 소설보다) 좀 더 넉넉한 줄간격은 편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기본적으로 독서는 내가 즐겁기 때문에 하지만, 때로는 곤욕이 될 때도 있는 반면에, 한 과학자의 삶을 '들어보는' 이 책은 마음 편하기만 하다. 그가 고향인 강릉에서 느꼈던 어릴적의 '편안함' 과 '그리움'만은 못할지라도 말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중학교부터 시험을 봐서 들어가던 시절, 대다수가 이제 동등하게 대졸이고, 그래서 자격증에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지금 세대와는 다르게, 공부를 잘하고, 일류대를 나오는 것이 곧 최고의 성공이라고 일컬어졌던 그 시대에 육군 간부의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그때의 어머니의 교육열과 (시대가 변해도 교육열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듯 하니 가타부타 긴말 할 필요는 없겠다.) 아버지의 발령으로 인한 이유로 서울로 전학오게 된다. 중학교부터 시험 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대학입시와 이어져 있기에, 저자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과외도 잠깐 받아가며 공부를 하게 된다. 공부는 썩 잘하는 편이었지만, 본디 자연에서 노는 것을 좋아해서, 초,중,고등학생 동안그는 방학때마다 강릉에 내려가 자연을 벗삼아 놀았고, 서울에 있을 때도 남산에 올라가서 친구와 함께 시를 쓰며 놀기도 했단다.

 

하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강릉에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안의 남는 시간에 읽었던 책들이다. 물론 무슨 책을 읽었느냐는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얼마나 책을 사랑했었는지는 중요한 사실 같다. 온갖 다양한 것들이 담겨있는 '백과사전'에 엄청난 흥미를 느끼고 접했던 그의 책과의 인연은 '동화전집'으로 이어진다. 그것들이 그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나아가, 자연과 한데 어울리길 좋아했던 그는, 그런 감수성 때문인지, 중학교 때 충동적으로 친구따라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詩)를 통해 장원을 하게 되면서 시인을 꿈꾸게 되기도 하고, 고등학교때는 미술선생님에게 스카웃되서 미술반에 들기도 한다. 그리고 '노오벨상수상전집' 을 통해, 어렴풋하게 과학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이야기가 길게 풀어져 버렸다. 어쨌든 중요한 요는, 소싯적부터 '자연을 벗삼아' 놀며 시 와,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좋아하며, 그러니깐, 기성세대가 본다면 소위 그냥 '놀기 좋아하는' 아이였던 그가 처음부터 과학자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위에 설명한, 그가 기술한 삶의 반정도 되는 대학입시 무렵까지 그는 시, 소설, 미술, 등 꽤 다른 분야에서 많은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의 모습과 언뜻 닮기도 하면서도, 또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그의 방황은 계속된다. 전공분야는 있었지만, 거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그 계열에서 그가 자신의 진로를 명확히 결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데에, 여전히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길을 인도해준 것은 '한권의 책' 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이고, 그 일화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은 내게 생물학이 그저 흰 가운을 입고 세포나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파헤치고 철학을 논할 수 있는 학문이란 걸 알려줬다. 그 책은 내게 생물학에 몸바쳐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155p

 

내가 그의 삶의 태도 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나는 무엇을 할 사람'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태도다. 그것이 어떤 확고한 삶에 대한 의지와 자세로 이어지고, 나아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멋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삶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제약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꿈꾸던 것이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시인이 될 사람' 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지금 과학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때의 감수성, 언젠가의 철학적 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차가운 증명과 무한실험'에 그치는 과학자가 아닌, 감성 풍부하고 철학적이고, 마음 따뜻한 과학자가 된 것이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많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했고, 그런 순간순간들은 책이 길을 가르쳐준, 혹은 책을 통해서 바뀌게된 태도가 많이 눈에 띤다. 하지만 내게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어떤 구불구불하고 불확실한 길을 걸으면서 방황하고 또 방황하며, 머뭇거리다가도 달리고 마는,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이었다. 지금의 내가 그런 길 위에 서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렇게 자신만의 삶을 찾은 저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멋졌다. '최재천 이라는 책'을 읽어보니, 정말로 과학과 사회,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통찰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의 다른 저서도 얼른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 만약, 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실패'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쩌면 거기서, 우리가 꿈꿔오던 꿈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거기에는 어떤 '각성'이 필요하고, 또한 그 각성이 그저 자신에 대한 '위로'로 여겨지면 안될 것이다. 길을 찾는데 책이 전부는 아니지만, 또 책이 아닌것도 아니다. 어떤 한권의 책을 '잘' 만나는 것은 가장 저렴한 대가를 통해 삶을 바꾸는 일이 아니겠는가!?

