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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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행하지 않은 살인, 아슬아슬하게 피한 살육,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파괴적 증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한번은 들어봄직한 학교괴담. 만년 2등에 머무르는 학생이 1등을 살해한 이야기. 이것이 그렇게 보편화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야기의 단순성 때문일까? 그 2등을 했던 학생의 감정에 대하여 우리가 최소한의 수긍을 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회가 발달할 수록, 모두가 다 원하는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포장되기 싶다. 인간이 희소한 것에 가치를 두는지, 우연찮게 가치를 둔것이 희소한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두가 동등하게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룰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2등을 하는 학생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을까. 아니면 1등을 하는 학생 때문일까. 둘 다 라고 생각되어진다. 한 사람의 삶이 바뀌는데에 타인의 존재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니깐. 우린 결국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그 영향을 준 타자에 대한 대응이 없어질 순 없다. 만약 그것이 마찰과 파괴라면, 우리는 증오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으레 거기서 멈추며 살아간다. 하지만 증오의 감정이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면, 영향이 컸다면, 혹은 그렇게 느꼈다면...? 자신의 삶이 지녀온 그림자의 발단은 타인에게서 찾은 존재, 에드워드가 니콜라에게 행하는 복수, 추리, 그 심리의 묘사가 바로 이 <편집된 죽음>의 이야기다.

 

사교능력이 좋진 않았지만, 절친한 친구 둘과 뜻을 모아 문학잡지를 펴냈던 에드워드는 재정적 어려움을 니콜라에게 의존함으로 인해 니콜라의 글을 싣게 되며 절친했던 친구 둘을 잃는다. 또한 니콜라를 위한 잡지가 되어가며 결국 발간은 중지된다. 애초부터 잡지에 대한 권한을 쥐고싶던 니콜라는 당연히 에드워드가 기댈 곳이 되지 못했고, 에드워드는 지하묘지에서 만나게 된 야스미나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했지만, 얼마 후 그녀는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자책과 절망으로 어긋나 살아온 30년의 세월, 하지만 콩쿠르 수상이 확정된 니콜라의 소설이 그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이제 남은 니콜라의 삶을 편집할 것이다. 그 죽음 까지도.

 

그동안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한, 에드워드의 복수는 유년시절에서부터, 그 현재까지의 심리, 그리고 책의 제작과정을 이용한 범행으로 '비블리오 미스테리'에 대한 놀라움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현대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이전 책의 제작과정을 잘 모르는 이에게, 책을 활용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를 끌지만, 그것보다 더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열등감과 배신감, 복수와 열등의식, 그리고 그럼에도 차분히 범행의 장치를 하나하나 완성해 나가는 에드워드의 심리에 대한 것일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정말 한 사람에 의서 좌우되는 것일까? 삶에, 편집의 개념을 대입해본다면, 우리가 주어진 삶이 어떻게 편집 되는가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기만한 것일까? 에드워드는 문학잡지에서 니콜라의 글을 편집함으로써 니콜라가 니콜라가 아닌 것으로 편집 하였다. 그리고 니콜라는 야스미나를 사지로 내몰면서 에드워드의 삶을 편집한 것에 다름없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 이것은 분명 편집의 개념과도 멀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책임의 여부를 떠나, 적어도 수긍의 여부는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사랑의 편집, 감정의 편집, 결국, 삶의 중요한, 누군가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는 것에 대한 편집. 하나의, 한명의, 삶은 어쩌면 수많은 편집자를 거쳐 앞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가장 큰 권한을 갖고 있지만, 때론 누군가에 의해서 방향이 바뀌기도 하듯 말이다. 잘 아는 분야긴 하지만 일단 책의 마케팅을 예로 들기만 해봐도, 출간된 책의 판매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이지, 그 방향으로 안내한 이에게 책임을 돌릴지, 아니면 그 방향으로 진행시킨 이에게 돌릴지 판단은 제각각이 될 수 있다.

 

한 개인의 삶을, 당사자의 책임으로 모는 것은 쉽다. 누가 그 삶을 대신 살아줄 순 없으니깐. 그리고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리 삶의 편집자는 바로 우리 각자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삶의 가장 큰 특성중에 하나일,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불변의 사실때문에, 결국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을 책임지지만, 그 사실이 그 주변을 지나쳤던 타인들의 면책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을 모두 책임질 필요가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결코 누구의, 혹은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적어도 문명사회에 이르러서는) 삶의 책임은 결코 거울속에 비친 존재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방향을 침범한, 그런 무례한 외부의 편집자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혹은 적어도 자신만을 탓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스스로를 강하게 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덕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런 괴로움이 자신의 하루를 더디게 한다면, 조금은 그 짊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은 더 가벼울지도 모르니깐.

 

어쩌다보니 에드워드를 옹호하는 꼴이 되어버렸지만, 살인을 어떻게든 옹호할 순 없는 것이다. 결국 인생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 책임에 대한 '실행'이 없다고 해도, 그 원래의 몫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것처럼, 우리는 거기에 대해 인정하고 이해하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한 개인의 탓으로 여길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우선시되야 할 것은 '구분'이진 않을까.

 

한 사람의, 한번의 삶은 그 자신이라는 책임편집자와 더불어 사는동안 만나는 수많은 편집자들과 함께 한다. 에드워드와 니콜라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편집해왔다. 그것이 그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재미와 동시에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만나고 헤어지는 타인의 존재를 얼마만큼, 어떻게 인식할지에 따라 삶은 매 순간 방향을 달리할 것이다. 에드워드의 인식이 달랐다면 이야기도 분명 달랐을 테니깐.

 

자신에 대한 인식, 자존감, 나 자신의 삶에는 어떤 수많은 편집자들이 거쳐갔을까. 진심으로 고마운 이도, 미웠던 이의 이름도 하나씩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삶에 어떤 편집자로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물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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