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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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원작의 영화들은 가능하다면 영화->소설의 순으로 접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기가 쉽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게 어느쪽에도 '더 만족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영화를 못 본 상태임에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의 원작 소설이라는 것만으로 이 책을 기대했다. 애석하게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같은 상황이고, 그것이 무척 아쉽다. 물론 아쉬움의 크기만큼 이 책이 맘에 든다는 뜻이다.


 처음엔 읽기가 좀 버거웠다. 작품 초반에는 신변잡기와 묘사와, 인용 등이 다소 복잡하게 뒤섞이며 이야기가 좀 처럼 시원하게 전개되진 않는다. 문제는 문장을 시작부터 끝까지 집중하지 않거나 문장 과 문장의 연결을 쉬이 넘기면 헷갈리게끔 대화, 생각, 인용문이 문장부호로 잘 나눠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는 그 표시 방법이, 이어지는 문장에서도 변화하기도 했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다만, 이것이 책에 오류가 있단 뜻은 아니고, 작가가 내세운 화자이며 주인공인 작가 캐릭터가 세상과 타인을 묘사하는 '의도된'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자랑은 결코 아니지만) 책을 잘 읽지 않고 있는 내게는 더욱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느정도를 꾸역꾸역 헷갈려하며, 다시 위로 올라가기를 더러 반복하다보니 이 작품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점차, 신형철 평론가의 소개글이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한 남자의 강연을 들으러 가는 여성 (화자)으로 부터 시작한다. 강연의 내용은 전 지구적인, 인류와 기후에 관련한 디스토피아 적인 내용이다. 또한 더불어 얼마안가 성별 갈등에 관해서도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라 하며 말한다.


(치매가 있는 듯한 노인과 며칠 간 마주 칠 때마다 스몰토크를 했다가 어느날 더위로 인해 다소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은 날 전혀 다른 사람처럼 '위협적으로' 치근덕대던 노인에게서 도망쳤던 여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여자가 절대 갖지 않았고 절대 갖지 않으려 했던 희망이 딱 하나 있었다. 만약 삼십 년이나 지난 후에도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단 한 사람,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내가 기다려왔던 신비를 가져다줄 강한 남자를 찾지 못한다면, 세상에 가득한 괴짜나 약골이나 애정에 굶주린 사람이 아닌 진정한 남자를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그런 남자는 그냥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새로운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 할 수 있는 일은, 당분간은, 서로를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일 뿐이다. 거기서 더 나올 것은 없으니, 분쟁과 혼란, 모든 관계에 내재한 어긋남에서 각자 빠져나올 방법을 알아낼 때까지 여자와 남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상관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다른 어떤 것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래야만 한다. 강력하고 신비롭고 진정한 위대함을 지닌 어떤 것. 다시금 서로 기꺼이 따를 수 있을 어떤 것.


 어쩌면 언젠가는. 하지만 잉에보르크 바흐만이 자전적인 글에서 이렇게 쓴 것이 거의 반세기 전인데, 그 이후 남자와 여자는 더욱 벌어지기만 했다.

p79




이 얼마나 영리하게 젠더갈등에 대해 말하고, 방안을 제시하는가. 일단 우리가 다시 새로운 화합을 할 방법을 찾을 때 까지 일단 '친절' 하라. 이렇게 거시적인 담론을 거쳐, 그 속의 한 개인으로 향함에 있어 거침없으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움이 뭍어난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조심스런' 물음과 관심이다.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한.




하지만 나중에 내가 깨달은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자기들끼리도, 다른 어른들은 물론 친밀한 사람들하고도 전혀 옛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입힌 일이라면 특히 더 그랬다. 누가 그런 일을 떠올리고 싶을까?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듣고 싶을까? 오직 작가들이나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하겠지.

'말하지 않은/말할 수 없는untold' 은 그런 면에서 좋은 단어이다. 물론 이야기하거나 서술되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또한 너무 버거워서 말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은/말할 수 없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 말하지 않은/말할 수 없는 고통.

p115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

p122




앞서 말했듯 초반엔 주로 신변잡기나, 인용을 통해 마치 타인의 생각을 대신 전달하듯 묘사하다가 점차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살펴보고, 고민하고 드러낸다. 책을 보고 있을때는 그저 어렴풋하게 느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작중 화자가 처하게 되는 상황과 그에 따른 심경 변화에 따라 묘사하는 대상과 시점이 변화하는 것이 꽤 적절했던 듯 느껴진다. 좀 더 기민하게 읽었다면 이 점진적인 변화가 꽤 흥미로운 지점이 되었을 것이다.

인류의 존망에 관한 강연 이야기로 시작해서 점차 한 인간의 존망이 걸린 이야기로 흘러가는 이 작품. 즉 인류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 했지만 결국은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데, 오히려 이런 한 인간과 인간이 함께하는 모습을 통해 인류가 나아갈 길에 질문을 던진다.




내게 필요한 건 나와 함께 있어줄 사람이야. 친구가 말한다. 물론 혼자 있는 걸 원하기는 해. 결국 내게 익숙하고, 또 늘 열망했던 게 그거니까. 말기 환자라고 그게 달라지지는 않아. 하지만 완전히 혼자서 있을 수는 없어. 그러니까 새로운 시도이고, 그게 정말 어떤 일일지 어떻게 알겠어. 뭐라도 잘못되면 어떻게 해? 전부 다 잘못되면 어떡하겠어? 옆방에 누군가 있을 필요가 있는거지

p129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p167




우리가 어떻게 얼마나 살아가든 그리고 삶을 위해서든 아니든 누군가가 필요하다. 설혹 바로 옆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삶 또는 죽음에, 그러니깐 그것을 다 포괄한 인생에 있어 타인의 필요와 그에 따른 적절한 거리를 생각해 본 적이 다들 한번쯤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거기에 이렇게 대답한다. 혼자 있기 원하지만 모든 걸 혼자 할 수 없는 인간에게 필요한 거리, 옆 방 만큼의 거리.




그런데 실은 신이 거기서 더 나아간 거라면. 서로 다른 언어가 단지 서로 다른 종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지문처럼, 개별 인간들에게도 주어진 거라면. 그런 다음, 인간의 삶에 훨씬 더한 분쟁과 혼란을 초래하여 인간들이 그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많은 민족이 있다는 점은 납득할 수 있지만, 한 민족 내에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전 애인에 따르면 이것으로 인간 고통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농담이라고 여기겠지만, 그저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그러하다고 믿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언어를 지녔으므로 그 뜻이 저 자신에게는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끼리도? 미소를 띠며, 떠보듯이, 기대하면서, 내가 물었다. 우리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그저 미소만 보였다. 하지만 몇 년 후, 쓰라린 헤어짐의 순간에 쓰리란 대답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그렇지.

p219-220


애도하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독자들이 소설로 이끌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기로 떨리는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덥히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베냐민은 말했다.

나도 애를 썼다. 단어를 차례로 놓았다. 그 모든 단어가 다른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다른 삶이 그렇듯 친구의 삶도 다른 식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ㅡ

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p252




타인의 고통이 내가 겪지 않을 것이 아니라, 나도 겪을 수 있다 생각하고, 누군가의 절규에 문을 열고 건너가는 이들이 있다. 때로는 그것이 무의미하거나, 손해일 수 도 있다. 바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이타적인 이들을 통해 세상은 서로를 견디게 한다.




네영카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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