 

저자인 최재천이 풀어놓는 아주 솔직한 삶의 애환과 방황을 통해서, 삶에 대해 조금은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꿈을 찾으며 방황하던 그의 나날, 그리고 선택의 연속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을 바꾼 요소요소에 있는 몇권의 책들, 그리고 그가 추천해준 몇권의 책들을 꼭 한번 읽어봐야 겠다. (신문에서 서평을 쓰기도 했던 그의 경력대로, 소개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 또한 아주 재미나다) 읽다보면 언젠가는, 내게도 그런 책들이 있겠지. 어쩌면, 한권의 책들에서 느꼈던 작은 울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과 더불어 책과 같은 사람, 어느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치열하게 읽고, 치열하게 방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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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이재익 장편소설
이재익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타 지역에 살던 여학생을 속여서 불러와, 일년동안 구타 및 집단 성폭행, 학대 등.. 인간이 입에 담는것이 민망할 정도일때 머뭇거리는 일들을 자행해왔다. 무려 41명이나 되는 이들이 이 사건의 가해자였지만, 모두 적당한 처벌은 커녕, 길가다 싸움 붙은 것에 대한 것만도 못한 처벌을 받고 풀려났고, 오히려 피해자는 신원을 보호받지 못하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가까스로 전학간 곳에서까지 가해자 부모에게 시달리다가, 현재 실종상태다. 대략적으로 이렇게 간추린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아 나는, 정말 이 시대와 이 세계가 절망스럽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2004년, 지금보다 더 머리가 비어있을 때다. 생각이 없었다기 보단,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허세를 크게 떨었다. (물론 지금도 가끔 그러지만) 정치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정치는 사실 도덕적으로 완벽한 현정권이 잘 가르쳐줬고) 남을 대하는 태도도 지금보다도 더 부족했다. 그때 내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가!? 2004년 12월...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복잡했을 시기다. 아무튼 그 당시 내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혹은 별 충격을 주지 못했거나.

 

그러니깐, 이 <41>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정확히 알게되었다. '그런 일'에 대해서. 가해자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수사를 했던 경찰의 태도, 가해자 부모들의 태도 등... 정말로 끔찍하고 철저하게 그 아이를 짓밟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보였다.

 

시나리오와 소설을 함께 쓰는 이의 글 이라서 그런지, 그의 글이 더욱 궁금했다. 우선,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밌다. 순수문학을 읽을 때의 그런 언어로부터의 사색까지는 없다 치더라도, 적당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읽는 내내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야기는 심플하다. 밀양 사건이 터지고 몇년 후,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들의 공통점은 밀양 사건 가해자들 중 핵심멤버 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용의주도하고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범행으로 인해 합동수사본부, 형사인 정태와 제훈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 범죄의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시윤은 우연히 사랑을 시작함과 동시에 슬슬 일을 마무리 해간다. 이윽고 쫓는자는 포기하고 쫓기는 자는 일을 끝마쳤을 즈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정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책은, 실제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살고있는,(그러니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혹시나 당신이 지지리도 운이 없어서 그 귀한 시간에 내 글을 읽는 이 시간에도 말이다! 멀리 있다는 보장도 없다.) 41명에게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이제는 그들을 다시 처벌할 수 없기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상상속 처벌같은 느낌이다. 작가는 어떠한 마음으로 썼을지 몰라도, 독자는 충분히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불타오르는 복수심 만이 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형사들이 갖고 있는 가정에 대한 문제 - 불규칙하고 위험한 생활로 인한 불만의 폭발이나, 범행을 저지르는 시윤이 겨우 찾아낸 사랑앞에서 자신의 거취를 고민한다던가 하는 경우를 통해, 비단 피해자나 가해자의 관계자들이 아니더라도, 아니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일과의 우선순위에서 머뭇거리는 모습 처럼, 우리네가 살면서 어떤 흉악범죄나 사건, 혹은 정치적 문제와 맞닥뜨렸을때, 우리를 직접적으로 둘러싼 문제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과정은 당연히 우리의 망각과도 직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해자를 법적으로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도 끝끝내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적절한 심판을 받지 못한채로, 그러니깐 아무런 죄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아니하고, 사회에 내놓게 된다.

 

'모든 사건의 수사에 있어서 시간은 가장 큰 적이다. 증거는 흐릿해지고 용의자의 혐의는 희석되고 수사진의 의욕도 떨어진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미스터리의 문이 닫히고 만다.' (158)

 

이렇다할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며 범죄가 더이상 늘어나질 않자 수사본부가 축소될 위기에 처한 모습을 그린 이 대목은, 우리의 관심과 망각의 과정을 잘 드러내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을 우리는 인정하되, 극복하고자 애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 옆에 범죄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단 한발짝의 생각도 나아가지 않은 사람이 우리 옆에서 우리의 소중한 누군가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인간을 예의 바르게 만드는 힘은 관용이 아니라 공포야. 죄의식 역시 충분한 벌을 받아야만 생기는 일종의 공포야. 함부로 행동하다간 혼난다는 공포. 너희들은 그 공포가 결여된 놈들이지.' (240)

 

그리고 또 한가지는, 법원, 병원 같이 우리가 우리와 같은 사람을 앉혀놓고도, 신처럼 모셔놓은 어떤 체제에 대한 반성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거나 바라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무소불위 와 같은 권력을 주고 있는 것은 이미 위험천만한 선을 넘었다. 그래서 그런 곳은 일반인이라면 대부분 약자가 되는 곳이다. 대부분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알지못하는 것은 당연히 두렵고, 또 그런 것들이 겹쳐셔 우리는 법을 잘 아는 이들에게 항상 약자의 위치가 되어버린다. 이번에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배우 안성기가 맡은 역할이 왜 그렇게 통쾌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법은 이미 어떤 의무나 책임보다는, 아는 자들, 소유한 자들이 갖는 하나의 '권위'와 '권력'으로 파생되어있다. 권리를 주는 것과 권위를 주는 것은 다르다. 사실상, 자신있게 '법대로 해라'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죄를 안지은 사람이 아니라, 막 살거나 혹은 법을 아주 잘 알거나, 돈이 많아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일 뿐아닐까? 우리는 착각한다. 우리가 법에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물론 보호받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지금의 생활은 불가능할 테니깐.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론, 그것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당연 조건이지, 우리를 위한 조건은 아니다. 본래 유지되기 위해 그런 위치를 만들어 놓았다고 보는 셈이다.

 

상위 몇 퍼센트를 위한 정당을, 그런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찍는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잘 살겠지, 혹은 그렇게 잘 살게 해주겠지, 하며 미래를 기약하며 투표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인 것이다. 마지막 한가지는, 법은 언제나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할수록 사람이 변하고 사건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법은 언제까지 고정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옛날에 만들어진 법은 그 사람들이 신이기에 완벽한 법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법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만들었던, 그 시대의 룰 일 뿐이다. '법이 이러니깐 안돼' 라는 것은 때론, 어릴 적 옷을 입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의 범죄들중에서 아직 법이 없어서 제대로 된 단속이나 처벌을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현재에서 머무른다면 안정적이긴 하나, 그것이 최고의 생활이라고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마치 '악법도 법이다'라고 우길 것이라면 나는 묻고싶다. 그저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정말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법은 완벽하고, 판사는 완벽한지. 만약 아니라면 그 완벽하지 않은 것들은 대체 언제 바로잡아야 하는지. 우리는 항상 법을 감시하고, 개선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꼬마비, 노마비 작가의 <살인자ㅇ난감>을 읽었을 때만 해도, 여러가지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 이들을 보면서도, 불확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법의 판단'에 맡기고, 우리가 그 법이 올바르게 집행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감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근본적인 생각에 변화는 없다. 하지만 실화가 모티브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 범죄가 그토록 끔찍하고 울분터지기에 그런 것일까? 잔인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했지만, 결국 당해도 싸다 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깐, 여기서 또 한가지 웃기는 점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법이 똑바로 집행되지 못했을때, 우리는 뒤틀린 심판을 옹호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우리의 뒤툴린 심성은 곧 삐뚤어진 법이 만들고 있기도 한 셈이다. 새삼 결론은 같은 듯 하다. 우리가 우리와 같은 인간을 데려다놓고 신처럼 떠받드는 그곳의 권위를 밀어내고, 그것이 우리와 같은 높이에서 우리를 지키는 울타리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감시하고, 개선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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